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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특선/박일/눈동자 저 깊은 곳에는 외 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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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특선
박일
눈동자 저 깊은 곳에는 외 4편
바람이 분다
산수유 나뭇가지 하나가 눈을
들여다본다
빨간 열매 서넛이 기웃거린다
이파리 하나에 지나온 세월이
매달려 흔들린다
바람이 분다
산수유 나뭇가지 하나가 눈동자를
들여다본다
눈물 저 안쪽 깊은 침묵 속에는
눈물 가득한 빨간 열매들의 소리
바람이 분다
천지를 헤집는 햇빛 소리들과 함께
숨을 쉬는 소리들
눈동자 안에는 소리가 있다
산수유 나뭇가지 하나
그림자로 돋아난
화수포구에서
자네, 그림자를 남기고 싶거든
화수포구 골 깊은 갯골로 오게
갈매기들이 하얗게 몸을 털다가
안개로 일어서는
갯골로 오게
사람들의 바다가 그림자를 만드는 그곳에는
이마에 소금기가 앉은 어부들과
아낙들이 돌부처가 되어
삶을 깁고 있네
자네, 화수포구 골 깊은 갯골의
갯골 사이에서
손을 흔들어 보게
살아 있는 자, 그대의 목숨이 목숨인가
숨을 쉬는 자, 그대의 밤이 밤인가
뜨거운 심장은 보이지 않네
보이지 않는 손들이 손을
흔드는 세상이기에
자네, 빨리 갯골로 와 보게
햇살의 주검이 바다로 가라앉는
눈물을 보게
표본식물
더 이상 흔들리지 않는다
마른 풀잎은
낡은 세상의 표본처럼
굳어서 부서져도
강력접착제로 고정이 된다
펄럭이는 공기자락 위로
고정된 시선만을 지니는
학식 있는 분들이
망치를 좀 주게 하며
풀들의 눈을 때려 보지만
시력은 교정이 되지 않는다
좀처럼 좁혀지지 않는
세상과 세상 사이의 공간의 틈새
가까이 가도 다가설 수 없는 벽으로
들러붙는 주검이 존재하는
풀기가 빠진
풀잎들의 세상
옛집
가끔은 좌초되기도 한다
나침반이 없는 바다에서
날개가 없는 새들이 하나씩
마른 깃털로 치장하지만
이내 추락한다
그대는 눈을 감아라
비명과 상처로 어우러진 일상 속
우리의 옛집에는
몸을 덥힐 뜨거운 불씨가
살아 있지 않다
마른 헛기침이 굴러다니는 아침과
차디찬 이부자리 몇 채
난파선처럼 떠다니는 바다
그대는 눈을 감아라
자장가로 떠도는 유년의 기억과
절망으로 둘러쳐진 이름 몇 자
점멸하고 소생하는
아버지의 옛집
월미도에 달이 뜨면 그대는
물이었다가 불이었다가 때로는
서로의 입김이 되었다가
마음속에 피는 한 송이 눈물꽃의 붉은
향기가 되었다가
날카로운 가시가 사라진 이슬의 해맑은 눈빛이 되었다가
슬픔의 뿌리를 삼키는 파도가 되었다가
파란 하늘이 그리운 섬이 된다
시작 메모
계절이 옷을 바꿔 입으려 한다. 움츠린 어깨 위로 햇살을 쏘아댄다. 마음이 아프다. 시간이 흐르나 보다. 마음의 병이 깊숙이 자리했나 보다. 있는 듯 없는 듯 세상을 알기에는 내가 너무 여린가 보다. 봄의 기운은 스스로의 마음속에 있는데…….
삶과 죽음 사이에 내가 살아 있다. 살아 있는 사이에 내 모든 것들이 존재한다. 나와의 사이에 갈등과 번민과 불면이 존재한다. 내가 누구일까? 내용과 형식 사이에서 철학이 존재하고 잃어버린 사물들의 눈이 존재한다. 눈이 왜 존재하지? 모르는 척 하기도 아는 척하기도…….그러기에는 너무 늦은 계절이 되어 버렸다. 겨울과 봄 사이. 너와 난 아무래도 시간의 무용과 유용 사이에 서 있다, 존재의 자각으로 인하여. 혼동과 고통은 어디에나 내재해 있다.
늘 느낀다. 내가 쉬운 생각을 하며 사는지, 아니면 어렵게 사는 건지, 시가 어렵게 나를 만드는 건지. 시가 어렵다.
박 일 - 1985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사랑에게」(1991년)가 있다. 《먼 출발》 동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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