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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특선/조재형/찢겨진 풍경들 외 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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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재형
찢겨진 풍경들 외 4편
평생의 저녁을 반납하고 날인 받은 등기권리증의 붉은 직인
출근길 중앙선을 물어뜯어 아침을 난도질하는 삿대질 몇
굳게 다문 음식물처리기를 두드리는 암고양이 눈빛
본문 보다 길게 늘어뜨린 중견 시인의 프로필 면적
304명이 낙화한 초유의 참사를 교통사고에 견주는 나리들의 비유법
금피아 철피아 해피아 피아골의 소환을 싣고 새벽같이 달려온 조간의 사회면
구조조정에 밀리고 체포영장에 쫓기고 수배전단에 울먹이는 광장의 촛불
오천 년 주식主食의 수입 개방으로 궁지에 몰린 쌀가마니들의 성난 현수막
지역주의 청산을 내걸고 지역주의에 편승한 낙하산의 압도적 득표율
장례식장 입구마다 깍두기처럼 도열하여 봉투를 영접하는 나른한 조화들
말라비틀어진 인환의 숲에 우후죽순으로 뻗어 가는 빨간 십자가 군락
수명壽命의 팔 할을 장기수로 보내는 생태체험장 공작새의 퇴화된 날개
근황
내 눈물은 구름 되어 하늘을 떠돌아요
그날 아침 떠나온 운동장을 기웃거려요
하루도 거르지 않던 골목을 스쳐 가죠
우리 집 옥탑방은 빗방울로 다녀오곤 해요
내 미소는 가슴을 짓누르는 바위덩이로 자리를 잡았어요
당신들이 밭은기침을 내뱉을 때면
나는 파도처럼 출렁거리죠
기울어진 지축처럼 내 이름이 버거운가 봐요
주저앉는 날이 부쩍 많아진 엄마
저러다 그녀의 남은 生도
바닥으로 가라앉고 말겠어요
나는 나도 모르게
봄부터 집필 중인 슬픔 한 권의 주연이 되었어요
이 대하소설의 결말을 화자인 나도 모르겠어요
신간으로 다른 고통은 더 이상 출간되지 말기를,
바다를 베고 잠든 긴 꿈에서 깨어나고 싶어요
나를 두리번거릴 책상으로 돌아가고 싶은데
밟고 나갈 길이 안 보여요
안부 대신 추억 한 송이 꺾어 보내요
누구라도 꽃병이 되어 수령해 주었으면
우표는 눈물 한 방울로,
문드러진 원망은 동봉하지 않을게요
불순한 밤이 키운 꽃대인지라
아빠의 깡마른 한숨을 먹고 자랐데요
개봉하면 향기로 재생될 거예요
답신은 이심전심으로 갈음할까요
즐거운 세일
오늘 나는 임의로 제출되었다
하지만 누구도 나를 펼쳐 보지 않는다
하는 수 없이 집으로 반품되는 중이다
표준 어법으로 억양을 각색했던 바
원산지 표시에 하자가 드러난 것
내가 이 가문의 재고품이 된 지는 오래
식구들은 밤새 나를 재포장할 것이다
내일 다시 신품인 듯 납품을 시도하겠지
따뜻한 배후가 되어 주겠지
화살기도로 엄호해 주겠지
또한 이렇게 외쳐 주지 않겠어?
대박이 아니라도 좋아,
반품이 되어도 좋아,
바겐세일만은 사양해!
변산바람꽃별곡
甲은 날더러 비루하게 살라 하네
배알이니 자존감이니 번데기처럼 접어 두고
乙같이 丙신같이 굽실대며 살라 하네...
매창은 날보고 주酒님처럼 살라 하네
농익은 입술에 취하고 저렴한 낭만에 취하고
희석시킨 관음봉 구름같이 발효된 청림산골 인정같이
무일푼을 시인하며 시인으로 살라 하네
채석강 금씨禁氏는 비자금처럼 살지 말라네
명예는 장롱 속에, 양심은 비밀은행에, 의리는 차명계좌에 숨겨 두고
무기명 비굴같이, 추적이 불가한 현금다발같이
구겨진 지폐처럼 얄팍하게 살지는 말라네
내 사랑은 날보고 불꽃처럼 타오르라 하네
모닥불처럼 불순하게 횃불처럼 고독하게
근엄한 등대같이 영롱한 반딧불이 같이
통렬하게 빛나다 떠나라 하네
이 계절은 변산바람꽃처럼 피우라 하네
거처를 소유함에 연연하지도 말며
궁한 속내를 외피로 장식하지도 말며
붉노랑 상사화같이 미선나무꽃망울같이
마음의 키를 낮추어 피었다 지라 하네
엊그제 떠나간 노兄은 벽시계처럼 가라 하네
용서와 화해 앞에는 큰바늘처럼 속보로
시기와 분노 앞에는 작은바늘처럼 우보로
금쪽같은 생生 아끼며 가라 하네
* 청산별곡을 변주
이제 알겠지
- 훈련병을 위하여
갓 입대한 아들을 꺼내 본다
난생 처음 부모에게 분리되어
팔도 생면부지와 한솥밥을 먹게 된 지금
맞지 않는 옷을 껴입은 것처럼
매일매일 불편하겠지
구미에 당기는 것들만 누려 오다
헐렁한 군화처럼 달래며 가야 한다는 것
좁은 의자는 껴 안아줘야 하고
모자란 부식은 한 숟갈씩 나누어야 한다는 것
나 홀로 앞서 가는 인생도
뒤쳐져 가는 세상도 아니라는 것
발맞추어 구보하며 이제 느끼겠지
그동안 무상으로 공급 받아온 공기가
얼마나 긴요한 보급품인지
거저 숨 쉬고 살아온 하루하루가
바로 평범한 기적이라는 것
방독면 쓰고 가스체험을 맛보며 이제 알겠지
새벽부터 밤늦도록 빽빽한 훈련 속에서
이면지처럼 함부로 다룬 어제의 시간들이
백지처럼 비밀한 여백이었다는 것
아침 점호를 털고 일어나
울컥거리는 그리움을 포개 접으며
순교적 울타리인 가족이야말로
가장 따뜻한 난로라는 것
이제 알겠지
시작메모
내 시는 슬픔을 구걸하는 눈물이다.
한 때 ‘독사’라는 악명을 부여받은 수사관 시절을 보냈다. 고도의 지능을 가진 범죄자들과의 전쟁으로 때로 한 달에서 수개월까지 밤샘하기 일쑤였다. 향리의 수사관으로서 서울에서 제주도에 이르기까지 난공불락의 사건들과 혈투를 벌인 십 수 년이었다. 진실하지 않은 것이 유일한 진실이었던 나는 백기 대신 사표를 던지고 투항했다. 민들레의 작은 키보다 낮은 계급을 벗어 던지니 작은 민들레가 보였다.
그로부터 다시 십여 년, 그 ‘독’을 없애고자 온 몸의 ‘바늘’을 뽑아내고자 무던 애를 썼다. 지문이 문드러진 생계형 ‘무전유죄’에 대한 연민을 시로 베끼기 시작했다. 한 손에 법전을 또 다른 손에는 시집을 든 나는 하루에 두 세상을 살아간다. 시를 통하여 광대하고 높고 깊은 우주와 교감한다. 사물과 자연에 긴장하며 이로써 겸손을 배우고 나를 내려놓곤 한다.
지향하는 키워드는 낮은 것을 향한 따뜻한 시선이다. 구원의 일환으로 시를 접하는 나는 정화와 위로와 치유가 필요한 비루한 영혼들에게 유익한 도구가 되고 싶다. 염병할 수사관의 묵은 죄을 보속하는 길이기도 하다. 오늘도 나는 파문당한 구도자의 눈으로 삶의 바닥을 읽는다. 바닥을 추구하는 나는 무위자연의 성실한 삶을 예찬한다. 현대 자본주의 불편한 단면을 고발한다. 선량한 뭇생명의 평화를 신께 간구한다. 가장 정직한 삶을 살아가는 ‘지문이 없는 사람들’에게 혈서 같은 내 시를 각서처럼 바친다.
나는 썩은 과일이다. 위선이라는 방부제를 뒤집어쓰고 있는 줄 내 소비자인 이웃들은 모른다. 나는 낙과다. 눈물이라는 상처를 품고 있는 줄 나의 주요 고객인 독자들은 모른다. 모두에게 발각되는 날. 나는 숲정이의 낭만국으로 추방될 것이다.
조재형- 2011년「시문학」등단, 시집 <지문을 수배하다>, 현)법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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