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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특선/허문태/공백기 외 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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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문태
공백기 외 4편
꽃잎이 경계다.
꽃잎이 피어나고 꽃잎이 지는 동안
태양은 아무 일 없이 흔들리는 이파리를 비추다 기울고
꿀벌이 부지런히 꿀을 모으는 일상은 편안하다.
별들의 운행을 따라 홀로 떠나는 여행
여름을 소진하며 피어나는 박꽃에 달이 뜬다.
겨울 빈 들판에서도 바람은 눈을 뜬다.
폭포로 가라
목숨을 내던지고 뛰어내려
한 장 꽃잎의 무게로 내려앉는 자유
꽃잎이 피어나고 꽃잎이 지는 동안
꽃잎의 위장이 섬뜩하다.
고사목
다 생략하고
어려운 상징만 남았다.
침묵 아니다 무념이다
수 만 가지 아니다 하나다.
죽을 때까지 사는 것이 아니다.
죽어야 사는 것이다.
하늘로 향한 가지 끝에
아침 햇살 설핏 지난다.
채송화
단독주택 골목길을 몇 번 돌아들어 햇살 좋은 담장 밑
아이들 웃음소리를 꿈꾸나?
노인 서너 명이 쭈그리고 앉아
골목 끝을 기웃거리고 있다.
개망초
긴 장마가 들면
무너진 토담을 지나
에베미 들판에서 백령산 자칫골까지
마냥 히죽이죽 헤매던
고모야
문내실 고모야
그 해,
유월 지나 칠월인가 팔월인가
온 산하에 콩 볶듯 총소리에 놀라
하얗게 정신을 놓아버린
눈 맑은 고모야
막내 고모야
불가마
훅!
숨이 멎었다.
그 누나의 꽃무늬 팬티
반닫이 맨 밑 서랍에 단정히 접혀 있었다.
친구 몰래 책가방에 숨겨 왔다.
비 오듯 땀이 흘렀다.
땀방울이 온 몸을 적시도록 살고 싶었다.
촘촘히 희망을 담는 곡식들처럼
뜨거운 벌판을 가로 질러 달리고 싶었다.
왜, 미친바람이 되어
겨울 강 어둠 속에서 홀로 헤매었던가?
제 스스로 뜨거워 질 수 만 있다면
제 스스로 뜨거워 질 수 만 있다면
저물 녘,
문득, 다시 그녀 앞에 앉는다.
훅! 숨이 멎는다.
진땀이 뚝뚝 떨어진다.
시작메모
헤매다가 만나는 박하사탕
헤매고 있을 때는 헤매고 있는 것을 모른다.
헤매는 것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어느 날 문득,
헤맸다고 생각하는 순간 헤매는 것에서 벗어난 경험이 있다.
그때.
머릿속에 박하사탕처럼 퍼지는 화한 청량함과 환해지는 세상을 문득 본다.
참으로 많이 헤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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