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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1/김만중문학상(대상) 수상, 강우식/신작시 구름 외 4편/수상소감/시상식에 다녀와서(정미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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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2
댓글 0건 조회 2,929회 작성일 15-07-08 14:08

본문

신작시

강우식

구름 외 4

 

 

천생이었던 아내의 화장터 굴뚝에서

한줄기 연기가 무심히 올라가는 것을 보았다.

그대는 어느새 하늘에 구름집을 지었구나.

 

 

 

 

금산

 

 

큰 고기에게 쫓겨 모래사장 올라온

멸치 같은 신세인 김만중이가

몸 단련으로 아침 체조하듯이

꿈을 잃지 않고 꿈 체조하며

매일 바라보던 어머니 같은 산이다.

 

 

 

 

매미 소리

 

 

매미소리는 울음이다.

한 여름 매미소리는 나무에 붙어서

나무가 우는 것처럼

천년만년 가슴 찌르는 울음이더니

추석 지나자 그 소리도 변해서

쓸쓸히 지나는 가을 바람소리로 운다.

 

무심히 듣는 듯 마는 듯 하는

한 노인의 귀에는 소리가 그렇게 온다.

슬프다.

 

 

 

 

백조의 성

 

 

흰 백조 한 마리가 앉은 듯

만들어놓고 보니

꽃 같은 무지갯빛 꿈에 젖어들게 하는

너무나 아름다운 성이다.

성이 백조가 아니라

빈 하늘에 꿈으로 채운

사람이 아름다운 성이다.

 

 

 

 

비린내

 

 

만나면 늘 비린내를 풍기는

계집이 싫어서 바다를 등졌다가

사람 사는 냄새인 비린내가 그리워

고향에 왔으나 바다 같던 계집도 사라지고

흰 머리칼만 하얗게 파도치누나.

 

 

 

 

수상소감

강우식

꿈처럼 온 어떤 필연에 대하여

 

 

섭섭한 이야기부터 시작하려합니다. 서울에서부터 남해까지 버스를 타고 내려온 시인들이 제가 난생 처음으로 자켓에 흰 손수건을 꼽고 왔는데 누구 하나 괜찮다고 지적해주는 분들이 없어서 저로서는 무척 서운하다는 말부터 시작하고 소감을 말하려 합니다.

일생 시를 써오면서 심심찮게 상을 많이 받았지만 제5회 김만중 문학상 대상은 상금으로 치면 제가 받는 노벨문학상입니다. 역시 상에는 상금이 많아야 상이라는 실감을 하게 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 좋은 일 생기면 잘하는 짓 있잖습니까. 미리 댕겨서 먹는 것. 저도 수상날짜까지 한 20일을 원도 한도 없이 실감나게 기분을 내려했으나 그릇이 작아서인지 그만 감기에 걸려 중도하차하고 말았습니다. 목이 잠겼습니다. 양해하시길 바랍니다.

 

이 자리에 와 계신 아름다운 해안도시 남해의 박영일 군수님과 서포김만중 문학상 관계 운영위원들, 심사를 맡아주신 심사위원들, 그리고 이 상을 축하해 주기위해 오신 문단의 동료들 고맙습니다. 제가 유배문학관 이 자리에 선 것은 오늘로 두 번째인가 싶습니다. 지금 여기에 와 있습니다만 몇 해 전 남해의 시인인 박정규 시집 출판기념회에 축사를 하느라고 서보고 오늘은 제가 상을 받느라고 서보니 저에게 남해는 아주 좋은 일만 생기는 곳이고 인연인 것 같습니다.

서포 김만중 문학을 제가 처음 만나게 된 것은 아마 대학 2학년 무렵이었습니다. 원서강독 시간에 게일이 번역한 영문판 소설 구운몽<The Cloud Dream of the nine>을 가지고 한 학기 동안 배운 적이 있습니다. 그때 영문판 <구운몽>을 접하고 저는 상당히 놀랐습니다.

게일은 왜 현대문학도 아닌 고전문학작품 <구운몽>을 번역했을까요. 조선이라는 땅이 서양 사람들에게 남자의 천국 같은 곳이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 했을까요. 물론 그렇지는 않았겠습니다마는 놀라움이었습니다. 글로벌시대라 일컫는 요즈음과 달리 그때는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이라고 해도 될 60년대 초반이었으니까요. 특히 바다로 둘러싸인 남해와 비슷한 강원도 주문진이라는 조그만 고향 바닷가에서 문화적인 혜택을 못 받고 무지랭이로 자란 저의 놀람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겠지요. 요즈음은 얼마나 좋은 세상입니까. 도시와 지방간의 문화적인 격차가 많이 사라져 있고 어떤 면에서는 도시도 못하는 김만중문학상이라는 이런 큰 상도 주지 않습니까.

그 후 순 한글소설인 <구운몽>을 고전문학강독시간에 다시 읽은 적이 있습니다. 김만중의 <구운몽>을 접하면서 이 소설이 어머니를 위로하기 위하여 쓴 소설이라는 것을 알았고 또 한글로 쓴 우리 소설이라는 데에 경탄을 금치 못했습니다.

김만중은 문학을 아는 문인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문학이란 창작행위는 창작되어진 텍스트를 여러 사람들이 읽고 공감하고 즐기는 것이라는 것을 알은 즉 문학의 출발점이라 할 문학유희설을 깨달은 문인이었기 때문입니다. 또 그는 우리의 고전소설들이 무명씨의 작품이 많은 데 비해 당당히 자기 이름을 밝힌 작가의식도 투철한 문인이었습니다. 저는 젊은 시절에 쓴 산문에서 한국문학의 가장 큰 불행한 점은 시건 소설이건 무명씨 작품이 많다는 것이라고 한 적이 있습니다. 만일 우리에게 당당히 자기 이름을 밝힌 작품이 많았더라면 영국이나 프랑스에 못지않은 수준의 세계적인 문학이 되었으리라 봅니다. 오늘날 한국문학사도 각각 고전문학사 따로 현대문학사 따로 전공하고 배우는 것이 아니라 한국문학사라는 이름 아래 단절이 아닌 연속선상에서 흘러왔을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이름을 떳떳이 밝힌 우리글로 작품을 남긴 김만중이 우리에게는 소중한 것입니다. 실제 김만중이 말한 다음과 같은 대목을 보아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여염집 골목에서 나무꾼이나 물 긷는 아낙네들이 에야디야하며 주고받는 노래가 비록 저속하다고는 해도 그 진가를 따진다면 결코 학자, 대부들의 이른바 시부라는 것과 같은 입장에서 논할 수 없다.”라고 했듯이 김만중은 한글로 된 작품을 사랑한 작가였습니다. 김만중의 위의 짧은 글에 저 스스로 지나치게 의미를 붙이는 것이 아니가 스스로 경계를 하면서도 이 말 한마디만 꼭하고 지나가고 싶습니다. 저는 일생 시를 쓰면서 내가 쓰고 있는 시가 늘 외국의 문화에 얹혀온 것이라는 점에서(향가는 중국의 문자에 현대시는 서구문명의 영향 아래) 우리시의 정체성을 나름대로 찾아보려고 한 적이 있습니다만 우리시의 장점이 바로 물 긷는 아낙네나 나무꾼들이 에야디야하고 주고받는 신명 같은 가락에서 찾고 출발해한다는 점을 들고 싶습니다. 이 신명은 거슬러 올라가면 영고 동맹의 산신께 제사 드리는 축제에서부터 그 연원을 잡을 수 있는 것이고 여기서 우리 나름의 우리시의 특징 같은 것을 내세워서 시조와 같은 틀을 현대시에도 잡아가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젖어봅니다.

하지만 솔직히 저에게 충격을 준 것은 소설 <구운몽>이 꿈으로 골격을 짠 몽자류 소설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아시다시피 꿈이라든지 사랑은 문학의 영원한 테마입니다. 아마 제가 문학에서의 상상력이 무엇보다는 중요함을 은연중 깨닫게 된 것도 대학시절에 읽은 <구운몽>이 주는 영향도 컸다고 봅니다. 그처럼 이번 수상하게 된 저의 장시집 <마추픽추>도 그런 상상력의 산물입니다. 저의 수상시집 <마추픽추>를 읽으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시집의 끝에 달은 산문에서 저는 이 장시가 씌어 진 창작동기를 어느 날 새벽에 비몽사몽간 꾸었던 꿈에서 시작하였음을 밝힌 바 있습니다. 저는 일생 시를 써오면서 꿈 그대로를 현실에서 고스란히 시로 옮겨 논 적이 여러 번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오늘의 김만중 문학상이 저에게 오게 된 것도 우연한 일이 아니라 필연이라는 생각도 들게 됩니다.

<구운몽> 내용도 그렇습니다. 주인공 양소유가 꿈속에서 여덟 명의 여인들과 노는 것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근거 없는 이야기입니다만 우리말에 팔난봉 꾼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주색잡기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고 사는 사람을 일컫는 것이지만 저는 이것이 조선 팔도를 바람나 돌아다니는 사람 아니면 양소유와 여덟 미녀에서 오지 안했나 상상도 해봅니다. 조선시대에는 한 남자가 팔자 좋게 여덟 명의 여인을 거느리는 내용이 과연 어머니를 위로하는 일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만 김만중도 아무리 축첩이 허용된 사회라 하더라도 현실로서는 불가능한 일이라 믿었기에 꿈을 가져와 묘사했다고 봅니다. 모르긴 하지만 김만중의 <구운몽>이 조선시대에는 국문소설뿐만 아니라 한문소설도 있는 것으로 보아 양반사회에도 독자층이 많았다고 보아 조선사회에 다른 한면, 축첩이 곧 신분상승을 의미하는 부정적인 영향도 끼쳤다고 보입니다. 문학이 가진 양면성적인 면이지요. 어쨌든 김만중의 <구운몽>이 꿈 이야기로 도배했듯이 저의 <마추픽추>도 꿈에서 영감을 받아 순전히 꿈같은 상상력으로 채운 강우식만의 <마추픽추>이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러시아 형식주의의 낯설게하기의 하나인 낯선 마추픽추라는 잉카공간에 낯설게하기의 낯설지않기라는 새로운 문학의 한 기법으로 제가 평소에 즐겨 읽던 우리 시조들은 삽입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낯설게하기의 낯설지않기의 기법이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들은 그러려니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실는지 모릅니다만 이 기법을 하나의 문학 방법론으로 내세운 것 하나만으로도 저는 제5회 김만중문학상 대상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구요. 제가 생각하는 시란 여타의 장르보다 앞서 가고 시험을 해야 하는 장르임에도 현실에만 머무르고 미래는커녕 아니 현실도 제대로 보지 못하는 현실에 매인 것이라는 점에서 우리 시에 대한 전망을 내다본 것이기 때문입니다. 디지털 시대의 가장 문제점은 창조적인 행위는 점차 사라지고 무엇이든지 복제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 복제의 극단적인 예로서는 최근의 영화 같은 데 보면 복제된 로봇이 인간을 대신하고 지구를 지배하고 오히려 인간을 다스리는 것을 아무런 충격도 없이 있을 수 있는 일처럼 우리는 받아들이는 것을 봅니다. 충분히 이런 복제가 지배하는 세상을 점칠 수는 있겠지만 그런 세상이 우리에게 와서는 안 되겠지요. 저의 시집 <마추픽추> 속의 낯설지않기로 삽입한 시조도 어떻게 보면 복제일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사회적 의미로 널리 공인된 시조는 엄밀한 의미에서 인용이지 복제라고 볼 수 없는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특히 저로서는 시조가 복제라 하더라도 창조적 의미로서 활용되었을 때는 복제가 아니라는 의미로서 삽입한 것입니다. 저는 요즈음만큼 우리 시단이 불확실한 시대는 없다고 봅니다. 우리 시단은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요. 시인들은 정말 자기 쓰고 싶은 것들을 시로 쓰고 있을까요. 내가 아니면 쓸 수없는 시를 쓰고 있을까요. 자기만의 독특한 목소리를 내고 자기만의 시세계를 벽돌 쌓듯이 구축하고 있을까요. 적어도 저의 시집 <마추픽추>는 그런 물음에 대한 내 자신의 답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의 우리 문학은 점차 문학만이 아니라 다양한 장르와 장르가 복합된 방향으로 나갈 것이라는 전망 때문입니다. 새로운 문학, 현실에 부합하는 문학으로 이와 같은 방법을 찾으리라고 저는 미루어 짐작합니다. 다른 장르의 문화에서는 이미 그 조짐이 보이고 있습니다. 연극에서 햄릿과 판소리의 만남처럼 말입니다. 아마 심사위원들은 저의 이러한 상상력적 꿈과 문학적인 방법론을 좋게 보아 준 거 같습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저의 상상력에는 제5회 서포 김만중문학상을 받는다는 꿈은 꿈에도 없었습니다. 이것은 마치 가난한 흥부가 박을 캐고 하루아침에 벼락부자가 된 기분입니다. 꿈이 꿈끼리 만나서 상을 받는 기쁨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김만중의 한국고전문학에서 손꼽히는 명저인 <구운몽>의 가진 그 꿈이 오늘날 저의 꿈과 상상력의 산물인 <마추픽추>로 이어졌다고 저는 믿습니다. 그래서 더욱 기쁩니다. 서두에는 서운하다는 말로 시작했으나 끝은 기쁘다는 말로 맺으려고 합니다.

기왕에 좋은 상을 받았으니 이제 저는 이 인연으로 조심스럽게 남해 사람이라 말해봅니다. 앞으로 서포 김만중 문학상 홍보시인이 되려 합니다. 김만중 문학상이 허다한 우리나라 문학상 중에서 좋은 작품을 쓰는 문인에게는 언젠가 쌓이고 쌓여 좋은 결실을 맺는다는 것을 입증하는 가장 대표적인 상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시인으로서는 섬에서 유배 생활을 한 김만중의 생애가 어느 날 꿈처럼 찾아오기를 저 나름으로 기대해 봅니다. 그런 의미에서 큰소리 한번 치고 내려가려 합니다. 아마 모르긴 하지만 저처럼 신비한 잉카의 도시 마추픽추에 대해 상상력을 가지고 한 권 시집 분량의 긴 시를 쓴 시인은 세계에서 제가 처음일 거라는 말을 감히 드리며 내려가려고 합니다. 제가 처음일거라는 흥분으로 이 장시집 <마추픽추>를 써나갔습니다. 그 몰아의 흥분이 아니면 이 시집은 탄생되지 않았을 겁니다. 자기가 쓰는 작품에 몰아의 경지까지 빠지도록 흥분합시다. 자신의 인생과 작품을 사랑합시다. 저와 같이 수상하게 된 시인, 소설가들에게도 축하드립니다.

정말 칠십도 중반인 시인이 이십대의 문학청년처럼 충전하며, 충전하며 쓴 시입니다. 기분 좋습니다. 만세를 부르고 싶습니다. 여러분 다 같이 저 따라 축하의 의미로 만세를 불러주십시오. 만세.

 

 

 

 

정미소

시상식에 다녀와서

 

 

111일 토요일 오전8.

약속장소인 사당역 1번 출구를 확인하며 문을 나서는데 강우식선생님께서 전화를 걸어오셨다. 남해까지 들고 갈 짐이 있어서 선생님 댁에 들러서 함께 가자는 것이었다. 남해 12일 전세버스가 인천의 리토피아 사무실에서 730분에 출발하여 사당을 경유한다고 하니 마음이 촉박했다. 선생님 댁에 들어서니 선생님께서 거울을 보며 여러개의 모자를 들고 썼다가 벗었다가 모양을 내고 계셨다.

그렇게 늑장부리면 여러 사람이 기다리세요.”

선생님께서 허둥지둥 구두를 신고 나와서 현관문을 잠그셨다.

약속장소인 사당역 1번 출구에 도착하니 벌써 문학아카데미의 여러 시인선생님들께서 곱게 옷단장하시고 외박용 옷가방을 한 개씩 들거나 어깨에 메고 담소를 하고 계셨다. 강우식선생님께서 12일용 옷가방을 챙겨두고 그냥 오셨다고 하신다. 옷가방 안에 남해 군수님께 드릴 책이며 수상소감문이 들어있는데, 나를 지목하며

정신 줄을 쏙 빼는 바람에 놓고 왔다.”고 혀를 끌끌 차셨다.

곁에 계시던 장순금선생님께서

인삿말이야 평생 말로 밥 벌어드셨는데, 원고 없이 밤도 새우시지요.”

박장대소하며 버스를 기다리는 시간이었다.

멀리서 장종권선생님께서 인솔하는 대성관광버스가 비상등을 켜며 스르르 우리들 곁으로 다가와 문을 열었다. 시상식에 동승하는 시인선생님들은 문학아카데미의 박제천선생님 고정애선생님 김다명 김여정 선생님 김주혜선생님 노혜봉선생님 손옥자선생님 유수화 윤강로선생님 윤문자선생님 이 명 이길원선생님 정자경 황옥경 이태규선생님 장순금 조여주선생님 정호정선생님 최가림 최금녀선생님 황경순 태동철선생님, 그리고 리토피아의 장종권선생님 김태일선생님 남태식 김승기 박정규선생님 막비 시동인인 김영덕 박철웅 박하리 양정수 이 닥 이외현 정영랑 정기재 정 령 정치산 천선자 허우범선생님이셨다.

버스가 경부고속도로에 올라 신갈인터체인지를 지날 쯤 막비시동인의 총무인 이외현시인과 박하리시인이 김밥과 간식거리가 든 지퍼팩을 하나씩 나누어주었다,

뭘까?”

지퍼팩을 열어보니 모듬떡과 귤 한개 비스켓, 쵸콜렛 사탕 껌, 그리고 신권인 만원짜리 두 장이 들어있었다. 장종권선생님께서 남해12일의 일정을 안내해 주시며 2만원은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점심을 사 먹으라는 거였다.

버스 안이 각종 메뉴로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뒷좌석에 앉으신 고정애선생님께서 2만원 기념액자 만들어서 간직하신다며 각시탈 웃음을 웃으셨다.

시상식 시간이 오후3시여서 시간이 넉넉하지는 않았지만 인삼랜드 휴게소에서 점심식사시간을 30분 주셨다.

삼삼오오 식사를 마친 후 버스에 오르니 대전의 시인인 이 섬선생님과 유수화 윤문자선생님이 탑승하여계셨다. 윤문자선생님께서 팔을 끌어 다가가보니 투명컵에 가득 준비해 오신 대추를 하나씩 나누어주라는 거였다. 이 섬선생님께서 찐고구마를 가져오셔서 또 나누어드렸더니 시인선생님들께서

배 터지겠다.”

곁에 짝꿍으로 앉은 이 태규선생님께서 맘껏 먹으라며 선생님 몫을 건네주시길래 배낭에 챙겼다.

서울에서 7시간을 달려 도착한 남해 유배문학관의 정경은 단아했다. 바람결에 국화꽃향기가 달려 와 먼 길 오느라고 수고했다며 멀미난 등을 토닥거려주었다. 시상식시간까지는 20분 남았다. 때마침 문학관로비에서 국화축제가 열리는 중이어서 감상하며 사진촬영도 하며 시상식장에 들어섰다.

남해군수님의 축사와 심사위원장이신 강희근선생님께서 이번 작품은 엄정하게 심사하였다는 말씀과 본격적인 서포 김만중문학상시상식이 일목요연하게 진행되었다. 대상인 강우식선생님께서 군수님으로부터 5천만 원이라고 쓰여진 상금을 전달받을 때 객석에서 환호성이 터졌다. 수상소감의 말미에 만세나 한번 하겠다며 제가 외치면 따라서 하라고 선창을 하셨다.

강우식 만세!”

강우식 만세!”

시상식장에 만세삼창이 출렁거렸다.

시상식을 마친 후 꽃다발 증정시간에 최가림 시인이 가장먼저 서울에서 준비해 간 꽃다발을 들고 단상으로 오르는 모습이었다. 이외현 정자경 황옥경 정 령 천선자 이 닥, 강우식선생님께서 아름드리 꽃다발축하를 받으시며 기념사진을 찍자고하셨다.

찰칵! 김치! 스마일!

사진촬영을 마친 일행은 남해군수님께서 준비하신 만찬장소로 걸음을 옮겼다.

한우불고기 전골과 맛깔스런 반찬과 술이 잘 차려진 음식점에서 축하공연이 이어졌다. 강희근심사위원장님께서 수상자들을 위한 축하의 건배를 제의하시며 함께 하는 모든 분들의 건강과 건필을 위하여! 술잔을 부딪혔다.

오후6.

우리를 태운 버스는 남해토박이인 박정규시인의 인솔로 해안도로를 따라 이어리 숙소로 가고있었다. 썰물이 빠져나간 갯펄에 갈매기 가족들이 저녁만찬을 즐기고있었다.

하나 둘 야경이 피어오르는 시간에 방배정을 받고 2층으로 오르는 계단을 따라 방에 들어서니 50명은 합숙해도 되는 방이었다.

앗싸!”

최신형 노래방기기가 있는 것을 보니 유희실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리토피아의 시인선생님들과 문학아카데미의 시인선생님들이 여장을 풀고 한숨 돌리는 틈에 손옥자선생님이 마이크를 잡고 스텝을 밟기 시작했다. 목청껏 날아오르는 가엾어라 카츄사가 시인선생님들의 흥을 돋우었다. 마이크의 순번이 정해지고 이길원선생님의 열창과 윤강로선생님의 고음과 황경순 선생님의 열아홉 살 섬 색시와 김태일선생님의 명곡이 앵콜을 받으며 분위기가 무르익을 쯤 테라스에서는 환상적인 뒷풀이파티가 열리고 있었다. 즉석 굴 구이, 자연산 장어구이, 쏙 구이, 꽃게구이, 갓 삶은 문어와 막걸리, 소주, 맥주, 보해복분자, 사이다, 새콤달콤한 초고추장.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젓가락을 들고 서서 먹기 시작했다.

장어 맛 끝내준다.”

쏙이 입안에서 살살 녹는다.”

먹느라고 북새통인 가장자리에 강우식선생님과 박제천선생님이 복분자를 들고 계셨다. 누군가 삶은 문어와 초고추장을 놓아드렸다. 강우식선생님이 한 점 드시더니

, 문어 잘못 삶았다!”

그 한 마디에 박제천선생님은 문어 맛도 안 보시고 지팡이로

치워!”하셨다.

그 많던 문어가 동이 났는데, 강우식선생님의 치아상태가 의심스러웠다.

먹고, 마시고, 또 먹고, 노래부르고 여흥을 즐기며 이어리의 밤은 깊어갔다.

 

갈매기 울음소리에 눈을 뜨니 오전 7시였다.

숙소에서 창밖을 내다보니 이어리 선착장에 최금녀선생님이 머플러를 흩날리며 바다로, 바다로 걸어가는 뒷모습이 보였다. 서둘러 선착장으로 달렸다. 부지런한 막비시동인인 이 닥과 박하리 정치산 남태식 김승기시인이 기념사진촬영을 하고있었다.

잠깐, 나도!”

추억 한 장이 브이자를 그리며 활짝 웃었다.

장종권선생님께서 큰 목소리로 시인선생님들에게 알렸다. 아침 식사가 마련된 1층 식당으로 오라는 거였다.

우리 일행을 위하여 특별히 주문한 식사는 쏙 국과 따끈한 밥과 생채무침 생선찜과 쏙 튀김이 눈에 띄었다. 강우식선생님께서 손짓으로 부르시길래 다가갔더니 쏙 국이 시원하다며 한 그릇 더 가져오라고하셨다. 여기 저기 시인선생님들께서 쏙 국 더 달라고 주문이 쇄도했다. 보름달만한 쟁반을 들고 주방에 들어 가 박정규선생님의 사모님이신 요리사에게 웃으면서 말을 건넸다.

솥에 있는 거 국자로 긁어서 모두 주세요.”

건더기만 남기고 말 그대로 국자로 긁어서 열 두 그릇을 식탁으로 배달해서 비웠다.

이길원선생님께서 국그릇 채 후루룩 마시는 모습을 보며 쿡 쿡 웃음이 터졌다. 흥분의 도가니인 어젯밤의 열창이 떠올라서였다. 빈 쟁반을 들고 노해봉선생님과 김주혜선생님 곁을 지날 때 손수건을 들고 춤사위를 펼치던 기억과 트위스트 트위스트 랄라라 평소의 모습과는 너무 생경한 발랄함에 언니라고 부르고 싶어졌다. 식탁에 맛있는

생선찜과 쏙 튀김이 그대로 남아있어서 비닐 팩에 주섬주섬 담았다. 이렇게 남은 음식 챙기는 습관은 시인선생님들과 어울리면서 자연스럽게 길들여졌다. 시인선생님들은 1차 식사를 하고나면 꼭 2, 3차까지 가서 음식 판을 벌이는 거였다. 특히나 강우식선생님은 술 더 가져오라고이미 취하셨는데도 안 주고는 못 견딘다.

아침식사를 마친 후 이어리 숙소를 배경으로 기념사진촬영을 하고 버스에 올랐다. 진행가이드인 박정규선생님께서 하루일정 안내를 하는데 강우식선생님께서 식당으로 걸어가셔서 따라 가 보았다. 지갑에서 5만원 두 장을 꺼내어 주방에서 수고하신 아주머니 두 분께 드리고 계셨다.

일행을 태운 버스는 이어리해안도로를 따라 금산의 명소인 보리암을 약 3시간 정도 돌아보고 선소리 선착장으로 이동하여 점심을 먹는다고 하였다. ‘보리암으로 오르는 길은 가파르고 높아서 마을버스가 10분 간격으로 운행하고 있었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있었다. 우산이 없는 시인선생님들은 매점에서 우산을 사기도 하였지만, 비는 조금 내리다가 그쳤다. 마을버스에서 내려 도보로 걷는 길에 김영덕선생님이 투덜거렸다.

우산을 사니 비가 그치네.”

저만치 김여정 선생님께서 가파른 길을 혼자 오르고계셨다. 다가가서 여쭈었다.

강우식선생님은요?”

안 올라온대.”

박제천선생님도요?”

차에 있겠대.”

그도 그럴 것이 강우식선생님과 박제천 선생님이 운동하는 모습은 한 번도 본 기억이 없다.

보리암의 정상에서 내려다보이는 남해바다의 풍경과 깍아지른듯 한 바위절벽이 절경이었다. 때마침 보리암에는 입시를 앞둔 학부모님들인지 무척 붐볐다. 조여주선생님께서 불전함에 돈을 넣고 부처님께 엎드려 절하는 모습을 보고 용기를 얻었다. 불전함에 어제 점심값으로 받은 2만원에서 아껴둔 1만원을 넣었다. 김여정선생님을 따라 바다쪽으로 조금 더 내려가니 해수관음상이 안개 낀 바다를 그윽하게 바라보고 계셨다. 해수관음상앞에 엎드려 연신 절하는 사람들의 소원 끝에 나의 소원도 얹었다. 황경순시인이 묵직한 카메라를 들고 사진을 찍어주겠다고 하였다. 삼삼오오 시인선생님들의 표정이 밝았다.

12. 선소리 횟집으로 들어가는 길이 공사중이어서 조금 걸었다. 식당에 들어서니 손님은 예약된 우리 일행뿐이었다.

먼저 자리를 잡으신 강우식선생님께서 이길원선생님 박제천선생님과 담소를 나누시다가 나를 보더니 큰소리로 말씀하셨다.

! 차에서 양주 꺼내 왔나?”

아니요.”

가서 가지고 와라.”

우씨. 금산을 올랐다가 온 속마음은 그만 걷고 싶었는데 그럴 수는 없었다. 혼자 가기가 싫어 뒤따라 온 정기재시인의 손을 잡았다.

바다가 빤히 건너다보이는 횟집에서 채반에 수북한 자연산 회를 볼이 미어지도록 쌈을 싸서 먹었다. 회가 달았다. 김다명시인이 반찬으로 차려진 젓갈도 맛있다고 권하였다. 최금녀선생님께서 회가 담긴 채반을 자꾸만 우리 쪽으로 밀어주시며

이런 회는 서울에서는 못 먹는 거야.”

부지런히 먹으라고 하셨다.

강우식선생님 덕분에 입이 호강한다며 웃으실 때 사이다 한 잔을 따라드렸다. 옆 테이블의 태동철시인과 황경순시인은 맥주에 소주를 말아 젓가락으로 회오리를 일으키며 완샷을 하고 있었다.

식사를 마친 몇몇 시인들은 바닷가에서 삼삼오오 담소를 하며 사진을 찍고있었다. 정오의 평화로운 바다가 햇살비늘을 말리고 있었다.

선소리횟집에서 점심을 마친 일행은 다시 버스에 올라 서울로 가는 길을 재촉했다. 강우식선생님의 김만중문학상 수상소식을 누구보다도 반겼을 박정규시인이 남해토박이여서 12일의 남해기행이 순조로울 수 있었다. 인터체인지근처에서 인사를 하였다.

다시 한 번 강우식선생님의 김만중 문학상 수상을 축하드리며, 저의 안내는 여기까지입니다. 가시는 길 편안하게 잘 가십시오.”

헤어지는 연습이 안 되어서일까, 누군가와 마지막 인사를 할 때면 눈물이 난다. 차창밖에서 버스가 사라질 때까지 손을 흔드는 박정규시인을 뒤로한 채 버스는 고속도로에 몸을 실었다.

다시 7시간을 달려야 하는 길이다.

정 령시인이 마이크를 돌리며 시인선생님들의 애창곡을 여쭈었지만 모두 손사래를 칠 때 박 제천선생님의 애창곡인 나의 살던 고향이 웃음보를 터트렸다. 어떨 땐 군가의 리듬으로 들리고, 어떨 땐 민요조타령으로 들리는 박제천선생님표 노래다. 그 다음은 이 명시인의 춘자야 보고싶구나가 흘렀다. 또 웃음보가 터졌다. 그 다음부터 손사래 치던 시인선생님들이 마음 놓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버스가 어둑어둑한 대전을 지나 인삼랜드 휴게소에서 정차했다. 대전의 시인인 유수화 이 섬 윤문자선생님께서 하차하시며 인사를 하였다. 마중나오신 유수화시인의 남편이신 김 기팔선생님께서 강우식선생님과 박제천선생님과 반가운 악수를 하셨다.

버스가 전용차선을 달리며 시인선생님들의 잠을 거들었다. 고개를떨구며 잠에 취해있을 때 강우식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 장순금아. 니 이 타이슬링 나만 사준 게 아니고 제천이도 사 줬나?”

부스스 눈을 떠보니 강우식선생님께서 앞자리에 앉아있는 장순금선생님에게 걸어 가서 따지고 계셨다. 장순금선생님께서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아니에요, 선생님. 하나는......”

할 때 자리로 돌아가셨다.

조금 후 강우식선생님께서 또 장순금선생님에게 와서

! 장순금아. , 제천이 것은 비싼 거고 내 꺼는 싼 거나? 에이 씨, 안 가져.”

목에서 터키석 타이슬링을 벗고 계셨다. 잠들었던 버스 안이 웃음바다가 되었다. 강우식선생님께서 술을 찾으셨던지 김다명시인이 다람쥐처럼 버스의 좁은 복도를 들랑거리며 시중을 들고 있었다.

버스는 다시 어제 만났던 약속장소인 사당역사거리에 도착하였다. 인천의 리토피아 시인선생님들만 남고 문학아카데미의 시인선생님들은 모두 하차하였다. 정호정선생님께서 강우식선생님에게 인사를 하셨다.

강우식선생님. 덕분에 즐거운 여행 하였습니다.”

인사와 인사가 교차하며 지하철역으로, 시내버스 정류장으로 걸음들도 흩어지고 늦을까봐 조바심치던 약속시간도 과거가 되어 반짝거렸다.

행선지가 같은 방향인 강우식선생님과 장순금선생님과 남태령고개를 넘으며 사당역과 멀어졌다.

 

강우식선생님의 말씀이 내내 머릿속에 남았다.

상금은 5천 만 원 받았는데, 써도 써도 2천 만 원 밖에 못 쓰네.”

2천 만 원밖에 못쓰네.

나는 상금을 받아서 강우식선생님처럼 쓸 수 있을까? 물욕이 앞을 가려 절대로 못 쓴다. 이 시대의 마지막 로맨티스트 강우식선생님께 존경심이 우러났다. 까마득한 후배 시인으로서 닮고 싶다는 소망이 일었다.

강우식선생님의 초대라면 먼 길도 마다하지 않으시는 시인선생님들의 행보도 놀라웠다. 강우식선생님의 일이라면 발 벗고 나서는 리토피아와 막비시동인들의 헌신적인 마음씀씀이도 감동이었다. 카메라속의 사진첩을 들여다보며 12일 남해기행에 다시 젖어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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