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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세계/김용대/외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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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2
댓글 0건 조회 2,010회 작성일 15-07-07 1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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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대

외사랑

 

 

꽃 한 송이를 앞에 놓고 행복에 겨워있다.

만면에 웃음을 가득 담고 숨을 깊이 들이마시며 연신 눈길을 한 곳에 맞춘다. 그윽한, 지극히 감미로운, 그러면서도 은은한 향기로움이 주위에 번진다. 바람을 타고 온 향기가 있는 듯 없는 듯 그리도 고와서 음미하고 또 음미하고 싶어 내어 쉰 숨을 바삐 거둬들인다. 향기가 온 몸에 배어든다. 내 아직 이리도 전신을 파고드는 향내를 이것 말고 그 어디에선들 접해 본 일이 있었던가.

신라 선덕 여왕이 공주시절에 당나라에서 보낸 모란 그림을 보고 벌과 나비가 없으므로 꽃은 고운데 향기가 없겠다고 하였다는 데 잘못 전해진 말인지 아니면 요염함 향기가 없다는 말인지 의아스럽다.

자주 빛 잎에 극히 약한 검은 색이 가미된, 우아한 품위를 갖춘 꽃잎이 한 잎 한 잎 열리더니 이십 분이 지나지 않아서 노오란 꽃술이 수줍음을 안고 세상을 엿 본다. 피어나는 모습이 보이는 듯하다.

꽃이 지고 말아 삼백예순날 한양 섭섭해 울었다던 시인의 그것과는 반대로 나는 지금 모란에 함빡 취해 행복에 젖어 있다.

근래의 봄은 기별도 없이 왔다가 이슬처럼 사라진다. 올해도 여유를 만들지 못하는 자신의 무능은 숨겨놓고 바쁘다는 핑계를 대어 봄맞이도 못하다가 어느 날 문득 출입문에 들어서며 정원에 봉긋이 솟은 모란을 보고서야 봄이 기울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꽃이 피었는지조차 눈여겨보지 않고 지나치는 동료들이 야속하여 출근길에 잎사귀 속에 파묻혀 수줍음을 타고 있는 송이 하나를 꺾어 물 컵에 담아 책상 위에 놓았다.

여느 꽃은 봉오리가 생기면서부터 필 때까지 기간이 길어 꽃을 기다리는 성급한 사람의 애간장을 녹여낸다. 그러나 모란은 잎이 나오는가 싶으면 어느새 봉오리가 맺히고 금방 꽃이 피어 한눈팔았다가는 꽃의 흔적도 못 본 체 또 한 해를 참아내야 한다.

모란은 화려한 자태이면서도 애써 나타내려하지 않고 향기가 비길 바 없이 고우면서도 겸손하다. 새벽에 마알간 이슬로 몸단장을 하였다가 해가 동산에 오르면 애써 수줍음을 감추며 한 장씩 꽃잎을 연다. 천성 탓으로 뽐내지 못하고 넓적한 이파리 아래나 가지 사이에 숨어 볼을 붉힌다.

모란꽃을 보고 있노라면 붉은 한복을 차려입은 처자가 긴소매를 너울거리며 춤을 추는 듯하다. 사모하는 연인을 가슴으로만 태우며 서려있는 애절함을 해금 소리에 맞춰 하늘에 실려 보내는 처연한 모습이다. 임이 보고픈 마음에 애간장을 녹이다가 핏빛이 된 꽃잎, 차마 이겨내지 못한 그리움이 황금빛 꽃가루로 변신하여 나비에게 소식이라도 들으려는가. 하늘도 그 뜻을 알았음일까? 정원의 모란꽃에 흰나비가 사뿐히 내려앉는다. 모란은 아낌없이 속살을 드러내 놓는다. 짙은 자줏빛 꽃잎에 묻혀서 행복을 맛보는 흰나비. 그들만의 밀어를 훔쳐 듣고 싶다. 아니 그들의 정겨운 모습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만족하다.

지금쯤 영랑의 생가에는 모란이 가득하여 그분의 시를 사랑하는 발길이 분주하리라. 모란에서 어찌 영랑을 떼어놓고 말 할 수 있으리오. 그분은 오월 어느 날 마루에 앉아 모란이 뚝뚝 떨어져 내리는 것을 보고 서러움에 잠겼다고 했다.

청소년 때 교과서에 실린 시에 심취하여 외워서 중얼거리고는 하였는데 직접 생가에서 때 맞춰 핀 모란을 보는 순간, 가슴이 환하게 열리어 감개무량하였다. 대문 오른쪽 담 옆에 모란 정원이 정갈하게 가꾸어져 있어서 들어서는 사람마다 들여다보며 자리를 뜰 줄 몰랐다. 나는 생가를 돌아보는 것보다는 모란 정원 가장자리에 아예 자리를 하고 오랜 시간을 보냈다. 그 옛날 청년 시인이 이곳에서 모란꽃을 바라보며 우리 땅에 핀 곱디고운 꽃을 보고도 마음을 열고 반갑게 맞이하지 못하는 안타까움으로 하여 가슴을 태웠던 곳이 아니던가. 시인은 가신지 오래되었건만, 모란은 지금도 제 자리에 남아 싱싱하게 자라고 있기에 인생의 무상함을 느껴야 했다.

모란은 너무 곱기에 오히려 서러운 기운이 감돈다. 오래도록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황홀 속에 빨려 들어가 차라리 헤어나지 말기를 바라는 착각에 빠진다. 이 꽃 한 송이 보내면 잔잔한 웃음 위에 새털 같은 구름이 서려있던 그 날의 호숫가 여인의 눈이 금방이라도 젖지나 않을지.

모란은 질 때도 시 구절처럼 뚝뚝 떨어진다. 피고 지는 것이 분명하고 절도가 있다. 모란에 취하여 지는 모습을 차마 보지 않으려는 애절한 마음을 알고 있어서인가, 아니면 부귀영화를 뜻하기에 쉬이 자취를 감추어서인가.

모란을 외사랑 하며 취해있다. 이성을 외사랑 하면 가슴에 피멍이 든다지만, 모란을 외사랑 하노라면 즐거움이 햇살처럼 쏟아지기에 참으로 행복하다.

나는 지금 모란을 무지무지 외사랑 하고 있는 중이다.

 

김용대 - 한국수필로 등단. 경기수필가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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