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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작읽기/이외현/천년의 눈꽃에서 꿈을 퍼 올리는 마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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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외현
천년의 눈꽃에서 꿈을 퍼 올리는 마법
시인들 중 오롯이 시인이 직업인 사람은 별로 없다. 내로라하는 시인 반열에 올랐거나, 나이가 들어 더 이상 직장을 다니지 못하게 되지 않은 이상 다른 직업이 있는 것이 보통이다. 다른 일을 하면서 짬짬이 시를 쓴다는 것은 생각만큼 쉽지가 않다. 시에 대한 정열과 사랑이 없다면 끝까지 하기 힘든 일이다. 자주 드는 생각이지만 ‘내가 왜 시를 써야 하는가’ ‘이것도 시인가’하는 시와 시인에 대한 정체성의 혼란과 좋은 시를 보면 밀려드는 열등감이 때론 발목을 붙잡을 때가 많다. 그래도 시를 놓지 못하는 것은 시를 매만질 때만큼 행복한 기억이 없어서이다.
우리는 각자의 일을 하면서 많은 일을 겪는다. 때로는 시의 소재가 되기도 하고, 그 기억을 토대로 새로운 시를 창조하기도 한다. 박하리 시인은 천년의 눈꽃이 피는, 강화 사람들도 잘 알지 못한다는, 강화의 작은 섬, 서검도 출생이다. 섬에서 자란 그녀가 도시에 나와 자영업을 하며 현실에 부대끼는 삶의 애환을 담은 시편들이지만 ,그래도 항상 그녀의 시 저변에 따뜻한 사랑의 눈길이 잔잔히 깔려있음을 알 수 있다.
논둑길에 천 년의 눈꽃이 피었다. 한겨울 꽁꽁 얼었던
얼음장이 깨어지고 뒤엉켜 바다로 흘러든다. 밀고 밀리며
떠내려 온 얼음이 섬 둘레를 가득 메운다. 어디에서 흘러
온 얼음인지 알 수가 없다. 겨울의 전장은 섬을 건너 건너
또 건너에서 벌어졌을 것이다. 바다가 온통 폐허다. 외줄
에 묶여 있는 여객선은 얼음 위에 마냥 앉아 있다. 육지로
향하는 발들이 선착장에 묶여 있는 동안에도 얼음은 끊임
없이 섬으로 밀려든다. 선창가의 보따리들이 얼음 밑으로
가라앉는다. 얼음이 힘 빠진 여객선을 바다로 밀어낸다.
얼음이 잠 자는 섬을 먼 바다로 끌고 간다. 바다는 포효하
고 얼음덩어리들은 춤을 추어도 섬은 잠에서 깨어나지 않
는다. 겨울을 지키려는 바람이 아직도 바다를 휩쓴다. 발
길 돌리는 논둑길에 천 년의 눈꽃이 피어있다.
ㅡ「서검도」
겨울이면 외딴 섬, 서검도는 육지와 철저하게 고립이 된다. 하루에 한 두 번 드나들던 여객선은 겨울 한파에 뱃길이 끊기고 언제 배가 나갈지 알 수가 없는 상황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어디에서 흘러 온 얼음인지 알 수가 없 ’는 얼음이 바다로 흘러들어 ‘바다가 온통 폐허다.’ 흘러 들어온 얼음은 ‘힘빠진 여객선을 바다로 밀어내’고 ‘얼음이 잠자는 섬을 먼 바다로 끌고 간다.’ 겨울이 봄에게 서검도의 바다를 양보할 생각이 없는지 ‘바람이 아직도 바다를 휩쓴다.’ 그래서 육지로 나가는 것을 포기하고 선착장에
보따리를 이고지고 와서 배를 기다리던 사람들이 발길을 돌려 천년의 눈꽃이 피어있는 논둑길을 밟고 집으로 돌아간다. 고요하고 적막한 서검도의 풍광과 얼음으로 둘러싸인 고립된 섬의 안타까운 모습이 한눈에 그려지는 시다. 이 시는 2012년 시노래로 만들어 시노래 콘서트 등에서 부르고 있다. 이 노래를 듣고 있으면 세상과 고립된 서검도와 눈이 시리도록 하얀 눈꽃이 연상되며, 깨어진 얼음의 모서리가 가슴을 후벼 파 토해 내는 고음이 듣는 이의 심연에 가라앉은 뭉클한 보따리들을 물위로 밀어낸다.
바람 부는 날 태양은 넘어가고 집을 짓는다. 그를 감싸고 있는 보송한 허물을 벗고 매일 밤 쏟아져 나오는 사람들 사이로 들어가 함께 걸으며 집을 짓는다. 네온사인 빛이 흔들리면 흐느적거리고, 무리 지어 씩씩하게 횡단보도를 건너기도 하며, 그 속으로 섞여 들어가 집을 짓는다. 달려드는 자동차의 강렬한 불빛에 눈을 감는다. 감으며 걷는다. 사람들의 목소리를 따라 걷는다. 걸으며 짓는다. 등 뒤로 따라오는 사람들의 목소리에 발을 맞추기도 하며 집을 짓는다. 문득 사람들이 한꺼번에 사라진다. 콩콩거리며 되돌아간 거리에도 사람은 없다. 꿈틀거리던 근육에 통증이 온다. 멈춰선 다리 버리고 가로수에 몸을 날린다. 이 쪽 저 쪽 거미줄을 날리며 집을 짓는다. 집에 빠진다. 거미줄에 걸려 퍼덕인다. 퍼덕이면서 친친 얽는다. 모두가 사라진다. 모든 것이 사라진다.
- 「변형거미」
거미집은 ‘거미가 먹이를 잡거나 알을 슬기 위하여 얽어놓은 그물’이라고 한다. 거미의 다리는 4쌍으로 두흉부에 위치하며 거미의 다리마디 중 슬절(무릎마디)과 척절(발바닥마디)은 곤충에게는 없다. 복부에는 호흡기의 입구(숨문)를 가지며 배의 아래쪽 끝부분에는 독특한 분비물인 실을 뽑아내는 방적돌기(보통 거미에서의 경우 실젖)를 갖는다. 거의 모든 거미가 가지고 있는 실젖은 보통 3쌍이다. 각 방적돌기 말단에는 수많은 방적관들이 열려 있으며 이 방적관들은 배 속 안에 있는 여러 가지 방적샘에 연결되어 있다. 방적샘의 분비물이 방적관을 통해 밖으로 분비되어 공기에 접촉하면 거미실이 되며, 거미실들이 제4다리 척절의 즐상기에 의해 묶여짐으로써' 거미줄'이 된다.
이러한 특징을 가진 거미는 보통 나뭇가지에 집을 짓지만 이 시에서 표현한 거미는 변형이 되어 “보송한 허물을 벗고 매일 밤 쏟아져 나오는 사람들 사이로 들어가 함께 걸으며 집을 짓는다.” 변형거미는 방적샘에서 실을 뽑아 ‘횡단보도를 건너’가면서 집을 짓기도 하고 ‘사람들의 목소리를 따라’ 걸으며 집을 짓기도 하고 ‘등 뒤로 따라오는 사람들의 목소리에 발을 맞추기도 하며 집을 짓는다.’ 이렇게 자신을 변형하여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서 집을 짓고 살아가려고 했는데 ‘문득 사람들이 한꺼번에 사라진다. 콩콩거리며 되돌아간 거리에도 사람은 없다.’ 비로소 자신이 사람이 아님을 깨닫고 본연의 거미로 돌아간다. 가로수에 ‘이 쪽 저 쪽 거미줄을 날리며 집을 짓는다.’ 거미가 줄을 쳐서 거미집을 짓는 이유는 먹이사냥이 아니면 종족번식을 위해서다. 하지만 이 변형거미는 다시 본연의 거미의 역할을 벗어나 자기가 친 거미줄에 자기가 걸려 퍼덕인다. 그리고 친친 자기의 몸을 얽는다. 자기가 친 거미줄이 목을 감아 희미한 기억도 사라지고 모든 것이 사라진다. 변형거미의 마지막 모습은 한꺼번에 사라진 사람들의 마지막 모습일지도 모른다.
간호원의 코맹맹이 목소리가 간지럽습니다. 앞 선 얼굴이 뒤 선 얼굴을 기억하기도 합니다. 환자들은 병원문이 열리기 전에 길게 늘어서서 번호표를 기다립니다. 병원문이 열리면 사람들은 온데간데없습니다. 고요합니다. 간호원은 손톱 정리에 열심이고, 병원장은 티브이 속 개그맨의 장난에 킬킬거립니다. 병원문이 활짝 열리면 짜장 시키셨죠, 철가방이 들어섭니다. 젓가락을 들고 몇 번 휘저어 비벼진 면발을 후루룩 삼킵니다. 문 밖으로 내어놓은 자장면 그릇에 마른 낙엽이 떨어집니다. 먼지 내려앉는 소리를 자장가 삼아 간호원은 이내 졸고 있습니다. 이따금 병원장의 이빨 가는 소리가 들립니다. 따르릉 전화가 옵니다. 안아파병원 입니당. 티켓팅은 아침에만 합니당. 티켓팅만 하면 아픔이 사라집니당.
-「아나파병원-자영업자.6」
인간은 일생을 사는 동안 누구나 생로병사의 과정을 겪도록 DNA가 설계되어있다. 누가 더 먼저이냐 나중이냐의 차이이지 모두 이런 과정을 거쳐 죽음에 이른다. 요즘은 암으로 사망하는 사람들이 참 많다. 노부모가 치매를 앓는 지인들도 많다. 「아나파병원-자영업자.6」 시를 보면서 정말로 이 병원에 가서 ‘티켓팅만 하면’ 마법처럼 암이 낫고, 치매가 낫고, 뇌졸중이 감쪽같이 낫는 아나파 병원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미소 지어본다. 만약 그렇다면 이 병원의 번호표를 타려고 몇 달이라도 줄을 서서 기다리려는 환자들이 전 세계에서 구름떼처럼 몰려올 것이다. 병원 의사도 자영업자 중의 하나다. 이 병원처럼 자영업자가 티비나 보고 자장면이나 시켜먹으면서, 이빨을 갈며 잠을 자도 가게가 문전성시를 이루면 얼마나 좋을까. 다분히 역설과 해학이 담긴 「아나파병원-자영업자.6」을 보며 박하리 시인의 시 ‘대박의 꿈’에서 똥꿈을 꾸고 뛰어가 줄서서 로또를 사는 장면이 생각난다. 이 병원에서의 티켓팅이 지상낙원에서 건강하게 살아가는 마법 로또가 아닐까 상상해본다.
이차선 도로에서 내려 동네 어귀로 들어서면 차로 접근이 되지 않는 골목으로 들어선다. 가끔씩 오가는 사람들의 발자국소리에 컹컹 짖어대는 소리가 골목 안을 흔든다. 이리저리로 통하는 골목길 이정표는 없고 바람이 길을 안내한다. 대문앞 돌 틈 사이로 바람에 날려온 풀씨가 꽃을 피우고 돗자리 붉은 고추가 바람에 마른다. 화분에는 파꽃이 피고 한겨울 채워줄 배추 모종이 파릇하다. 골목마다 시끌하던 기억이다.
서로 같기도 하고 서로 다르기도 한 야릇한 모양의 집들이 건물들이 누르고 겹치고 밀어내기도 하면서 골목은 사라지고 대로 일색이다. 대문을 들어서도 다른 대문이 나오고 그 대문으로 들어서면 또 다른 대문이 나온다. 안으로 들어서면 서로 같은 창들과 같은 벽들이 만나고 서로 다른 사람들이 들어가 서로 같은 방에서 일어나고 서로 같은 대문으로 나와 같은 대로로 사라진다. 태양은 더 밝게 빛나고 밤이면 가로등 불빛도 이채롭다. 시끌하던 골목은 땅 속으로 묻혀 버렸다. 재개발된 오늘의 빛나는 모습이다.
-「골목을 추억하며」
「골목을 추억하며」는 차가 들어갈 수 없는 좁은 골목에 사는 어린 시절 화자의 모습이 떠오른다. 아마도 배가 고프고 가난했던 시절이었음을 짐작한다. 그러나 좁은 골목에는 작은 풀꽃이 피어있었고 ‘붉은 고추가’ 말라가고 작게나마 화분에 파와 배추모종을 심어 놓았다. 그리고 화자와 동네 개구쟁이들이 골목에서 저물도록 왁자지껄하게 뛰어 놀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재개발이 되어 ‘서로 같은 창들과 같은 벽들이 만나고 서로 다른 사람들이 들어가 서로 같은 방에서 일어나고 서로 같은 대문으로 나와 같은 대로로 사라진다.’ 시끌벅적하던 골목은 사라지고 이제는 길에서 떠들며 노는 아이조차 없다, 번듯한 건물과 잘 정비된 큰 길만 있을 뿐이다. 그 속에서 인간들은 다람쥐 쳇바퀴 도는 같은 삶을 살아가고 있다. 인간을 망각의 동물이라고 했던가. 가난하고 배고팠던 기억은 희미해지고 골목에 넘치던 활기와 콩 한쪽이라도 나누던 이웃 간의 정이 그립다. ‘태양은 더 밝게 빛나고 밤이면 가로등 불빛도 이채롭’지만 유년의 골목보다 박하리 시인은 뭔가 허전하고 허탈하다.
러시아의 위대한 국민시인 알렉산드르 세르게예비치 푸시킨의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라는 시 중에서 이런 구절이 떠오른다. ‘마음은 미래에 살고 현재는 언제나 슬픈 것, 모든 것은 순간에 지나가고, 지난 것은 다시 그리워지나니.’
말을 가둔다. 문을 잠그고 이중 삼중의 잠금장치를 걸어둔다. 그래도 새어 나간다. 연기를 피우고 새어 나간다. 말은 공기와 함께 섞여 나뒹굴다가 바람을 일으키기도 하며 태풍을 만들기도 한다. 태풍은 비를 만들고 겨울 내내 푸석하게 쌓여있던 덤불, 그리고 내다 버리려했던 말들을 섞어 강으로 흘려보낸다. 태풍이 지나간 후에도 덤불 속에는 스멀스멀 온갖 말들로 가득하다. 남은 말들이 섞이며 부풀어 오른 말들은 넘쳐 다시 바다로 흘러들어 간다. 온갖 말들이 뒤엉켜 촘촘한 그물을 만든다. 말이 말을 퍼올린다. 온갖 세상의 것들이 올라온다. 온갖 것들을 퍼올린다. 바닥이 훤히 들어나도록 부지런히 그물질을 하며 퍼올린다. 퍼올린다.
-「말이 말을 퍼올린다」
‘중매를 잘하면 술이 석잔, 잘못하면 뺨이 석대, 라는 속담이 있다. 중매도 결국은 중매쟁이의 말이
혼인 성사 여부에 큰 작용을 한다. 「말이 말을 퍼올린다」는 내용상, 말이 좋지 않게 사용되었을 경우 일어날 수 있는 폐해를 다루었다. ‘말은 공기와 함께 섞여 나뒹굴다가 바람을 일으키기도 하며 태풍을 만들기도’ 하고 ‘비를 만들고 겨울 내내 푸석하게 쌓여있던 덤불’ 그리고 ‘내다 버리려했던 말들을 섞어 강으로’ 흘러가고 ‘태풍이 지나간 후에도 덤불 속에는 스멀스멀 온갖 말들로 가득하다.’ 결국 말이 그물이 되어 ‘말이 말을 퍼올린다. 온갖 세상의 것들이 올라온다.’고 하였다. 세치 혀를 잘못 놀려 퍼 나른 말이 나중에는 부풀어 엉뚱한 말로 바뀌어 피해로 되돌아온 경우들이 많다. 마지막으로 부정적인 말에 대한 속담을 찾아보며 우리가 말을 퍼 올릴 때 상대방을 배려하고 생각해서 말을 해야 한다는 박하리 시인의 따뜻한 메세지를 마음에 되새겨 본다.
‘가루는 칠수록 고와지고 말은 할수록 거칠어진다.’ ‘길은 갈 탓, 말은 할 탓’ ‘남의 말 다 들으면 목에 칼 벗을 날 없다.’ ‘내 말은 남이 하고, 남 말은 내가 한다.’ ‘말 많은 집은 장의 맛도 쓰다.’ ‘말은 보태고 떡은 뗀다.’ ‘말이란 아 해 다르고 어 해 다르다.’ ‘말이 많으면 쓸 말이 적다.’ ‘말이 말을 만든다.’ ‘살은 쏘고 주워도 말은 하고 못 줍는다.’ ‘웃느라 한 말에 초상난다.’ ‘혀 아래 도끼 들었다.’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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