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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호/서평/정치산/일상의 언어로 시를 엮는 사람―고창영 『등을 밀어 준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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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호/서평/정치산/일상의 언어로 시를 엮는 사람―고창영 『등을 밀어 준 사람』
정치산
일상의 언어로 시를 엮는 사람
―고창영 『등을 밀어 준 사람』
시인은 그의 주변이나 보편적 일상을 시 세계로 끌고 와 펼쳐 놓는다. 보편성을 추구하며 누구나 경험하는 일상이나 일상적인 언어를 시의 언어로 끌어온다. 시인 본인이 살아가는 본래 삶의 모습을 꿋꿋하게 써내려 간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처럼 언제 어디서든 인간에게 일어날 법한,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일을 잘 그려가고 있다.
고창영 시인은 다양한 일들을 펼치고 활동하고 있는 시인이다. 한때는 방송국 구성작가였고, 또 한때는 박경리문학공원의 소장으로 거의 버려져 있던 곳을 전국의 명소로 가꾸어 놓았고 모두가 안 된다고 하던 동계올림픽을 성공적으로 개최할 수 있는 밑거름을 만든 사람이다.
그는 반짝이는 아이디어와 추진력을 갖추고 있는 반면 상처를 잘 받는 여린 성격을 갖고 있다. 또한 따스한 시선으로 사람들을 대하고 사소한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실천한다. 그러면서도 사소한 것에 상처 받는다.
시인은 IMF 이후 한 가정의 가장이요, 엄마요, 며느리요, 아내로서 일인 다역의 삶을 꿋꿋하게 걸어왔다. 힘겹고, 외롭고 서러웠던 일들을 꿋꿋이 견뎌내며 단단해지고 초연해지면서 세상을 대하는 마음도 넓고 깊어졌다.
그러한 시인의 면면이 시집에도 잘 나타나 있다. 이러한 시인의 감성이 담겨 있는 시편들을 살펴보기로 하자.
그것은 손끝이었네
손가락 끝
사알짝
댄 듯 만 듯
무너지듯 주저앉아
아이처럼
서럽게 울고 싶던
숨막히는 오르막길
그 산을 넘은 힘은
누군가의 손끝이었네
고요히 등 뒤에서
살짝만 밀어주던
─『등을 밀어준 사람 - 산티아고 오르막길에서』 전문
시인이 산티아고 순례길을 떠났을 때는 심신이 지치고 힘들었을 때이다. 주변 사람과 주변 환경에 대한 실망으로 몸과 마음이 지쳐서 더 이상 견디기 힘들었을 때 산티아고 순례길을 떠났었다. 시인은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새로운 경험과 깨달음을 얻는다. 숨이 턱에 차오르는 오르막길에서 주저앉아 울고 싶은 그 길에서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누군가 사알짝 댄 듯 만 듯 등을 밀어주는 그 손 끝의 힘으로 숨 막히는 오르막을 넘은 것이다. 단지 손끝을 살짝 대어준 것인데 그것이 얼마나 큰 힘이 되었는가를 이야기한다. 그 작은 힘이 산을 넘고 삶의 오르막을 넘을 수 있게 해주었다는 깨달음에서 그러한 힘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이야기한다.
시인은 걷는 것을 좋아한다. 운동을 한다는 핑계도 있지만 걸으면서 느껴지는 바람과 하늘과 나무와 풀과 꽃들을 보며 이야기 나눌 수 있는 시간을 좋아한다. 고창영 시인의 시에 나타나는 시들은 시적 자아가 처한 실질적인 삶의 장소이다. 흔히 일어날 수 있는 상황들에 대한 실질적으로 경험한 것들에 대한 것들이 시집 전반에 나타나 있다. 다음의 시 「하필이면 사월에」는 삼십여 년 만에 만난 여고 동창생과의 해후에 관한 이야기다. 누구나 어디서나 처할 수 있는 당황스러웠을 풍경을 시인은 안타까워 하면서도 담담히 그려내고 있다.
하필이면 사월에
거리 가득 벚꽃이 팝콘 튀듯 쏟아지는 눈부신 길가에서
제 나이보다 십 년은 더 들어 보이는
여고 동창의 식혜 수레 앞에서
이게 얼마 만이냐고
그동안 어디서 어떻게 살았느냐고
길게 묻기도 전에
사니까 살아지더라
그렇게 살아지더라
인생 참 별거 아니더라
어제 보고 헤어진 친구처럼
삼십 년을 한 줄 쉰 목소리로
담담하게 법문처럼 되뇌이면서
기여코 두 손에 꼭 쥐어주고 간 식혜 잔에는
벚꽃잎 같은 밥알이 하얗게 송송 솟아올랐다
순식간에
거짓말처럼 꽃길 속으로 사라진
늙어버린 여고생의 뒷모습을
쫓아가던 눈길이
야무진 봄바람에 길을 잃고
일제히 허공 속을 춤추듯 비행하는
수만 송이 꽃잎에 멈출 즈음
사니까 살아지더라
그렇게 살아지더라던
고단했을 그녀의 시간이
벚꽃이 별꽃으로 저무는 꽃길 속으로
아찔하게 사라졌다
그렇게 사라져버렸다
─『하필이면 사월에』 전문
시인은 그 친구를 보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본인도 힘들고 어려운 시절을 겪으며 삶을 살아내고 있기에 더욱 그 모습이 사진처럼 남아 있을 것이다. 어떻게 살았냐고 뭐라 이야기도 하기 전에 먼저 ‘사니까 살아지더라/그렇게 살아지더라’고 하는 그녀의 말 앞에 더 이상 할 말을 잃고 그녀가 ‘쥐어주고 간 식혜잔에 벚꽃잎 같’이 송송 떠오르는 밥알처럼 떠오르던 질문들을 삼켰으리라. 오랜만에 만나 반가운 마음을 채 전하기도 전에 ‘거짓말처럼 꽃길 속으로 사라진/늙어버린 여고생의 뒷모습’이 ‘아찔하게 사라’져 버린 친구의 고단한 세월을 생각하며 시인의 마음도 아려와 한 잔의 식혜를 오래도록 들고 서 있었을 것이다.
하이데거는 인간은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세계에 내던져진 존재이고, 이 같은 상황의 끝은 ‘궁극적 무無’로서의 죽음이라는 사실에 대한 존재론적 반응이 불안이라고 파악했다. 내가 죽음을 통해 없어진다는 생각은 내가 집착하고 있는 세상의 모든 것을 무가치하게 만들고, 자신의 고유한 존재와 내면으로 만나게 한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불안은 죽음에 대한 자각을 바탕으로 진정한 자신을 찾아 나서게 하는 원동력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고, 바로 이 진정한 자신을 찾는 삶이 바로 본래적 삶이며 본래적 태도라고 한다. 누구나 삶아가면서 불안을 겪는다. 그러한 불안이 스르로를 무너뜨리는 경우도 있고 스스로를 다지며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원동력을 만들 수도 있다. 시인은 후자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앞이 보이지 않는 불안을 겪으면서도 늘 긍정적인 에너지와 열정으로 삶을 살아내고 그 삶을 또 반성하고 새로운 길로 나아간다.
시인 윤동주를 읽는다
일찍이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운 것이 너무나 많았다
똥이 무서워 피하면서
더러워서 피한다고 했다
겨 묻은 개를 흉봤고
우물에 가서 숭늉을 찾았고
소귀에 경을 읽기도 했다
남의 떡이 커 보였고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린 날도 더러 있었고
박힌돌 빼낸 굴러온 돌을
오래 원망하였다
물밖으로 살아 나와
내 봇짐 내노라 찾았고
수레는 요란했다
열 번쯤 찍기도 전에 넘어갔고
오르지 못할 나무를 자꾸 쳐다보았으며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알아줬으면 했고
여기저기 잔뜩 우물을 파고 살았다
비뚤어지지도 않은 입으로
용기 있게 말을 바로 하지 못했고
장 단 집보다
말 단 집을 좋아했다
오늘 밤에도
가을은 깊어가고
별은 바람에 스치울텐데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살고 있는가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하고 있는가
─『반성문』 전문
「반성문」은 윤동주 시인의 「서시」를 반어적인 표현으로 또는 솔직한 마음을 담아 시인 자신의 상황을 이야기한다.
고창영 시인은 참으로 올곧은 사람이다. 그가 좀 더 정치적이거나 아부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면 벌써 많은 이들이 탐내는 자리에 가 있었으리라 여겨진다. 그런 그가 조금은 현실적인 생각을 하게 된 것 같다. 2018 평창동계올림픽 성공개최를 위해 6년이란 시간 동안 오로지 올림픽 성공개최를 위해 강원도 전역을 뛰어다니더니 그의 뿔도 둥글어졌다. 수그리지 않고 거침없이 받아대던 성격도 부드러워지고 성격도 부드럽게 다듬어졌다. 이 시는 그런 그의 생각들이 담겨 있고 그러한 자신의 마음을 반어적인 표현으로 나타내기도 하였다. 또 한편으로는 솔직한 마음을 담아 시인 자신의 상황을 펼쳐 놓은 것이리라 여겨진다. 고창영 시인은 자신이 맡은 몫의 일을 남들보다 몇 배는 더 잘 해낸다. 그래서 많은 이들의 질투와 시기를 받기도 하고 또 많은 이들에게 인정을 받기도 한다.
그의 시 「몫」에서는 그가 그동안 꾸려왔던 많은 일에 대한 생각들이 담겨 있다.
꽃씨를 묻는 몫이 있고
싹을 틔우는 몫이 있고
줄기를 기르는 몫이 있다
꽃이 피는 것을 보는 몫이 있고
탐스러운 열매를 따는 몫이
따로 있다
씨앗을 묻었다고
꽃을 보고 열매를 딸 수 없으니
억울하고 서러울 것도 없어라
대개 열매를 거두는 이는
처음 꽃씨를 묻었던 시작과
싹을 틔우느라 잠 못든 당신과
줄기를 튼튼히 키워낸 그대를
기억하지 못하리라
생각도 못하리라
그저 그러려니
세상이 그러려니
역사도 그렇게 흘러흘러 왔느니
누구는 꽃씨를 묻으며 기뻤고
누군가는 싹을 틔우며 행복했고
누구는 기르는 일로 만족했으니
꽃이 피거든
열매를 맺거든
그저 축복하라
무심히 미소하라
꽃씨를 묻는 설레임의 기쁨을 누렸고
싹이 트는 행복감에 잠 못 들었고
늠름하게 잘 자라는 줄기를 키우며 만족했으니
─『몫』전문
이 시를 보면서 고창영 시인이 걸어왔던 길에서 느꼈던 생각들이 보인다. 박경리문학공원에서의 몇 년은 꽃씨를 묻고 싹을 틔우고 길러내는 과정이었으리라 생각된다. 탐스런 열매는 보지 못했다. 다 키워 놓은 열매는 다른 사람의 몫이 되어 분노하고 억울했던 적도 있었는데, 박힌 돌 빼낸 굴러온 돌을 오래 원망했다고 반성문을 통해 고백하면서 스스로의 마음을 덜어내고 비우면서 어느새 넓고 깊은 마음으로 초연해진 모습을 보인다.
시인이 걷고 있는 길, 그 길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그에게 맡겨지는「몫」을 잘 해 나갈 수 있게 힘을 주는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을 통해 시인은 더 단단하고 올곧게 세상에 나가는 힘을 얻는다.
길 위에서 길을 그리워 했다
앞길이 훤히 보이지 않는 굴곡과
오르막 내리막길이 자주 교차하는
막막한 날들이 많았던 길목에서
어디를 가야하나
어떻게 살아야하나
불안은 아득한 산처럼
눈 앞을 가로막고 서 있었다
때로 맨발로 걷는 동안
호로 서럽게 울었던 눈물들이
작은 들꽃으로 바람에 흔들렸다
오십,
누군가는 그 나이에 바다를 보았다는
전설같은 이야기가 들렸었고
나는 길을 찾아 떠났다
다시
꾸리라면 처음부터 내려놓고
버렸어야 할 삶의 짐
여기까지 끌고 온 생의 무게는 줄어들지 않았다
내가 선택한
벗어도 좋을짐과 버릴수 없던 짐들을 지고
하루라는 매일을 걷는 동안
반도 넘게 와 버렸다
돌아보니
등 떠밀려 온 시간도
내가 끌고 온 날들도
혼자는 아니었다
때로 서러움도 상처도 미움과 분노까지도
인생을 떠 받치는 지지대로
한 몫 했었다
길을 나섰다
길을 찾는다
멈춰 선 채로는 볼 수 없었을 아득한 거리가
한 걸음씩 걸음을 떼어놓을 때마다
가깝게 다가선다
앞서 걸어간 수많은 누군가가
남모르게 흘렸을 눈물들이
위로를 건네는 주먹막한 별들이되어
내가 걷고 난 길 뒤에서
밤새 이슬로 꽃처럼 쏟아지겠다
─『길 위에서 길을 그리워 했다』 전문
하이데거는 공동존재에 대해 이야기 하면서 공동체 삶 속에서 우리는 본래적인 삶을 잃어버리고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면서 살아가게 된다고 하는데 이를 비본래적인 삶이라고 한다. ‘본래적 삶’이란 자신의 실존성을 자각하여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하고 실천하는 삶인 반면, ‘비본래적 삶’은 자신의 존재 의미를 익명의 세상 사람들 사이에서 찾는 것이다.
익명의 세상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까 자신은 저 사람들 속에서 어떤 위치에 속해있을까 하는 생각들이 바로 비본래적인 삶의 태도이다. 공동체 안에서 또는 조직의 구성원으로 살고 있을 때 나는 고유한 나 자신이 아니라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살게 된다. 진정한 자신을 잊고 타인 속에 묻혀서 사는 것이 비본래적 태도다.
비본래적 태도 또는 비본래적 삶, 비본래적 자아상태에서는 불안을 느끼게 되는데 이 불안이 본래적 자아 즉 실존적인 자아를 회복하기 위한 불안이라는 것이다.
시인에게 길은 그리움이고, 걸어가야만 하는 길이다. ‘앞길이 훤희 보이지 않는 굴곡과/오르막 내리막 길이 자주 교차하는/막막한 날들이 많았던 길목에서’ 불안을 안고 등 떠밀려 왔지만 본인이 끌고 가야 할 길이고 때로는 지쳐 쓰러질 때 등을 밀어주는 사람들로 인해 멈추지 않고 한걸음 한 걸음씩 내딛는 길이다.
‘멈춰 선 채로는 볼 수 없었을 아득한 거리가/한 걸음씩 걸음을 떼어 놓을 때마다 가깝게 다가’서듯이 멈출 수 없는 길이다. ‘내려놓고 버렸어야 할 삶의 짐’도 ‘버릴 수 없었던 짐들을 지고’서도 멈추지 않고 걸어온 길을 ‘돌아보니/등 떠밀려 온 시간도/내가 끌고 온 날들도/혼자는 아니었다/때로 서러움도 상처도 마음과 분노까지도/인생을 떠받치는 지지대로/한 몫 했었다’고 말한다.
고창영 시인의 시집 『등을 밀어준 사람』 북콘서트에서 그가 말한 것이 기억에 남는다. 힘든 오르막길에서 등을 밀어준 사람들로 인해 삶의 큰 고비를 넘었고 벼랑 끝까지 등을 미는 사람들 때문에 날 수 있었다고 했다. 무서워서 벌벌 떠는 벼랑 끝에서도 막무가내로 등을 미는 사람들이 있더라고 했다. 무섭고 서럽고 원망하는 마음에 눈물이 쏟아지는 그 끝에서 등 떠밀려 뛰어내렸더니 날개가 펼쳐지더라고, 날 수가 있더라고 했다. 그 사람들 덕분에 날 수 있게 되었다고 그렇게 등 떠밀지 않았다면 본인에게 날개가 있다는 것도 몰랐을 거라고 하던 그의 말이 오래도록 귓전을 울린다.
*정치산 2011년 《리토피아》로 등단. 시집 『바람난 치악산』. 강원문학 작가상, 전국계간문예지 작품상, 원주문학상 수상. 본지 편집위원. 막비시동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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