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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호/이 시인을 다시 본다/박동억/파놉티곤을 내파하는 유희로서의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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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호/이 시인을 다시 본다/박동억/파놉티곤을 내파하는 유희로서의 시
박동억
파놉티곤을 내파하는 유희로서의 시
파놉티콘은 ‘모두’를 뜻하는 ‘pan’과 ‘본다’를 뜻하는 ‘opction’을 합성한 것이다. 번역하면 ‘모두 다 본다’는 뜻이다. 이 파놉티콘은 영국의 철학자 제레미 벤담이 죄수를 효과적으로 감시할 목적으로 고안한 원형감옥을 지칭한다. 이 감옥은 중앙의 원형광간에 높은 감시탑을 세우고, 중앙 감시탑 바깥의 원둘레를 따라 죄수들의 방을 만들도록 설계되었다. 또 중앙의 감시탑은 늘 어둡게 하고, 죄수의 방은 밝게 하여 중앙에서 감시하는 감시자의 시선이 어디로 향하는지를 죄수들이 알 수 없도록 되어 있다. 이렇게 되면 죄수들은 자신들이 늘 감시받고 있다는 느낌을 가지게 되고 결국은 죄수들이 규율과 감시를 내면화해서 스스로를 감시하게 된다는 것이다. 벤담에게서 파놉티콘은 어느 정도 자신의 공리주의적 체계 내의 발전적인 고안물이었으나, 짐멜 파브, 그리고 푸코에 이르면서 파놉티콘은 근대권력 작동체계에 대한 상징물로 기능하게 되었다. 이후 정보사회의 발전에 따라 정보파놉티콘, 슈퍼 파놉티콘, 그리고 역파놉피콘과 시놉티콘으로 재생산되면서 현대사회의 규율사회, 통제사회적 성격을 설명하는 이론으로 발전해 왔다.
이 이론들의 근저에 있는 것은 ‘바라봄’과 ‘보임’이라는 두 대립항이다. 주체의 지위를 선취하기 위한 바라보는 자와 보이는 자 사이의 동역학을 통해, 현대사회의 권력의 작동기제를 설명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 ‘바라봄’과 ‘보임’이 빚어내는 동역학의 중심축으로 기능하는 것은 바로 ‘시선’이다. 천선자 시인의 시 ‘파놉티콘’ 연작은 엄밀히 말하자면 근대에서 현대에 이르는 파놉티콘 체제 전부를 아우르는 상황을 지칭하고 있는 것이겠지만, 시인의 시에서 주목하고 있는 것은 파놉티콘에서 핵심으로 기능하는 감시, 그 중에서도 감시하는 ‘시선’에 대한 시적 사유이며, 근본적으로 타자에 대한 시적 사유라고 할 수 있다.
뚝배기 소머리국밥을 후후 분다.
매운 깍두기 숟가락에 올리며 카메라를 본다.
카메라도 내 얼굴에 초점을 맞추고 눈알을 굴린다.
숟가락은 입으로 가고 눈은 카메라와 싸운다.
눈덩어리 커다랗게 만들어 무작정 던진다.
거지발싸게 같은 놈, 앞뒤 가리지 않는다.
집채만 한 덩어리가 머리통을 맞힌다. 웃는다.
째려보는 것 좀 봐, 금방이라도 펀치를 날릴 기세네.
달래고 어르고 치고 빠지는 솜씨가 보통 아니다.
전략을 바꾸어 주먹으로 턱을 한 방 날린다.
앞차기, 옆차기, 엎어치기, 돌려차기고 마구 팬다.
다리가 풀리자 쌍코피가 터져 코허리로 흐른다.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아 중얼거리며 노려본다.
괘씸한 카메라 국밥에 말아 허겁지겁 먹어치운다.
카드로 국밥 값을 지불하고 돌아 나오는데,
등 뒤에서 웃는 눈동자, 나의 몽타주를 그리고 있다.
─「파놉티콘·1-cctv」 전문
파놉티콘 1에는 CCTV가 등장한다. 폐쇄회로 텔레비전이 약어인 cctv는 현대 감시체계를 설명하는 데 대표적인 사물의 하나다. 그것은 언제 어디서나 대중을 감시하고 있으며 대중은 그 감시체계에서 한 발짝도 벗어날 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홀로 있어도 홀로 있을 수 없는 상황을 cctv는 언제나 구현하고 있는 것이다. 다양한 용도로 설치된 이 cctv는 정확히는 사물에 해당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 사물의 너머에는 우리의 행동을 관찰하는 시선이 존재한다. 엄밀히 말하자면 사물화된 시선인 것이다. 대중들은 평소에는 그 사물화된 시선에 대해 무감각한 채로 살아간다. 그것은 어떤 위기상황이거나 사후확인이 필요한 경우에만 일종의 목격자에 해당하는 시선으로 인지되는 것이다.
이 시선은 사르트르에 의하면 사물화된 타자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주체가 있는 장소에 또 하나의 다른 존재가 출현했을 때 주체는 그 존재를 타자로서 응시한다. 하지만 그 응시는 단순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내가 중심으로 있던 세계의 사물들이 타자라는 한 극점을 향해 나로부터 멀어져 가는 상황을 유발한다. 그 결과 나는 세계의 중심으로서의 위치를 상실하게 된다. 이는 나의 세계 내에서 발생한 ‘하나의 작은 균열’로 규정되며, 나의 세계를 구성했던 모든 존재들이 그 균열을 통해 타자에게로 빠져나가는 것처럼 진행된다. 그리하여 주체는 중심적 지위를 상실하게 된다. 하지만, 내가 타자를 인간이 아닌 다른 사물로 파악할 때, 그 출혈은 정지되고 모든 상태는 원상태로 회복될 수 있다.
그러나 바라보는 자가 아니라 바라보이는 자가 되었을 때 그것은 다른 양상을 띤다. 앞의 경우에는 내출혈의 응고와 사태의 회복이 가능하지만, 반대의 경우에는 불가능하다. 나를 바라보는 자 쪽을 향해 나의 세계는 끝없이 유출되는 것이다. 그것은 내가 중심으로 있던 세계가 완전히 와해되는 것을 의미한다. 바라보는 자가 주체가 되어 새로이 형성된 세계가 내가 중심이 되어 형성되었던 첫 번째 세계 위에 겹쳐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중심으로서의 위치를 상실하게 되고, 단순한 객체가 되어 버린다. 타자에 의해 거리를 부여받는 사물의 위치로 전락해 버리는 것이다. 나는 스스로의 가능성이 아니라 누군가의 가능성에 의해 좌우되는 존재가 되어 버리고, 스스로를 직접 산출해낼 수 없는 것이다. 사르트르에 의하면 이는 타인의 카드를 알 수 없는 카드놀이의 상황과 유사한 것이다. 자신의 보는 행위를 통해 주체중심적 세계에 변형을 가하고, 타자가 중심이 된 세계에서의 거리를 주체에게 체험시키며, 나의 가능성을 응고시키는 것, 객체화되고 즉자화된 나에게 그 자신의 무한한 자유와 주체로서의 모습을 체험시키는 것이다. 즉 타자는 ‘나를 바라보는 자’인 것이다.
천선자 시인의 시 「파놉티콘·1-cctv」에 드러나는 것은 바라보는 자와 바라보이는 자 사이의 힘겨운 갈등을 보여주고 있다. 홀로 식사를 하는 순간까지도 cctv는 우리를 끝없이 응시하고 있다. 그것은 사르트르식으로 말하면 주체의 중심적 지위를 약탈하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카메라는 단순한 사물로 인식하기에는 이미 생활 속에 너무 깊숙이 들어와 우리의 생활을 점령해 버린 지 오래다. 그것은 사물화된 시선을 넘어서 일종의 살아있는 시선으로 우리의 존재를 살피고 있다. “소머리 국밥을 후후” 불고, “매운 깍두기 숟가락에 올리며” 가장 먼저 느끼는 것은 식사에 대한 만족감이 아니라 기대감이 아니라, “카메라”라는 시선에 대한 의식인 것이다. 그 의식과 함께 주체는 분열된다. “숟가락은 입으로 가고 눈은 카메라와 싸우”는 것이다. 그 분열을 조장한 것이 바로 카메라의 시선이며 그 시선에 대해 주체는 저항한다. ‘싸우고 던지고, 마구 패고, 쌍코피를 터뜨리고’ 난 후에, ‘국밥에 말아 허겁지겁 먹어치우’기까지 한다. 무차별적인 ‘시선’인 cctv에 대한 주체의 저항은 언뜻 승리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카드로 국밥값을 지불하고 돌아나오는데/등 뒤에서 웃는 눈동자, 나의 몽타주를 그리고 있다”에서 역전되는 양상을 보인다. 결국 cctv는 나의 그 저항마저 하나의 몽타주로 만들어 버린다. 이는 감시체계로 작동하는 권력에 대한 우리의 의식이 본질적으로는 수치심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분노는 수치심에서 유발되는 행위였던 것이며 급기야 ‘시선’은 주체의 저항마저도 수치심으로 추문화시켜 버리고 만다.
주차카드를 넣고 기다린다.
요금은 만 삼천 원입니다. 빤히 쳐다본다.
지갑을 찾고 있는데 소리를 버럭 지른다.
어처구니없는 기계를 씩씩거리며 노려본다.
빨리빨리 넣으라고 고래고래 소리 지른다.
벌건 눈알을 이리저리 돌리며 꼼짝하지 않는다.
정확하게 여섯 시간 삼십 분을 따라다닌 놈,
지하 삼층에 주차를 하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대갓집에서 너비아니, 동그래죽, 민어구이를 먹고,
바람에 흔들리던 강물이 커핏잔 속으로 뛰어들고,
강물에 투신한 햇살을 건져 올리며 나누는 잡담,
통지기 같은 앞집여자가 불풍나게 드나들며 외간남자,
아우르다 들켜 머리채 잡히고 신발 들고 도망갔다는 애기,
뒤로 넘어지고 코가 비뚤어지고 배꼽이 빠진 광경,
마트에서 얌통머리 없이 시식코너만 바닥내던 광경,
공중화장실까지 몰래 훔쳐보는 엉큼대장, 이 나쁜 놈,
그림자도 없는 귀신 같은 놈, 숨도 쉬지 않은 놈,
온몸에 눈을 달고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고 있다.
─「파놉티콘·2-무인 정산기」 전문
인용 시 무인정산기에서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주차카드를 넣고 기다릴 때, ‘시선’은 느닷없이 등장한다. 그리고 “빤히 쳐다본다”. 이 시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바로 이 “빤히 쳐다보”는 시선일 것이다. 타자의 시선에 느닷없이 노출되고 그 노출이 한동안 지속될 때, 주체는 벌거벗겨지고 와해되고 만다. 그 시선에 결박된 화자는 결국 주체의 지위를 상실하고, 단순한 객체로 전락해 버린다. “소리를 버럭 지르”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일도 소용없다. 끝내 주체의 대응은 단지 “씩씩거리며 노려보는”일 뿐이다. 그런 식으로 저항한다 해도 ‘시선’은 꼼짝하지 않고 당당하게 “벌건 눈알을 이리저리 돌리며 꼼짝하지 않는다”.
시적 주체는 그 ‘시선’을 의식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여섯 시간 삼십 분을 따라다닌”에서 알 수 있듯이 그 시선에 대한 의식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무의미한 의식일 뿐이다. 내가 의식하고 있는 동안, 즉 주차를 하고, 식사를 하고 휴식을 취하는 동안에도 주체의 의지나 저항과는 상관없이 시선은 주체를 따라 다닌다. 그리고 주체의 행위와 대화 모두를 노출시킨다. 심지어 주체가 숨기고 싶어 하는 행위와 말들, 그리고 육체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노출시켜 버리는 것이다. 시선 앞에서 주체는 속수무책이다. 중심으로서의 고유성과 단독성은 시선에 의해서, 시선 앞에서 낱낱이 추문으로 발가벗겨지고야 만다. 그것은 주체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주체와 주변의 삶 전부에 해당된다. 모든 것이 전시된다. 은폐되어야 할 것이 드러나 버릴 때 느끼는 당혹감에 대한 배려 따위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 시선에 대해 주체는 앞의 시에서와 마찬가지로 “증오”의 태도를 취할 수밖에는 없다.
이러한 증오의 태도는 사르트르에 의하면 타자에 대해 주체가 대응하는 제 3의 태도에 해당하는 것이다. 타자를 내 안으로 흡수하는 경우, 즉 사랑, 언어 마조히즘의 형태,에도 실패하고, 타자를 객체화하는 태도, 사디즘, 성적욕망, 무관심 증오 등에도 실패한 후, 갈등과 투쟁의 반복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상황에 이르러 급기야 살해하려는 기도에 해당된다. 그러나 타자를 살해한다고 타자에게 점령당했던 나의 모습이 사라지지 않으므로 이 태도 또한 실패라고 할 수 있다. 천선자 시의 주체는 바로 이 실패의 지점에서 실패 자체로 저항하는 시적 태도를 취하고 있다. 결국 천선자 시인의 시에서 갈등과 투쟁은 존재론적 필연의 사태인 것이다. 그 갈등과 투쟁만이 타자 앞에서 타자의 의도대로 주체를 연기하고, 포즈를 취하는 희극적 태도를 취하지 않도록 만들 수 있다. 이렇게 나타나는 시선에 대한 저항의 포즈는, 시를 통해 시선 그 자체를 전시하는 효과를 발휘하게 된다. cctv라는 물질적 매체로서의 사물화가 아니라, cctv 뒤에 존재하는 시선, 사르트르가 이야기한 바, ‘깊이를 알 수 없는 얼어붙은 호수, 순수한 어둠 그 자체’를 사물화하고 전시하는 효과를 보여줌으로써 시선과 주체, 타자와 주체 사이의 대등하고 팽팽한 시적 긴장을 드러내는 것이다. 하지만 시인의 신작시 세 편은 그와는 조금 다른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타자는 과연 일방적이고 견고한 존재인가. 그 시선 앞에서 주체는 방어적인 태도로 분노하고 갈등하기만 해야 하는가를 묻는다. 우선 타자들이 일방적 인 자기중심적 주체일 수 있는가에 대한 물음을 제기한다.
이빨이 얼마나 센지 앵무새가 사람의 이빨을 먹는다.
싸라기밥만 먹었는지 말꼬리 물고 늘어지기 일등이다.
평생 새끼줄만 꼬았는지 말꼬리에 말꼬리를 뱅뱅 꼰다.
무쇠이빨도 강철이빨도 맥을 못 추고 울며불며 먹힌다.
─「잘난 그녀」
시 「잘난 그녀」는 말꼬리 잡기를 좋아하는 한 여자에 대한 가벼운 우화로 읽힌다. 하지만 이 짧은 시 속에 숨어 있는 것은 관계 속 타자의 연쇄적 그물망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시의 첫행 “이빨이 얼마나 센지 앵무새가 사람의 이빨을 먹는다”에서 알 수 있다. 잘 난 그녀는 어느 여인이 아니라 앵무새로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 앵무새는 사람의 말을 흉내낼 줄 아는 새다. 그 여인의 주체성을 타자화해 버린다. 말꼬리잡기의 기원은 그녀가 아니라 타자라는 것이며, 결국 타자에게서 시작되어 타자의 것으로 회귀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녀는 잘나지 않았다. 잘 난 것은 그녀가 아니라 어떤 타자인 것이다. 이는 어떤 주체도 자신의 말이 아니라 타자의 말을 반복할 뿐이라는 전언이 숨어 있다. 결국 타자화 되어 버린 주체의 드러남에 대한 우화인 것이다.
강태공이 울고 가는 그녀의 솜씨가 맥을 못 춘다. 얼뜨기, 팔푼이, 새물청어 한 마리 잡지 못하고, 좀팽이, 끄나풀을 잡고 분풀이 하다가 중얼중얼, 정신 줄 놓지 않으려면 썩은 동아줄이라도 잡아야지. 암, 지나가는 날치꾼에게 참새그물을 뒤집어씌우고, 풍각쟁이 따라다니며 노래와 춤으로 휘몰아쳐서 얼간이 한 마리를 낚아 어항 속에 넣는다. 넌 나에게 간택을 받은 놈이여, 날이며 날마다 오는 장돌뱅이가 아니란 말이지, 무술이가 임금님의 간택을 받은 거여, 오늘부터 너의 이름은 얼간이, 마음에 들면 얼른 손들어. 왜 마음에 안 드나. 오무래미, 에꾸눈으로 째려보면 어쩔래,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고. 가자미의 사촌이라서 그러니 이해하라고. 내가 너를 부리는 건지, 네가 나를 부리는 건지, 도무지 알 수 없단 말이야. 알다가도 모를 세상, 물을 조금씩 덜어내고 수초더미 속에 반짝이는 두 눈을 숨겨두고 어항 속을 나온다. 그물바늘로 그물귀를 잡아당겨서 수초더미를 조금씩 건져 올리고 산소호스를 뺀다. 얼간이가 마른 수초숲을 헤매다가 아가미 숨을 쉬며 그녀를 올려다본다. 그녀가 히죽히죽 웃으며 던지는 말, 너의 목숨은 파리 목숨이여.
* 부동산 용어의 유래, 스페인의 화폐 단위인 ‘릴’에서 찾아 볼 수 있는데, ‘릴’의 본의는 ‘국왕의 것’(국가의 것)이라는 의미로 스페인이 점령한 미국의 캘리포니아에 부동산의 뜻을 ‘릴’이라 부름으로써 스페인이 점령한 땅이라는 의미를 가졌었다.
─「릴reeal·6-부동산사기꾼」
시 「릴」에는 낚시를 통해 낚은 물고기를 어항에 넣어주는 일련의 과정이 드러나 있다. 주체는 낚시를 하러 가서 결국 물고기 한 마리를 낚아 어항에 넣었다. 그리고 그 물고기를 얼간이라고 부른다. 얼간이라고 부른 이유는 시 속의 “그녀”에게 잡힐 만큼 어리숙하다는 의미일 것이다. 하지만 시 속의 그녀는 그 얼간이에게 “넌 나에게 간택을 받은 놈이여”라고 말한다. 잡힌 것이 아니라 선택되었다는 뜻이다. 이는 속임의 행위에 해당한다. 시에 따르면 이 얼간이가 잡힌, 혹은 선택된 이유는 그녀의 실력과는 상관없는 것이다. “내가 너를 부리는 건지, 네가 나를 부리는 건지, 도무지 알 수 없단 말이야. 알다가도 모를 세상”이기 때문이다. 거기서 “그녀”는 “물을 조금씩 덜어내고 수초더미 속에 반짝이는 두 눈을 숨겨두고”, “어항속을 나온다”. 이 시에서 주목해야 되는 것은 “어항 속을 나온다”일 것이다. 어항을 꾸미는 과정에서 일종의 역전이 일어난 것이다. 어항 속에서 나온 것이 “그녀”가 아니라 “얼간이”일 수 있고, “수초더미 속에 반짝이는 두 눈”은 그러므로 “얼간이”의 것이 아니라 “그녀”의 것일 수 있다. 그래서일까. “얼간이가 마른 수초숲을 헤메다가 아가미 숨을 쉬며 그녀를 올려다 보”는 상황은 이미 역전된 상황이다. 결국 그녀는 어느 사이 어항안에 들어가 있고, “어항 밖에서 히죽히죽 웃으며” 말을 던지는 존재는 “얼간이”인 것이다. 공간의 역전과 주체의 역전이 동시에 일어나 버렸다. 어항 밖과 어항 안, 바라보는 존재와 바라보이는 존재의 역전이 바로 “알다가도 모를 세상”에서 일어나는 ‘알다가도 모를 일’인 것이다.
머리, 어깨, 무릎, 발, 삭신에 삭풍이 불어 잠이 달아나고 찾아온 말똥구리 삼신이 삐걱거리는 뼈 마디마디에 구멍을 파며 난리굿이다. 굿거리장단에 맞추랴, 새마치 장단에 맞추랴. 동풍, 서풍, 북풍지대까지 온 도가니를 끌고 한의원으로 간다. 어머님 어떻게 오셨어요, 어머님 어디가 아프세요. 말을 할 때마다 한 옥타브씩 올라가는 코맹맹이 한의사 선생님은 금강산에서 약초를 캐고, 양다리 양팔에 수십 개의 침을 꽂고 고슴도치가 되어 물리치료실로 가는 엘리베이터를 탄다. 코맹맹이 한의사 선생님이 엘리베이터걸이 되어 안내를 한다. 안녕하십니까 고객님, 도레미파. 이곳은 수선가게가 있는 구층입니다. 내리실 분은 앞으로 나오시겠습니까, 도레미파. 어깨를 잡는 옥타브를 뒤로 남기고 복도 끝에 있는 수선가게로 간다. 문이 열리고 토깽이가 깡충깡충 달려와 인사를 한다. 토깽이의 귀를 잡아당겨 악수를 하다가 바늘을 보고 기절한다. 바느질하는 토깽이의 손끝에 목덜미가 잡힌 채, 안녕하십니까 도레미파. 코맹맹이 엘리베이터걸의 옥타브가 달팽이관을 흔들어도 꾸벅꾸벅 졸다 의자 모서리에 머리를 박는다. 수선을 마친 가시를 매만지며 서리병아리, 자웅눈이, 장구머리와 손잡고 지하 이층에 있는 구내식당으로 달려간다. 귓가에 남은 코맹맹이 엘리베이터걸이 압력솥을 몰고 밥 냄새 솔솔 나는 구간을 달리고, 나뭇가지 위에서 나무늘보가 세월아 네월아 씨름하는 사이 코 박고 엎드려서 굴을 판다. 판다, 판다, 판다곰과 굴을 판다. 밤낮 굴을 파다가 도착한 곳이 평양냉면으로 유명한 옥류관이다. 머리를 쏘옥 내밀고 냉면을 먹는 사람들을 향해서 손을 흔들며 여러분 물꼬를 트려고 왔어요, 사람이 우선입니다.
─「고슴도치와 엘리베이터걸」
몸이 아픈 화자가 한의원에서 옥류관에 이르게 되는 여정을 위트있게 전개하고 있는 시다. 이 시에서 한의원으로 가는 주체는 몸이 아픈 사람이 아니라 “말똥구리”다. “말똥구리”는 화자를 이끌고 한의원으로 가서 온 몸에 침을 꽃고 “고슴도치”가 된다. 어쩌면 화자를 고슴도치로 변화시켜 버렸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상황의 주체가 사람이 아니라 “말똥구리”라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시에 전개되는 상황은 “말똥구리”의 시각으로 바라본 세계를 드러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 세계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연상하게 한다. “한의사”는 “금강산에서 약초를 캐다가”, “엘리베이터걸”로 변해 버리고, 한의원 건물의 구층은 “수선가게”이며, “고슴도치의 가시”는 그곳에서 수선된다. 또 거기서 만나는 존재들은 사람이 아니라 “토끼, 서리병아리, 자웅눈이, 장구머리, 나무늘보” 들이다. 거기서 화자 혹은 “말똥구리”는 “판다”와 함께 굴을 파다가 “평양냉면으로 유명한 옥류관”에 도착한다. 도무지 알 수 없는 이 세계는 무엇일까. 마지막 행 “사람이 우선입니다”를 통해 짐작해 보자면, 어떤 현실에 대한 알레고리일 수도 있겠지만, 중요한 것은 이 시 속의 세계는 앞의 시 「릴」의 한 구절처럼 “알다가도 모를 세상”이자, “알다가도 모를 일”이 펼쳐지는 세계임은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러므로 아픔과 몸, 동물과 사람, 주체와 타자가 언제든 자리를 바꿀 수 있는 세계인 동시에, 스스로가 주체인지 타자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세계인 것이다.
다시 처음의 이야기로 돌아가서 cctv를 생각해 보자. 시인의 기발표작 두 편을 분석하면서 시선에 대한 주체의 분노와 저항으로서의 시적 긴장을 읽을 수 있다고 썼다. 그렇다면 신작의 세계는 어떤 세계일까. 향후 천선자 시인의 시적 지향의 전부를 이 세편에서 가늠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 분노와 저항이 어떤 방향으로 향하게 될지에 대해서는 조금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아마 그 방향은 규율과 통제의 세계에서 저항하는 존재가 아니라, ‘유희’의 세계에서 ‘유희’하는 존재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보는 자와 보이는 자, 주체와 타자의 경계를 해체하며 넘나들 수 있는 존재는 유희하는 존재밖에는 없을 것이다. 앞에서 파놉티콘을 “모두 다 본다”는 뜻으로 번역된다고 말한 바 있다. 이를 다른 의미에서 다시 적용할 수 있지 않을까. ‘모두 다 보는’ 파놉티콘의 ‘시선’은 일방적이다. 하지만 또 다른 시선도 가능할 것 같다. 자유로우며, 주체인 동시에 타자이고, 그 역도 가능한 시선으로서 ‘모두 다 보는’ 것 또한 가능하지 않을까. 그럴 때 주체와 타자는 일방적인 바라봄과 보임의 관계 속에 있지 않으며, 서로 자리를 바꾸며 외부인 동시에 내부가 되기도 하는 자유로운 존재다. 시인은 이 유희하는 존재를 위한 유희의 세계를 시 속에 펼쳐놓은 것은 아닐까. 그 세계는 뫼비우스의 띠와도 같은 세계다. 일방적인 시선이 한 방향으로 존재하는 세계가 아니라 유희하는 시선이 다양한 방향으로 존재하는 세계다. 그것은 혼란이 아니라 자유이며, 자유인 동시에 또 혼란이다. 다시 카메라를 생각해 보자. 시인이 펼쳐놓을 새로운 세계에서는 이제 카메라 뒤의 존재가 카메라의 방향을 결정하지 않는다. 카메라 스스로 방향을 정하는 것이다. 아니 유희한다. 그럴 때 어느 날 카메라와 나, 카메라와 뒤편의 존재 또는, 뒤편의 존재와 나가 만나는 순간이 가능해지고, 세계의 갱신이 가능해진다. 생각해 보면 시와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의 관계 또한 뫼비우스의 띠와 같은 것 아닌가. 신작시에서 보여 준 천선자 시인의 새로운 시적 갱신이 규율과 통제, 폭력과 분노로 얼룩진 세계를 내파하고 갱신하게 되는 순간이 오기를 기다려 본다.
*박동억 2016년 <중앙일보> 중앙신인문학상 평론 부분 당선. 현재 숭실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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