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작품(전체)
근작읽기/허문태/새우 외 4편
페이지 정보

본문
근작읽기
허문태
새우 외 4편
9월 초승달이
알곡처럼 속살이 여물 때쯤
휜 허리 마디마디
외할머니는 괴질을 앓는다
그 황혼 한 자락에 손을 넣으면
내장이 비쳐드는 아린 알몸에
오한처럼 서걱이는
한 줌 소금기
높새는 밤새 처마 끝에 울고
그 청상의 아련한 불빛 사이
톡톡 튀어 오르는
어린 손자들의 은빛
비늘들
한평생 촉촉이 베틀에 앉아
한없이 부드럽고
깨끗한 천을 짜는 그 눈의
긴 촉수여
한갓 목숨쯤이야
있는 듯 없는 듯
뜰 아래 흰 고무신 한 켤레
새벽녘까지 허옇게 모시를 삼다
뿔테 고운 돋보기를 벗어놓고
윤기 좌르르
이때 한 번 외할머니는 허리를 펴신다
포클레인
모든 무너지는 것에는 사이렌 소리가 난다 허리 부분이 앙상히 잘린 도로 확장 공사장 빈 터, 달빛이 은은히 떨어지고 있다 벽돌들의 잔해 속에서 월셋방 벽보가 지느러미를 파닥인다 그 수없이 드나들던 산동네 골목길, 다시 언뜻 가겟집의 백열등이 눈앞에 흔들리다 사라진다
아직도 나팔꽃은 낮은 담장을 기어오른다
거기 통장네 집 손바닥만 한 창문 앞까지, 거인처럼 포클레인이 무기질의 근육을 완강히 감추고 눌러 서 있다 외등 둘레로 왁자지껄 한파가 깔린다 귀 기울이면, 나팔꽃 속에서 아이들의 재잘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그들은 지금쯤 어느 강을 건너고 있을까
퍼런 집념의 삽날들 사이로 물고기의 비늘처럼 달빛이 떨어진다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하면서 나는 또 소박한 가슴들을 얼마나 무너뜨렸는가 무너지는 것에는 사이렌 소리가 울린다 어쩌면 차라리 그것이 힘인지도 모른다 신호등에 걸려 있는 저 천진한 눈빛들
고사목
다 생략하고
어려운 상징만 남았다.
침묵 아니다 무념이다
수 만 가지 아니다 하나다.
죽을 때까지 사는 것이 아니다.
죽어야 사는 것이다.
하늘로 향한 가지 끝에
아침 햇살 설핏 지난다.
개망초
해마다 문내실 마을에 장마들면
무너진 토담을 지나
에베미 들판에서 백령산 자칫골까지
마냥 히죽이죽 헤매던
고모야
문내실 고모야
그 해,
유월 지나 칠월인가 팔월인가
온 산하에 콩 볶듯 총소리에 놀라
하얗게 정신을 놓아버린
눈 맑은 고모야
막내 고모야
불가마
훅!
숨이 멎었다.
그 누나의 꽃무늬 팬티
반닫이 맨 밑 서랍에 단정히 접혀 있었다.
친구 몰래 책가방에 숨겨왔다.
비 오듯 땀이 흘렸다.
땀방울이 온 몸을 적시도록 살고 싶었다.
촘촘히 희망을 담는 곡식들처럼
뜨거운 벌판을 가로질러 달리고 싶었다.
왜, 미친바람이 되어
겨울 강 어둠 속에서 홀로 헤매었던가?
제 스스로 뜨거워 질 수 만 있다면
제 스스로 뜨거워 질 수 만 있다면
저물 녘,
문득, 다시 그녀 앞에 앉는다.
훅! 숨이 멎는다.
진땀이 뚝뚝 떨어진다.
- 이전글근작읽기/정령/세상과 소통하는 서정의 출구 하나 열다 15.07.09
- 다음글특집/우리 시대의 시인, 이영춘/자술년보 15.07.09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