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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인상/서춘자/백자무문달항아리 · 3 외 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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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춘자
백자무문달항아리 · 3 외 4편
너의 토굴
천삼백 도 불가마
한 세월 들어앉아 좌선삼매
다비 끝나니
한 알 사리
한 점 티끌 없는
빈 몸
그 몸에 삼천대천
드나드나니
지나던 달 품어
겨울날
나 없는 빈 창에
그대 쓰고 간 내 이름
몇 점 성에들이 안고 있었네
창문 앞에서 되돌아간
그대 발자국
눈 위에 압화로 찍혀 있었네
그 압화 위에 새로 내리는
깃털눈
오래 서서 바라보네
대중가요
공중에서 내려오는 비단을
둘로 가른다는 검*
그 검에 베입니다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비단수건을 가를 뿐만 아니라
돌덩이에도 부러지지 않는다는 검*
그 낭창한 날에 스치입니다
새파란 풀잎이 물에 떠서 흘러가더라
저 흔해 빠진 밤하늘의 별에도 눈 베입니다
같이 보고 같이 세던 실없던 손가락 끝
길도 없이 까마득한 허공 너머로
열아홉 시절이 울컥 해금 가락 타고 와
명치를 찌르면
난자당한 가슴 급소마다 치명상인데
진통제는 그래도 봄꽃뿐
꽃마다 찾아가 베인 자리 문질러
꽃피 지혈할 뿐
치료제는 그래도 봄볕뿐
볕마다 찾아가 베인 자리 쪼이며
지나가는 봄날 지나가게 할 뿐
*다마스쿠스검은 동시대는 물론 역사상의 어떤 유럽의 강철검보다 뛰어난 검이었다고 한다. 비단수건을 칼 위에 떨어뜨리면 저절로 베어질 만큼 예리할 뿐만 아니라, 탄력성이 커서 바위를 내리쳐도 구부러지거나 부러지지 않았다고 한다.
탈의(脫衣)
하늘이 왜 파란가 물어도 대답 없소
해는 왜 그렇게 타는가 물어도 대답 안 하오
삶은 이유 없이 시작되어 이유 모르게 흘러가는 터
다만 탈 뿐이오
재가 되면 비로소 벗어날 수 있을 터
재가 되어야 비로소 벗어날 수 있을 터
세상의 모든 불꽃들에게 경의를
세상의 모든 불쏘시개들에게 경의를
작은북 큰북 동원하여 제를 올린다
기타 시켜 염불 올린다
그립다는 말 태워 분향한다
잘 타고 남은 재
그 가벼움
세상의 모든 재들에게 경의를
계획
그것도 괜찮겠다
봄볕 몇 섬 쏟아져 내리고 새소리는 웃기로 얹힐 것이다
앞 논두렁 고부라질 때쯤 삼복(三伏)이 오겠지만
다북쑥 아래 서늘한 땅기운이나 즐기면 될 일이다
누가 묻혔거나 말거나 가을이 오고
갈잎 구른다고 덩달아 뗏장도 무너지겠지만
백설이 소복이 기워주는 날도 있을 것이다
백설에 싸여 봉긋한 나
쏟아지는 달빛 봉긋이 불러 앉혀
지나가는 북풍 시켜 퉁소 한 가락 불게 하면
공산야월 만목소연(滿目蕭然) 왕릉 못지않을 것이다
그러저러 겨울 지나 또 봄이 오겠지만
녹음방초 낙목한천 제 아무리 왔다 가도
누구를 사랑했는지 누구를 미워했는지* 도대체 모르겠다고
누구의 애비였는지 누구의 에미였는지 도대체 모르겠다고
어느 가객이 노래를 불러줄지도 모른다
뒷산의 이름 없는 무덤
그것도 괜찮겠다
*서홍관의 시 <무덤> 일부.
당선소감
세세생생의 인연에 감사드린다.
어느 날 흰 머리칼을 본다. 그것도 햇빛 좋은 날 질 좋은 거울 앞에서 돋보기를 써야만 잘 보인다는 것을 알게 된다. 초점 없는 눈을 하고 거리를 쏘다녀 본다. 관상쟁이 앞에도 앉아 본다. 믿지도 않지만 믿지 않을 이유도 없는 까닭에, 그의 말대로 몇 편의 시를 끄적여보기 시작한다. 학창 시절의 교내백일장과 국어선생님에 대한 기억이 오래 묵어 있던 글쓰기에의 동경을 부추긴다. 시(詩)를 만드는 작업이 그리 소소하지 않은 열락(悅樂)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때를 같이 하여 <왕오천축국전>을 만나게 된다. 손바닥만한 문고판 책 속에 다섯 개의 천축국이 펼쳐져 있고, 걸어서 걸어서 구도(求道)해 마지 않았던 한 인간이 있었으며, 1,300년을 거슬러 오르는 그 조우(遭遇)로 하여 실크로드 답사는 삶의 또 하나의 축이 된다. 삶의 무게 벗어나 아득한 능선첩첩 너머 무등(無等)의 엑스터시 혹시 있을까, 입축승(入竺僧) 뒤를 10여 년간 추적하게 된다.
티베트의 카일라쉬까지 찾아가 고산증에 시달려보기도 한다. 해와 달이 보이게 되고 길과 사람이 보이게 된다. 신라에도 있는 해와 달을 왜 수미산까지 가서야 보게 된단 말인가. 사람들은 언어를 사용하면서도 왜 시(詩)라는 것을 또 짓는단 말인가. 왜 오늘 밥을 먹으면서 내일 또 먹어야 되는 가. 삶의 비의(秘意)는 끝이 없다.
내가 쌓는 언어의 레고(lego)를 시(詩)라고 불러도 되는지 <아라문학>에 여쭈고 싶었고, 그렇다고 대답해 주신다면 몇 송이 들꽃 같은 시 쓰고 싶다. 눈에 띌 것 없이 괜히 피었다 지지만, 세상사 하 쓸쓸하여 길섶에 숨어 피는 하찮은 들꽃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사람, 그런 사람의 가슴에 한 방울 붉은 점이 되는 시 말이다. 때로는 삭막한 벌판을 뒤덮어 온통 꽃판으로 만들 수도 있는 들꽃, 그리하여 나에게는 사무사(思無邪)에 근접하게 하는 그런 꽃 말이다.
이런 소감문을 쓰게 해주신 <아라문학>, 이런 소감문을 쓰게 되기까지의 모든 인연, 세세생생의 인연에 깊이 감사드린다.
심사평
《아라문학》의 첫 신인
《아라문학》첫 신인을 내보낸다. 별로 흠 잡을 데가 없이 안정된 작품을 쓰는 시인이다. 《아라문학》과 함께 승승장구하길 기대한다.
다섯 편의 시에서 서춘자는 군더더기 하나 없이 자신의 불교적 우주관을 잘 드러내고 있다. 시인은 ‘백자무문달항아리3’에서 흙으로 빚은 토기 굽는 과정을 입적한 선승의 다비식에 비유를 한다. 항아리에 인격을 부여한 것이다. 이 시의 매력은 거기서 맨숭맨숭 끝나지 않고 또 다시 그 다비의 과정을 마치 그 고승이 천삼백 도 불가마 찜질방에 들어 앉아 좌선삼매경에 빠졌던 것으로 대담하게 묘사를 했다는 점이다. 도자기를 굽는데 요즘은 프로그램에 따라 온도가 자동 컨트롤되는 전기나 가스 가마도 많이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옛날에는 대부분 구들 고래 형태의 불가마가 사용되었는데 시인은 그것을 토굴이라고 잘라 말했다.
‘다비’를 끝내고 ‘한 알 사리/한 점 티끌 없는/ 빈몸’이 됨으로써 즉, 자신을 온전히 비움으로써 ‘그 몸에 삼천대천’ 말하자면, 소천, 중천, 대천의 천세계와 광대무변의 온 우주가 드나들도록 허용하다가 마침 ‘지나던 달을 품’은 모양새를 ‘백자무문달항아리’라고 절묘하게 명명했다.
시인은 ‘겨울날’에서 인연이라는 화두를 꺼내들었다. 첫 번째 연에서 시인은 ‘나 없는 빈 창에/그대 쓰고 간 내 이름/몇 점 성에들이 안고 있었네’라고 함으로써 ‘그대’와의 근접한(probable) 인연을 암시한다. 여기서 ‘창’은 소통일 수도 있고 인연일 수도 있다. 그러나 제2연에서 마침 내가 부재함으로써 기회의 창이 열려있지 않았을 때 찾아와 ‘눈 위에 압화로 찍혀 있’는 ‘되돌아간/그대 발자국’을 통해 엇갈린 운명임을 드러내다가 세 번째 연에서 ‘그 압화 위에 새로 내리는/깃털눈/오래 서서 바라보네’라고 노래하며 맺어지지 않은 인연의 덧없음을 음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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