수록작품(전체)
특집/우리 시대의 시인, 이영춘/시론 시의 발자국을 되돌아 본다
페이지 정보

본문
시론
이영춘
시의 발자국을 되돌아 본다
1.반성
詩歷 39년을 맞는 해이다. 시력이라? 과연 나에게 시력이라 할 만한 자격과 가치가 있는가? 반문해 본다. 그리고 나는 몇 등 칸에 앉아 있는 시인인가? 수시로 반문하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만족스럽지 못할 때가 있다. 그러면서도 시에 대한 ‘욕심’만은 놓을 수가 없다. 아마 물질적인 ‘욕심’이라면 이렇게 드러내 놓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시에 대한 ‘욕심’만큼은 부끄럽지 않으니 이상하다. 왜 그럴까 생각해 본다. 정신적 가치를 추구한다는 명목 때문일지도 모를 일이라고 스스로 위로한다.
1976년 7월에 등단하여 지금까지 시집 13권을 냈다. 그리고 ‘시선집’ <들풀>(2009.현대시세계)을 냈다. 아마 한 권에 최하 60-65편씩 실었다 하여도 1000편은 넘는다. 물론 버린 작품까지 2000편 이상은 썼을 것이리라 짐작된다. 그러나 누가 나에게 대표작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선뜻 대답이 나오지 않을 때가 많다. 그것은 독자들의 시선에서 독자들이 결정할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많은 시 중에서 ‘대표작’이 없다면 내 시 인생은 헛된 것이 아닌가를 반문하기도 한다.
물론 시인마다 자신이 좋아하는 자기 시가 있을 것이다. 나 역시 그렇다. 또한 독자들이 좋아하는 시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시단에 한 획을 그을만한 나의 대표시가 과연 있을까?라는 의문에 봉착할 때면 나는 늘 괴롭다. 한 평생을 시와 함께 살고 시와 함께 생을 바쳤음에도 부끄럽다.
오호, 통재라! 나의 시여! 나의 시혼이여! 그러나 아직 장사지내고 싶지는 않다.
2. 치유의 독백
시에 대한 정의는 참으로 많다. 워즈워드나 폴 발레리, 그리고 릴케의 말이 아니라 하더라도 정곡을 찌르는 시의 정의를 염두에 두고 그런 시를 쓰려고 노력할 때가 많다. 예를 들면 “시는 자연스러운 감정의 유로다. 시는 직관이다. 시는 종교다. 시는 체험이다. 시는 어머니의 말이다. 시는 침묵이다. 시는 신의 말이다. 시는 묘사다.”등 수없이 많다. 이런 시에 대한 정의들이 마치 내 것인 양 이에 걸맞는 시를 쓰려고 노력한다. 그 중에서도 “신의 말을 가장 잘 알아듣는 사람은 시인이다.”라는 이 말에 가장 호감이 간다. 그래서 기도할 때마다 나는 “신의 말을 가장 잘 알아듣는 시인이 되게 해 달라”고 한다. 또한 “신의 계시 같은 하늘의 언어를 내려 달라고 기도한다.”
특히 시가 잘 안 써질 때 할 수 있는 행위이다. 솔직히 말해 때로는 쓸 거리(소재)가 없을 때도 많다. 그럴 때마다 프랑스의 앤 라모트의 말을 생각하기도 한다. “쓸 것이 없다고 하지 마라. 네 어리던 날부터 지금까지 네 살아온 날들을 되돌아 보아라. 무궁무진하게 쓸 이야기가 많다.”라고.(글쓰기,잘쓰기=중앙일보刊.1996 송정희옮김)
이렇게 쓰고 보니 나도 꽤 시에 매달려 살고 있는 시인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다. 시의 뮤즈여! 나를 버리지 말아 다오. 오오---
3. 내 시에 대한 정의와 쓰기
나는 늘 문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이렇게 강조한다. “문학이란 곧 인생 이야기다”라고. ‘인생 이야기’는 참으로 많다. 나의 이야기를 비롯하여 ‘가족이야기’ 이웃이야기‘ 나아가서 사회상, 역사, 철학, 종교, 등 수없이 많다.
어떤 사물이나 사건에서 간접적이든 직접적이든 정서적 모티브가 충돌되면 그 체험에서 소재를 잡는다. ’인생 이야기‘중에는 내 혈육에 대한 이야기와 가족에 대한 이야기가 많다. 모두 다 직접 체험에서 얻은 소재들이다.
가령 <바람의 집 1.2> <해, 저 붉은 얼굴><시간의 저 쪽 뒷문><컵라면>등은 모두 혈육을 통한 인생 이야기들이다. 이웃에 얽힌 인생 이야기도 많다. <슬픈 도시락><들풀><빗길을 걸으며>등은 모두 내 이웃들의 이야기다.
내 시의 시선은 늘 밝음 쪽보다는 어둠 쪽에 머물러 있다. 그런 이유로 내 시에는 그늘진 이야기와 그늘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그리고 내면의 사유세계를 추구하는 시들은 책을 통하여 얻어진 간접 경험으로 그려진다. 예를 들면 나의 13번째 시집<노자의 무덤을 가다>에 실린 <저문 강, 하늘 문> 혹은 <저, 강 붓다의 침묵>등은 ‘싯다르타’에서 시의 화자를 연상에서 쓴 시다. 헤르만 헤세가 쓴 이 책을 나는 무지 좋아하기도 한다.
<길, 혹은 열 네 번째 아해>는 말할 것도 없이 ‘이상李箱의 시에서 유추한 것이고 <노자의 무덤을 가다>는 노자의 ’도덕경‘에서 유추한 사유를 표현해 본 시다.
그러므로 내 시는 대부분 일상생활에서 보고 듣고 체험한 ‘인생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특히 나 자신의 이야기는 물론 가슴 아픈 이웃의 이야기들이 그렇다. 그래서 시가 어둡다는 말을 많이 듣기도 한다. 그렇다고 내가 무슨 박애주의자도 아니다. 그냥 그런 사람들에게 마음이 머물기 때문이다.
또 하나 내가 지향하는 세계는 인간적 고뇌에 얽힌 내면의 심상을 그려낼 때가 많다. 예시하면 근간에 쓴 <장미의 온도><내 손톱,포르투나><와디wadi의 바람>등이 그런 유의 작품이다.
아무튼 나의 시는 나와 내 이웃의 아픈 이야기들러 구성된다. 그 이야기들은 나의 정서적 충돌에서 파생된 나의 분신들이다. 그런 분신들과 끊임없이 싸우면서 가고 있다. 그것이 나의 시 세계이자 정신 작용이다.
4. 신작시에 대한 변명
이번에 여기 발표되는 신작시는 3편이다. <월담>은 새 봄이라 따뜻한 이야기를 쓰고 싶어서 사물을 의인화하여 쓴 것이다. 가슴에서 응고되어 툭 튀어나온 정서가 아니라 의도적으로 쓴 것이다.
“절실하지 않으면 쓰지 말라.”는 어떤 시론에 위배되는 것 같기도 하지만 밝은 이미지를 구사해 보고 싶었다.
그리고 <독거노인>은 이웃의 애틋한 이야기에 시선을 맞춰 쓴 작품이다. 사실상 오늘 날 우리 사회는 고령사회임과 동시에 독거노인이 너무 많다.
국가적 난제이기도 하다.
이미 농촌에는 아이들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은 지 오래됐다. 청,장년도 볼 수가 없다. 여기 저기 폐교된 학교가 너무 많다. 안타까운 현실에 우리는 처해 있다. 따라서 혼자 사는 ‘나홀로 족’! 이런 난제들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 이런 현실을 볼 때마다 아득하다.
그리고 세 번째 <클로토의 베틀>이란 작품은 나의 내면의식, 즉 삶과 죽음의 경계를 그려 보았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베를 짜는 여신 ‘클로토’는 ‘운명’의 여신이다. 언제부턴가 나는 이 클로토를 좋아하게 됐다. 가시적으로 보아왔던 내 어머니의 삶이 연상되기도 했다. 실제로 나는 우리 어머니가 베를 짜는 모습을 많이 보면서 자랐다. 그래서 클로토를 연상할 때마다 어머니가 떠 오른다. 그리고 세 여신들의(클로토. 라케시스. 아트로포스) 운명을 관장하는 ‘모이라이’를 연상해서 내 운명을 그려 본 것이다. 내면 의식의 분출이다.
5. 休, 그리고 靜中動
어젯밤 나는 이 ‘시론, 나의 시 세계’라고 하는 이 글을 쓰다가 잠이 들었다. 그런데 꿈속에 ‘休’와 그리고 ‘靜中動’이란 글자가 나타난 것이다. 참으로 이상했다. 그러나 꿈속에서는 무엇인가 이 글자 속에 오묘한 진리가 있는 듯 계시적 글자로 떠 올랐다. 특히 ‘休’자에서 그랬다.
‘休’는 멈춤이 아니라 ‘쉼’이다. 내 시도 필시 ‘休’같은 침묵의 시를 쓰라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봤다. 침묵의 시, 그런 오묘한 진리와 그런 시 세계를 그려내고 싶었던 적이 많다.
시는 독자들에게 ‘행간 침묵’을 읽게 하는 시가 좋은 시라 하지 않았는가? 김종삼의 <墨畵>같은 바로 그런 시를 이름이리라.
그렇다면 ‘靜中動’이란 또 무엇이란 말인가? 참 이상도 하다. ‘고요함 속에 움직임’이라? 휴와 같이 침묵같이 고요함 속에서 분하구로 분출되는 그런 움직임이 있는 시! 살아 있는 시, 그런 것이리라. 결국은 침묵 같은 시이면서도 분화구처럼 살아 움직이는 시를 쓰라는 계시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런 시를 쓰기 위하여 나는 항상 서정적 정서의 충돌을 중심에 둔다. 반면 현대적인 감각을 지닌 이미지즘 시를 중시하기도 한다. 그것은 현대시의 핵이 되기 때문이다. 앞으로도 시의 정서적 감각의 축과 이미지즘적 핵을 겸비한 시를 쓰도록 노력할 것이다.
- 이전글특집/우리 시대의 시인, 이영춘/자술년보 15.07.09
- 다음글특집/우리 시대의 시인, 이영춘/신작시 3편 15.07.09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