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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특선/김설희/팬플루트 외 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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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2
댓글 0건 조회 1,779회 작성일 15-07-08 14:34

본문

김설희

팬플루트 외 4

 

 

나무들이다

뿌리 없는 마른 나무

 

그의 입술이 닿자

어느 쓸쓸한 오후의 바람소리가 난다

 

저 죽은 것의 심장에

무엇이 건너간 것일까

 

톱날에 잘려지던 때

내지르지 못한 단말마의 숨이 저리 순하게 삭은 것인가

 

어디 깊은 데서 솟아오르는 샘물소리 같다

횡격막을 가로지르는 소리

 

고공 타워크레인에서 아슬아슬 흔들리던 비정규직같이

아득한 터널을 헤쳐 나오는 소리

 

잘려진 것들은 소리가 된다

목청껏 부르는 노래가 된다

 

 

 

 

갈증

 

 

세상은 링거 줄에 매달린 그녀의 맨살처럼 차고 하얗다

창밖이 병실에 흰밥그릇보다 더 환하다

환한 쪽이 열 수 없는 창으로 보인다

창틀에 가려진 곳이 군데군데 보이지 않는다

좁은 창턱에 창백한 발을 올려놓고 그녀가 일어선다

 

링거 줄과 바닥이 좀 더 멀어진다

살아 움직이는 눈송이들의 발

눈송이 하나를 촘촘히 따라가다 길을 놓친다

 

한 장 남은 잎이 눈을 짊어지고 간신히 붙어있다

부러질 듯 휘어진 가지들이 공손히 받아든 저 차가움

그녀, 언제 떨어질지 모르는 것들에게 숫자를 매겨본다

내려앉은 것들의 적요를 본다

 

창에 머리를 박고 아득히 그녀가 보려는 것은 무엇인가

불 주사의 흔적 같은 것들이 가라앉는다

 

저 내려앉는 눈처럼 가볍고 불안한 음성(吟聲)

투명한 창에 오소소 매달린다

 

 

 

 

티켓 한 장

 

 

얇은 표 한 장이 납작 있었다

가방 속에 있었다

버리고 싶지 않은 기억 같은 것이었다

비행기의 이름과 좌석번호와 출발 시간이 적혀있는

 

우리는 그 별에 가기 위해 한 동안 수전노처럼 돈을 모았고

설레며 꿈꾸었고

가방 챙기며 달력에 동그라미를 쳐갔고

예술가가 상상으로 작품을 만들 듯 우리는 생각을 키웠다

우선 비잔틴문화와 퀼트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대리석을 논할 때 누군가 응애암의 산은 숲이 되지 못한다고 말했다

그는 돌이 묻힌 산을 돌산이라 불렀고 그것은 돈 산이라고도 불린다고 했다

성바오로 사원의 우람한 기둥을 말했고

기둥의 키만큼 낮아지는 하늘과

기둥 둘레만큼 메워지는 허공에 대해서도 말했다

비행기보다 느리게 나는 풍선을 타고 사진 찍는 모습을 상상하며 미리 손을 흔들었다

 

누가 비행을 파일럿의 손에 규정지어진다고 했는가

우리의 생각은 그저 부는 바람에 떠밀리며 날아다녔다

 

웃음과 범람하는 에너지와 엔도르핀이

거기 흰 종이에 깨알처럼 들어차 납작 엎드려 있다

 

 

 

 

임시로 맛있는 집

    

 

청구아파트 앞 맛있는 집

쌈밥 된장찌개 내장탕 비지찌개 비빔밥....

맛있는 음식을 배달도 한다

신축공사로 그 집이 뜯겨버렸다

길 앞 다른 건물에 간판 대신 현수막이 걸려있다

 

임시로 맛있는 집

 

지나가는 사람마다 한 소리씩 한다

임시로 맛있으면 언제쯤 제대로 맛있는 집이란 말인가

맛있는 집으로 완성되면 임시는 무엇으로 변할까

 

그 집에는 무엇이 있는지 때가 되면 사람들이 떼로 몰린다

 

임시로 맛있는 집 임시로 들락거리는 사람들

임시로 반가운 악수 임시로 벗어놓은 신발들이 임시로 북적인다

임시로 살고 있는 지구에

인간들이 풀들이 해가 달이 짐승들이 꽃이 바람이

임시로 맛있는 집안처럼 임시로 거처하는 지금

우주의 손바닥 위를 임시로 걸어가는 발자국 소리가

금속 저금통 안에 동전처럼 소란스럽다

 

임시로 맛있는 집이 진짜로 맛있는 집이 돼도

영원히 임시가 아닌 발밑이 흙이 그 속에 소란함이 진짜가 되어도

 

 

 

 

목련 가시나

 

 

작년 가을, 집나간 그 가시나

집에도 못 들어가고

마당구석에 우두커니 서 있던 가시나

비썩 마른 몸에 겨우내 각질만 쌓이더니

지나가는 눈비에 발목 젖고 무릎 젖고

어느 날부터 시름시름 앓더니

겨우내 독이 올라 살갗이 다 헐도록 추위와 맞서더니

눈 녹고 꽃샘바람 한 줄기 맵차게 다녀간 뒤

슬슬 담 넘어 온 손이 그 가시나 쓰다듬더니

문득 맨발에 종아리 정강이

온몸에 물오르더니

머리카락이 부풀고 손톱이 부풀고

젖가슴이 부풀고

온 몸이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더니

천지 사방이 툭툭 터지더니

그만

지나가는 새들이 그 가시나 사타구니를 드나들며 노래를 부르지 않나

그 밑을 오가는 온갖 것들이

뽀얗게 미친 그 가시나에 넋을 잃는 거라

참 환장할 봄날이었지

 

 

 

 

시작메모

가장 가벼운 임시

 

 

대학병원 수술실 앞이다

전광판에는 수술실로 들어간 사람과 회복실에 있는 사람과 안정실에 있는 사람의 이름이 즐비하게 적혀있다.

수술시작 시각과 마친 시각과 회복실에 옮겨진 시간도 친절히 적혀 있다

 

대기한 보호자들은 수술시간과 옮겨진 장소를 확인하며 손가락을 만지작거리거나 멍하니 먼데를 보거나 마른침을 삼킨다

누렇게 뜬 얼굴로 바싹 타들어간 입술로

 

무엇을 기다리는가

무엇을 희망하는가

지금 건지려는 목숨인가

지나가버린 함께 한 밥상을 생각하는가

눈길을 더듬어 오르던 산에서

옹이같이 얼어붙었던 얼음에 미끄러지던 때를 기억하는가

아니면 뚜렷한 목적도 없이 그냥 무조건 달리던 때를 후회하는가

옆도 뒤도 안보고 앞만 보고 달리던 길이

아무것도 아닌 것을 향해 진행되었다는 것을 깨닫는가

그때 몽우리 진 봄을 보긴 했었던가

지금 어느 계절까지 와 있는가

아직도 더 가야할 길이 있는가

만약 있다면 꼭 더 가야되는 길인가

허우적거리면서 거기 가서 뭘 어쩌겠단 말인가

 

보호자를 찾는 간호사의 호명에

놀란 사슴처럼 귀를 쫑긋 세우고 벌떡 일어나는 저 사람

잔잔한 물속에 파문이 일 듯 고요 한 묶음을 일으켜 세운다

고요 속에서, 찾아 헤맸던 오래전의 낡은 길들을 순식간에 놓치고 만다

어차피 그 길들은 어떤 짐승의 울음처럼 사라져버렸던 길이었다

굳이 찾으려 해도 없는 길이었기에 찾을 수 없는 길이다

임시의 길이었기 때문이다

지금이 가장 싱싱한 현재이지만 이것도 임시이다

임시인 우리도 임시인 여기에 임시로 거주한다

임시를 살아가면서 수세기 살 것처럼 악다구니를 쓴다

이 쇠뭉치 같은 악다구니도 철저한 임시이다

임시에서 임시에 그칠 것들이

풀로 꽃으로 의사로 환자로 보호자로 또 간호사로 명명되고 있다

간호사의 비닐 모자보다 더 가벼운 것들

영원히 임시인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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