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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작읽기/박하리/서검도 외 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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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작일기
박하리
서검도 외 4편
논둑길에 천 년의 눈꽃이 피었다. 한겨울 꽁꽁 얼었던 얼음장이 깨어지고 뒤엉켜 바다로 흘러든다. 밀고 밀리며 떠내려 온 얼음이 섬 둘레를 가득 메운다. 어디에서 흘러온 얼음인지 알 수가 없다. 겨울의 전장은 섬을 건너 건너 또 건너에서 벌어졌을 것이다. 바다가 온통 폐허다. 외줄에 묶여 있는 여객선은 얼음 위에 마냥 앉아 있다. 육지로 향하는 발들이 선착장에 묶여 있는 동안에도 얼음은 끊임없이 섬으로 밀려든다. 선창가의 보따리들이 얼음 밑으로 가라앉는다. 얼음이 힘 빠진 여객선을 바다로 밀어낸다. 얼음이 잠 자는 섬을 먼 바다로 끌고 간다. 바다는 포효하고 얼음덩어리들은 춤을 추어도 섬은 잠에서 깨어나지 않는다. 겨울을 지키려는 바람이 아직도 바다를 휩쓴다. 발길 돌리는 논둑길에 천 년의 눈꽃이 피어있다.
변형 거미
바람 부는 날 태양은 넘어가고 집을 짓는다. 그를 감싸고 있는 보송한 허물을 벗고 매일 밤 쏟아져 나오는 사람들 사이로 들어가 함께 걸으며 집을 짓는다. 네온사인 빛이 흔들리면 흐느적거리고, 무리 지어 씩씩하게 횡단보도를 건너기도 하며, 그 속으로 섞여 들어가 집을 짓는다. 달려드는 자동차의 강렬한 불빛에 눈을 감는다. 감으며 걷는다. 사람들의 목소리를 따라 걷는다. 걸으며 짓는다. 등 뒤로 따라오는 사람들의 목소리에 발을 맞추기도 하며 집을 짓는다. 문득 사람들이 한꺼번에 사라진다. 콩콩거리며 되돌아간 거리에도 사람은 없다. 꿈틀거리던 근육에 통증이 온다. 멈춰선 다리 버리고 가로수에 몸을 날린다. 이 쪽 저 쪽 거미줄을 날리며 집을 짓는다. 집에 빠진다. 거미줄에 걸려 퍼덕인다. 퍼덕이면서 친친 얽는다. 모두가 사라진다. 모든 것이 사라진다.
아나파병원
간호원의 코맹맹이 목소리가 간지럽습니다. 앞 선 얼굴이 뒤 선 얼굴을 기억하기도 합니다. 환자들은 병원문이 열리기 전에 길게 늘어서서 번호표를 기다립니다. 병원문이 열리면 사람들은 온데간데없습니다. 고요합니다. 간호원은 손톱 정리에 열심이고, 병원장은 티브이 속 개그맨의 장난에 킬킬거립니다. 병원문이 활짝 열리면 짜장 시키셨죠, 철가방이 들어섭니다. 젓가락을 들고 몇 번 휘저어 비벼진 면발을 후루룩 삼킵니다. 문 밖으로 내어놓은 자장면 그릇에 마른 낙엽이 떨어집니다. 먼지 내려앉는 소리를 자장가 삼아 간호원은 이내 졸고 있습니다. 이따금 병원장의 이빨 가는 소리가 들립니다. 따르릉 전화가 옵니다. 안아파병원입니당. 티켓팅은 아침에만 합니당. 티켓팅만 하면 아픔이 사라집니당.
골목을 추억하며
이차선 도로에서 내려 동네 어귀로 들어서면 차로 접근이 되지 않는 골목으로 들어선다. 가끔씩 오가는 사람들의 발자국소리에 컹컹 짖어대는 소리가 골목 안을 흔든다. 이리저리로 통하는 골목길 이정표는 없고 바람이 길을 안내한다. 대문앞 돌 틈 사이로 바람에 날려온 풀씨가 꽃을 피우고 돗자리 붉은 고추가 바람에 마른다. 화분에는 파꽃이 피고 한겨울 채워줄 배추 모종이 파릇하다. 골목마다 시끌하던 기억이다.
서로 같기도 하고 서로 다르기도 한 야릇한 모양의 집들이 건물들이 누르고 겹치고 밀어내기도 하면서 골목은 사라지고 대로 일색이다. 대문을 들어서도 다른 대문이 나오고 그 대문으로 들어서면 또 다른 대문이 나온다. 안으로 들어서면 서로 같은 창들과 같은 벽들이 만나고 서로 다른 사람들이 들어가 서로 같은 방에서 일어나고 서로 같은 대문으로 나와 같은 대로로 사라진다. 태양은 더 밝게 빛나고 밤이면 가로등 불빛도 이채롭다. 시끌하던 골목은 땅 속으로 묻혀 버렸다. 재개발된 오늘의 빛나는 모습이다.
말이 말을 퍼올린다
말을 가둔다. 문을 잠그고 이중 삼중의 잠금장치를 걸어둔다. 그래도 새어 나간다. 연기를 피우고 새어 나간다. 말은 공기와 함께 섞여 나뒹굴다가 바람을 일으키기도 하며 태풍을 만들기도 한다. 태풍은 비를 만들고 겨울 내내 푸석하게 쌓여있던 덤불, 그리고 내다 버리려했던 말들을 섞어 강으로 흘려보낸다. 태풍이 지나간 후에도 덤불 속에는 스멀스멀 온갖 말들로 가득하다. 남은 말들이 섞이며 부풀어 오른 말들은 넘쳐 다시 바다로 흘러들어 간다. 온갖 말들이 뒤엉켜 촘촘한 그물을 만든다. 말이 말을 퍼올린다. 온갖 세상의 것들이 올라온다. 온갖 것들을 퍼올린다. 바닥이 훤히 들어나도록 부지런히 그물질을 하며 퍼올린다. 퍼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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