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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인천/김영덕/배다리 산책-배다리시장의 흥망성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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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2
댓글 0건 조회 2,856회 작성일 15-07-07 1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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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 인천

김영덕

배다리 산책

-배다리시장의 흥망성쇠

    

 

불 꺼진 곱창집 깨진 아크릴 간판이 바람에 흔들린다. 처마 낮은 점포들은 이미 녹슨 함석셔터를 굳게 내렸다. 초저녁 어스름 달빛 아래 시장골목은 마치 무덤 속처럼 조용하다. 경인선 전철이 덜컹거리며 지나간다. 기차는 홀로 밤의 정적을 깨우며 이 시장의 아우라를 환기시키고 자신이 몰고 왔던 옛 영화를 되살리려 안간힘을 쓰지만 속절없는 일이다. 저 한낮에도 인적 없었으니 캘리코 은광촌, 고스트 타운이 따로 없기 때문이다. 오늘 아침 유명 메이커 할인매장한 곳이 또 이삿짐을 쌌다. 건물 주인은 새로운 임차인을 구하기 위하여 몇 년을 또 기다려야 할지 모른다.

누가 뭐래도 인천을 상징하는 키워드는 아직 배다리다. 배다리는 시장이다. 시대의 변천과 기술의 발전, 유행의 변화에 따라 배다리시장 상품들의 얼굴은 바뀌어왔다. 그러나 시장이 매일 무수히 이루어지는 거래를 통하여 재화의 수요와 공급이 궁극적 균형을 찾아가는 비의적 장소라는 데는 변함이 없다. 시장은 진실의 순간들이 반딧불처럼 무수히 명멸하는 익명의 숲이며 자본주의의 꽃이다. 인천 짠물이라고 조롱해도 좋다. 그 말 속에 억척스럽게 삶을 개척했던 인천 사람들의 영혼과 시대정신이 용해되어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130년전 터진개(신포동) 바닷가에 옹기종기 모여 살던 인천 원주민들은 외세 열강에 삶의 터전을 모두 빼앗기고 상처 입고 쫓기는 짐승처럼 싸리재 넘어 척박한 땅, 이곳 배다리로 왔다. 그것은 엑소더스였다. 1883년 제물포항의 개항이 비극의 시작이었다. 일본과 중국, 유럽 의 초대받지 않은 손님들이 무단으로 들어와 임의로 조계(租界)까지 설치한 것이다. 제물포 개항장에서 가장 가까운 신포동은 일본지계, 선린동과 북성동은 중국지계, 그리고 지금의 자유공원 일대인 응봉산 정상 근처는 만국지계로 강제 수용되었다. 열강들은 희희낙락 그 땅을 전리품처럼 사이좋게 나누어 가졌다.

당시 조선왕조가 명맥을 유지하고는 있었으나 이름뿐이고, 정작 스스로 백성들을 위하여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수백년간 주상전하(主上殿下)라고 추앙되었던 무소불위의 권력자, 조선의 왕은 인천의 개항장에서 자신의 백성들이 맨몸으로 쫓겨나는 아비규환을 짐짓 못 본척했다. 열강의 위세가 호환마마보다도 무서웠기 때문이다. 주민들의 생존권이나 재산권은 개념조차 없었던 압제가 엄혹했던 시절이었다.

그것은 북미대륙에서 기병대를 앞세운 유럽 이민자들이 수천 년간 평화롭게 살아오던 아메리카 원주민들을 몰아내고 그 자리에 유럽풍 식민지를 세웠던, 문명의 탈을 쓴 야수의 방식과 전혀 다를 게 없었다. 이곳에서 맨몸으로 밀려난 인천 사람들이 정착한 곳이 바로 배다리와 인근 화수동, 화평동, 금곡동과 창영동이다. 그들은 그래도 언젠가는 옛 터전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버리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지독한 가난이었다. 쓸만한 어구도 없이 맨몸으로 고기잡이가 될 리 없었으며, 갯골 저지대의 척박한 땅에서 농사도 제대로 될 리 없었다. 인근 장의리(숭의동)나 숫골(도화동) 같은 문전옥답에는 이미 그 지역 토박이들이 대대로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어서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었다. 이웃 마을 품팔이로 간신히 연명해 나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들의 생존의지만은 누구보다 강했고 새로운 시대에 적응하여 자신들의 삶을 개척할 준비도 되어 있었다. 인천 짠물 정신이 태동한 것이다.

그리고 극적인 반전이 찾아온다. 고진감래라고 했지만, ‘이 보다 더 좋을 수는 없었다. 희망이라곤 없어 보였던 이곳 배다리에 천재일우의 좋은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1899년에 경인철도가 부설되면서 지금의 배다리 인근에 축현역이 생겼다. 인천의 변두리, 갯골의 쓸모없는 땅이 갑자기 노른자위로 변한 것이다. 일제강점기가 시작되던 그 당시 지도에서 경인철도 서쪽은 행정구역이 이미 미야마치나 혼마치, 유정이나 용강정 등 일본식으로 지명이 바뀐 반면, 조선인 거주지인 오른쪽은 화평리, 송림리, 금곡리 등으로 남아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일본의 식민통치자들에게는 제물포 개항장 인근 지금의 중구지역만 인천이었다. 외세 열강들의 조계가 설치되었던 중국의 상하이나 텐진 시내가 그렇듯 이곳도 경인선 철길을 경계로 조세, 치안 행정이 나뉜 사실상 서로 다른 국가였다. 요즘의 시각으로는 경인철로가 인천의 도심을 양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당시의 도시 설계자들은 철길을 인천이라는 도시의 주거지역 외곽으로 배치하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선택을 한 것이다.

과거 배다리는 사실 주운수로(舟運水路)였다. 1914년에 발행된 인천 지도를 보면 묘도(괭이부리) 앞에서 시작된 수문통 갯골이 화수동과 화평동을 거치면서 급격하게 휘어져 싸리재와 금곡동 경계까지 이어졌음을 알 수 있다. 그 갯골의 맨 위쪽이 바로 배를 댈 수 있는 곳(pier)이란 뜻의 배다리다. 밀물 때 미곡과 새우젓, 목재 등을 가득 싣고 들어온 작은 배들은 하역을 마치고 썰물 때가 되면 꼼짝없이 갇혀 다음 밀물 때까지 갯골에서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예나 지금이나 도로가 새로 뚫리고 기차역이 생기면 땅값이 뛰고 개발붐이 일어난다. 유동인구가 늘어나며 큰 변화의 물결이 몰려온다. 배다리 바로 서쪽에 축현역이 생기면서 물동량도 급증했다. 육로가 불편했던 시절, 이곳 배다리는 뱃길과 철길이 맞닿았으며 서울과 인천이라는 거대한 배후시장을 가진, 시장으로서 천혜의 조건을 갖추게 되었기 때문이다. 개항장 근처의 잘사는 일본인이나 서양인들은 의식주를 해결하는데 있어서 외항선을 통해 본국에서 수입되는 박래품에도 의존을 했지만 주로 의류와 공산품일 뿐, 곡물이나 수산물, 목재 등은 대부분 현지에서 조달했다. 경기 남부와 충청도 지방에서 각종 물품을 싣고 들어온 선박들이 배다리까지 들어와 성시를 이루었다.

1910년경 경인철도 직선화 공사로 축현역이 지금의 동인천역(상인천역)으로 옮겨 갔지만 배다리 시장의 번영은 지속되었다. 동인천역 광장과 배다리를 연결하는 통로가 구지하상가였다. 갯골 둑방길에는 자연발생적으로 거대한 풍물시장이 형성되기 시작했고 특히 여름철이면 갯골을 따라 시원한 해풍이 불어와 시장은 불야성을 이루며 인천의 새로운 명물로 자리를 잡았다. 공터였던 일대의 야시장과 일용품시장이 1936년에 인천부 직영 공설시장으로 확대되면서 상류인 배다리쪽부터 매립이 시작된다.

갯골이 매립되면서 형성된 중앙시장은 일제가 태평양전쟁을 시작한 이후, 전시 동원체제로 도시민들이 소개되면서 잠시 위기에 처한다. 미드웨이해전 이후 남양군도에서부터 미군에 밀리던 일제는 전황이 불리해지자 최후의 시가전까지 준비하며 전투에 방해되는 부녀자와 어린이들은 시골로 이주시키는 강제 소개령(疏開令)을 내린 것이다. 전쟁으로 물자가 귀해진데다 많은 인천 사람들이 연고가 있는 시골로 내려가 있었으므로 소비인구도 크게 줄면서 배다리 중앙시장도 큰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지속될 것 같았던 일제강점기의 질곡도 결국 종식되며 우리나라는 해방을 맞았다. 해방이 되면서 패전국인 일본의 군대를 무장해제하고 시설물을 접수하러 대규모 미군병력이 인천으로 들어오고 곧이어 미군정이 펼쳐지면서 배다리 중앙시장은 다시 활기를 띈다. 인천항을 통하여 엄청난 양의 미국 물품들이 쏟아져 들어왔기 때문이다. 내륙운송 루트가 원활치 않았던 당시 미군정 당국의 수송 허브는 부산이 아닌, 인천항이었다. 이 때 한진상사나 제물포운수처럼 하역과 화물운송으로 큰 돈을 벌어 오늘날 굴지의 재벌이 된 기업들도 많았다. 화평동쪽은 양키시장으로 특화되었다. 그러나 이 땅에 전쟁의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6.25사변이 일어났다. 시장은 전쟁과 상극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전쟁통에 한강다리가 끊어지자 서울과의 왕래가 어려워지면서 오히려 배다리시장의 전성시대가 찾아온다. 영등포시장과 함께 수원까지 아우르는 한강 이남 지역의 대표적 시장으로 발돋움을 한 것이다. 상상하지도 못했던 일이었다.

5,60년대 당시 배다리시장에는 내 고모가 하던 포목점이 있었고 외종조부가 운영하던 비누공장도 있었다. 그 공장은 승리비누라고 쓴 검은 붓글씨를 송판에 세로로 새긴 간판을 단 건물이었는데, 그 규모가 제법 컸다. 동인천역 광장에서 구지하상가를 나와 오른쪽으로 돌아서 50미터쯤 걸어가면 왼쪽 편에 있었다. 공장 좌우로 싸전과 방앗간, 떡집, 선술집, 옷가게, 포목점, 문방구, 악기점들이 있었고, 통로 가운데에도 가판대가 끝없이 이어졌다. 물건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던 시장은 손님을 끄는 상인들과 흥정하는 사람들, 그리고 지나가는 행인들로 항상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승리비누는 주로 빨랫비누를 만들었는데, 대낮에도 백열등을 밝힌 공장 안은 분주하게 일하는 직원들과 거래처 사람들로 항상 북적였고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떠나지를 않았다. 어린 내 눈에도 사업이 아주 잘 되는 것 같았다. 공장은 2층으로 된 목재건물이었는데, 아래층은 차량이 드나들 정도로 매우 넓은 대문이 있었고 공장의 기계들과 창고, 사무실이 있었다. 오른쪽에는 큰 온돌방도 있었다. 부엌도 있었는데, 부엌에는 커다란 가마솥이 몇 개 걸려 있었고, 솥에서는 항상 물이 끓고 있었다. 온돌방 아랫목에는 부엌과 연결되는 조그만 문이 있었다. 옛 가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구조로 밥상을 물리고 나서 부엌에서 숭늉 같은 것을 방으로 쉽게 전달할 수 있도록 만든 작은 쪽문이었다. 2층은 넓은 다다미방서너 개로 구성된 살림 공간이었다.

태생적 인천 사람이자, 전형적 배다리인이었던 내 외종조부는 타고난 장사꾼이었다. 그는 젊은 시절 투기적 미곡거래를 하다 망해 가족을 처가에 맡기고 홀로 만주로, 중국 본토로 떠돌아다녔다. 드넓은 세상에서 고생하며 삶의 이치에 대한 안목을 키운 그는 해방 직후 귀향하여 배다리시장에서 새로운 사업에 착수했는데, 그것이 바로 비누공장이었다. 50년대 후반에는 특히 장사가 잘 돼 서울에서 물건 값을 수금해 올 때는 돈을 가마니에 담아 오시곤 했다. 그 분은 60년대 중반쯤 비누공장으로 번 돈으로 철공소도 세워 운영하며 인천의 유지급 반열에 오르기도 했다. 신흥동에 있던 신흥철강이라는 직원이 3,40명 되는 당시로서는 제법 규모가 큰 회사였는데, 잘 나가다가 70년대 이후 국가적 사업이 된 국내 철강산업 패러다임의 변화를 쫓아가지 못해 사업이 어려워지면서 공장도 문을 닫았다.

이후에도 상심하지 않고 서울 종로5가와 청계천에서 철물 관련 사업을 하시며 재기를 꿈꾸기도 했다. 겉치레 보다는 실속을 중시하며 항상 일을 찾아서 했던 분으로 60대 초반에도 검은 뿔테 돋보기안경을 쓰고 망치로 쇠를 두드리시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외종조부는 80년대초 따님이 사는 미국 로스앨젤레스로 이민을 가서 노후를 보내다가 90년대 중반 86세로 현지에서 작고하셨다.

장강의 뒷 물결은 앞 물결을 밀어내고, 세상에 새 사람은 옛 사람을 대신하며, 모든 것은 끝을 향해 간다고 했다. 화무십일홍이라는 잠언도 있다. 서울의 관문으로 이 땅의 개화기를 선두에서 견인했으며, 스스로 백삼십년 한국 근현대사의 증인이 되어주던 인천의 배다리도 이제 폐허만 남기고 자신의 고향을 떠나갔다. 그러나 배다리는 지금 송도신도시에도 있고 청라국제도시에도 있으며, 뉴욕 맨해튼의 미드타운에도 있고 로스앤젤레스의 코리아타운에도 있다. 배다리는 이제 내면화(internalization)되어 인천을, 배다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다. 지금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배다리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인천 사람들 기억의 심연에 가장 역동적이며 행복했던 터전으로 영원히 남아 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벌써 한 세기 전, 유태계 독일 철학자 발터 벤냐민(Walter Benjamin)이 유럽 도시들의 폐허 속에서 그 도시들이 꾸었던 진정한 꿈을 비로소 발견했듯이, 배다리라는 이 도시의 폐허 속에서 비로소 우리는 배다리가, 인천이라는 이 도시가 한 때 꿈꾸었던 그 꿈을 다시 볼 수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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