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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특선/권순/분순할매 외 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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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순
분순할매 외 4편
침대 아래 휴지조각이 수북하다
몰래 숨겨두었던 두루마리 휴지를
쪽쪽이 잘게도 찢어놓았다
아무리 주머니를 뒤지고 빼앗아도
어느새 숨겨 두었다가 찢고 또 찢는다
밤새 그렇게 휴지를 찢으며
혼자 중얼 중얼 뱉어놓은 말들이
바닥에 흩어져 있다
젊어서 점쟁이였다는 할매는
목이 말라도 빌고
오줌이 마려워도 빈다
두 손 모아 절절히 빌어댄다
손을 비비며 빌다 다 지워졌는지
손금에 새겨진 지난 내력들을 말갛게 잊었다
가끔 흐린 기억들이 다녀가곤 하지만
이제 당신 이름도 모르는 눈치다
그녀가 흐릿한 기억을 더듬어 점괘를 꺼낸다
(신랑이 돈은 잘 버는데 지가 다 써버리니 집이가 고생 허겄어)
묽어지는 기억들을 어디라도 새기려는 듯 끝없이 중얼거린다
창을 넘던 분홍 노을이 할매의 주름진 목 밑에서
넘어갈 듯 넘어갈 듯 가릉거린다
그녀, 휴지 두 쪽을 또 숨긴다
당신, 거기
아직도 있는지요, 봉긋한 잠적 앞에
당신이 살아보지 못한 오십을 다 넘긴
거죽들이 왔어요
건너편 산그늘이 깊어지고
무덤 옆 오동이 수십 년 잎을 털어내는 동안
삼베 끈으로 질끈 묶인 몸 육탈은 되었는지요
가늠할 길 없는 어둠 속에서
뼈를 휘감으며 쳐들어오는 나무뿌리들을
어찌 견디고 있는지요
자작자작 속으로 스며드는 물기에 축축해진 몸
젖고 또 젖는지요
온갖 벌레들 달라붙어
마지막 남은 체액까지 빨아내도
거기 누워 자고 또 자는지요
육신은 다 거기 두고 꿈처럼 깨어나서
그 옛날 사랑방에 헛기침으로 머무는지요
양지바른 저 비탈에 옮겨 앉아
싯퍼런 잣나무 둥치에 몸 대고
더운 몸을 식히고 있는지요
床石에 나와 앉은 송장메뚜기처럼
여기 남은 쓸쓸한 것들을 바라보고 있는지요
아버지, 풀 좀 내릴께요
사과 반쪽, 반쪽사과
사과 반쪽이 마르고 있다 막 늙어 버린 여자의 입가처럼 쪼글하다 붉은 기운을 잃고 있다 수분이 빠져나간 껍질과 과육 사이에 밀고 당긴 흔적이 있다 아직 사과임을 잊지 않은 듯 씨방만 제 모양을 지니고 있다
팽나무 항구에 연일 시신이 올라온다 누군가 진정한 사과를 하지 않는다고 야단이다 사과의 힘으로 주저앉은 이들을 일으킬 수 있는가오늘도 사과는 없다 다만 누구의 사과가 진정한 것인지 서로를 긁고 있다 사과는 타이밍이 중요하다고
사과는 눈물 뒤에 오는가 반쪽 사과는 받아들일 수 없다며 여자가 울고 있다 입가 주름이 파르르 떨린다 울음 끝에 걸터앉은 그녀, 먹다 둔 사과처럼 누렇다
반쪽의 사과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 살집이 물렁하다 누런 낯빛이 어딘가로 건너가고 있다 열어 둔 속심으로 오고 가는 바람과 공기를 받아주며 제 몸 헐어 낼 곰팡이를 맞으며 사과에게는 사과의 길이 있는 것처럼 시침 뚝 떼고 앉아 있다
소리를 보다
대파가 냉해를 입어 파 값이 요동칠 때
누가 구석에 두고 뽑아 먹으라며
파 화분을 가져다주었다
너 댓 뿌리 되는 파 분이
행운목 옆에 자리를 잡았다
잠도 오지 않고 심심한 저녁
내내 연속극을 보다가
홈쇼핑을 보다가
책을 펼쳐 들었다
곰실곰실 벌레가 기는 것만 같고
활자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얼룩진 거실 유리문을 바라보다
척 척 자리를 옮겨가는 시계 초침 소리를 따라가다
잊고 지내던 파 화분에 눈이 갔다
언저리에 얇게 앉은 먼지를 닦으려다 귀찮기도 하고
강박증 환자 같기도 해서
시선을 거두려는 그때 어디선가
툭, 투 둑 소리가 났다
화분에 꽂힌 대파 밑둥에서 한 뼘 쯤 위에
대궁들이 조금씩 비껴서며
서로에게 틈을 내준 그곳에서
투 둑 투 둑 소리에 맞춰
마른 껍질을 살짝 떨면서도
중심을 움켜쥐고 버티는
어떤 흔들림을 보았다
누군가 다녀가다
한낮에 멀뚱하게 누웠는데
누군가 현관문을 슬쩍 밀고 간다
누군가 베란다 창문에서 안을 기웃거린다
이번엔 주방 창문에서 고개를 빼고
안을 넘겨다본다
눈동자를 돌리는 사이에
그림자 하나 재빨리 지나간다
창밖에 대추나무 흔들린다
키 큰 목련이 흔들린다
내가 없을 때에도
저렇게 슬쩍 다녀갔을
힐끔 거렸을
시작메모
누군가 드러난 상처를 안고 울고 있지 않은지
누구에게나 묻어두고 싶은 이야기가 있을 것이다. 나 역시 그냥 묻고 싶은 부끄러운 이야기와 아픈 이야기가 있다. 하지만 자고나면 누군가의 묻어두었던 이야기들이 귀신처럼 떠돌아다닌다. 활자가 되어 떠돌거나 소리가 되어 요란하게 떠도는 이야기 중에는 누군가의 진한 한숨과 피 얼룩이 묻어 있기도 하다. 번져나간 이야기는 상처가 덧나는 게 두려워 묻어두기를 원하는 사람들의 아픔을 외면한 채 한없이 뻗어 간다. 그렇듯 누구에게나 들추고 싶지 않은 지난 이야기들이 있게 마련인데, 작은 기미만 보이면 들춰서 뿌려지고 확대된다. 그것이 이야기의 속성이기도 하다. 하지만 누군가의 아픈 속사정이 마구 떠돌아다니다 불행의 늪이 되기도 한다. 서로 들추고 까발려야 직성이 풀리는 세상이다. 자신의 이야기를 그냥 묻어두고 싶은 작은 욕망이 번번하게 좌절되는 시대이다. 타인의 아픈 이야기에 중독된 사람들이 자고나면 아니 잠든 사이에도 들추고 쑤셔댄다. 겨울은 만물을 묻어두는 시간이다. 겨울잠을 자듯, 김장독을 묻듯 서로의 상처를 묻어주고 분노를 삭히는 시간이다. 팽나무 항구에서 시작해 유난히 아픔이 많았던 순간들을 거슬러 여기까지 왔다. 이제 상처를 들춰내기보다는 아물지 않은 상처에 따스한 입김을 불어넣으며 서로 보듬는 시간이 필요해 보인다. 누군가 드러난 상처를 안고 울고 있지 않은지 조금은 더 따뜻한 눈빛으로 돌아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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