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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시/박병두/지동에서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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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병두
지동에서 외 1편
내가 머물렀던 곳들은 하나같이
빗물에 젖은 시멘트 푸대 같은 표정을 하고 있다
잔뜩 분 바른 나이 든 여자가
질질 울고 난 뒤의 얼굴을 하고 있다
여기 머무르던 빛과 뜨거움은
몇 사람의 가슴에 두레박 없는 우물만 남기고
부활을 기다리는 고집장이에게
돌아오지 않아, 라고 말하고 싶어서
소주집을 찾아 가는 중인데
노란 머리 삐끼들이 자꾸 앞을 막는다.
정신병원에서
친구들의 가난이 네 불안의
핵심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일평생 땅과 건물을 사고 파는 일에
몰두한 네 아버지가 소유한
빌딩과 가옥 수십 채
그건 단지 묘기였을 뿐
네 잘못은 아니었지만
통기타를 튕기고
시를 쓰던 네가
친구 조심하라 이르는 아버지 밑으로
들어간 것은 분명
불안과 공포의 시작이었다
세무사와 은행원을 열심히 사귀며
돈세탁 요령과
상속세 덜 내는 방법을
연구중이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시쓰기를 포기하고
수술실에 아내를 두고 찾아온
친구의 주먹을 부르르 떨게 한 것도
네 잘못은 아니었지만
소설을 쓰려고
우리들 중 하나가 골방에 박힐 때
네 이야기가 그 글 속에 들어갈까봐
시작된 두통과 불면 만큼은
네가 선택한 일이 분명해 보인다
네 어머니 빈소에 친구들
오지 않고 사촌과
동창생 하나 없었다는 소문도 들었다
역시 네 잘못은 아니었다
하지만
젊은 날 읽은 시집을
버리지 않고
밤마다 그놈의
통기타를 집어 든 것은
네 잘못이었다
버려다오
장식도 되지 못하는 시집들을
통기타의 목쉰 소리를 버려다오
네게는 영혼을 풀무질하는
소품이 어울리지 않아야 한다
나는 네가 쾌유하길 진정으로 바란다
네가 아니더라도
골프장 회원권과
토지와 건물은 쉴 사이 없이
거래될 것이다
네가 아니더라도
사람들은 시를 읽을 것이며
무명 가수의 노래를 들을 것이다
가난한 친구를 두려워하는 네가
초라한 나를 만나면 병이 또 도져
몸부림을 칠까봐 울부짖을까봐
면회 신청도 하지 못한 채
줄담배 연기 속에서
떨어지는 플라타너스 잎만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
박병두- 1964년 전남 해남에서 출생, 1985년 T.V방송 드라마 데뷔 후, 1992년 《월간문학》.《현대시학》.《열린시학》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해남 가는 길』,『그림자밟기』등, 고산문학상, 이육사문학상, 전태일문학상, 에거사 크리스티상 등을 수상했으며,『수원영화협회』회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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