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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시/정정례/유리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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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정례
유리 외 1편
고층빌딩 유리벽에 붙어 벽을 닦는 사람
햇빛을 등지고 외줄에 매달려 손을 휘저으며
자신의 그림자를 닦아내고 있다
발과 발을 유리벽에 대고 그림자와
사람이 서로를 밀어내고 있다
유리판을 가운데 두고 바둥대고 있다
마치 자기 자신과 마주보며 싸우는 것 같다
저 아슬아슬한 높이에서
자신이 잘 보이자 하는 일은 아닐 것이다
저 고층 안에서 보이는 풍경은 구름과 허공일 뿐
안에서만 볼 수 있는 풍경 누군가를 위해
외줄에 목숨을 걸어두고 자신의 얼굴을 닦는 일
두렵게 내 자신의 그림자를 닦는 일
자신의 밖을 닦는 일
땟자국을 씻어내는 일
내 얼굴이 이렇게 높은 창문에 숨어있었다니
나를 찾는 일이란 것이 목숨을 담보로 하는 일
아침부터 시작된 청소가 햇살 가득한 오후까지 계속 된다
문득 유리창에 숨어있던 그림자가
나타났다 사라지고 나타났다 사라지고
마치 달고 다니는 부적처럼
생활은 고층 빌딩보다 높고 현실은 저 아래 땅보다 낮다
또 한 생이 사형대에 올랐다
탕탕!
도마질 소리와 함께 날카로운 칼이 내리칠 때 마다
몸을 뒤틀며 몸부림친다.
긴 다리가 잘려 나갈 때 마다 소리 없는 비명이 뒤엉킨다.
본능이 피할 곳을 찾는다.
그러나 고통은 잘린 후가 더 강하다
빨판이 도마를 붙들고 놓지 않는다.
저 힘으로 한생 뻘밭을 뒤졌을 것이다
바다 속을 누비며 먹잇감을 낚아챘을 것이다
그러다가 위험을 느끼면 먹물 뿜어대며
잽싸게 구멍을 찾아 몸을 숨겼을 것이다
물살의 힘을 거슬러
새끼들을 몰고 무지개 동산을 넘나들기도 했을 것이다
그 힘으로 어디든 도망가리라고
안간힘을 다 쏟아
빨판을 벌려 허공을 붙든다.
허공 어디 그곳을 찾았는지
동작은 느려지고
그 틈을 타 잽싸게 다져진 살점들이
흰 접시에 담겨진다.
둥그렇고 미끈한 머리통 하나가 조각난 제 몸을 깔고 누워
멀어져 가는 파도소리에 묻힌다.
정정례 - 2010년 월간 《유심》으로 등단. 시집 『시간이 머무른 곳』, 『숲』,『덤불설계도』. 천강문학상 수상. 제3회 한올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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