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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호/계간평/백인덕/시, 원칙과 가치 사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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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부관리자
댓글 0건 조회 772회 작성일 20-01-23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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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호/계간평/백인덕/시, 원칙과 가치 사이에서


백인덕



1.
원칙적으로 인생에는 ‘위계’가 없다. 일상적으로 지나다니던 길을 가다가 생면부지의 행인이 휘두른 칼에 목숨을 잃은 희생자나 아무 이유 없이(분명히 그는 횡설수설 여러 이유를 둘러댈 것이고, 충격에 빠진 사회는 나름대로 전문가를 동원해 여러 이유를 추적하겠지만) 폭력을 자행한 가해자도 개념적으로 한 ‘인생’이라는 데에서는 차이가 없다. 인생은 그저 발생하고 진행되며 비가역적이고 인과에 종속된다는 점에서 보면 특별히 값어치 있거나 더 무가치 한 인생은 없다. 사실 이 주장은 틀렸다. 우리는 일상에서 ‘원칙’과 ‘가치’를 같은 것으로 취급하거나 동일 선상에서 이해하려는 경향이 있다. 흔히 원칙에 충실한 사람이 가치 있는 존재라고 믿는 것이다. 하지만 원칙은 그것의 기초, 기반과 관련할 뿐이고, 가치는 그 근거들과는 별개로 여러 선택지를 거치며 형성된다는 점에서 엄연히 다르다. 앞의 예의 경우, 희생자의 불운은 그 한 차례로 인생이 결딴났다는 점에서 ‘생의 원칙’을 건드리고, 가해자의 폭력은 여러 선택지 중 그가 취한 최악의 경우라는 점 때문에 사회적, 도덕적 비난을 촉발한다. 즉 무가치한 행위라는 것이 인정될 수밖에 없다.
어쩌면 현대 사회에서 시도 같은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다. 시란 무엇인가? 라는 오랜 물음은 개념적으로 시적 정의로 규정되지만, 이 정의는 가치나 효용 이전에 원칙과 관련한다는 것이 오랜 통설이었다. 시적인 것과 비시적인 것을 나누는 경계선을 분명하게 긋고 가능하다면 그 경계를 선線이 아니라 해자垓字로 만들거나 그게 불가능하다면 최소한 선 위에 가시철망이라도 덧대고 싶어 하는 경향이 있다. 이것들은 주로 원칙의 문제를 건드린다. 따라서 시적 의미는 의도하거나 생성되는 것이 아니라 불연속적으로 파생되는 것일 뿐이라고 본다. 전혀 쓸모가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우리의 사회문화적 환경과는 점점 괴리가 커질 수밖에 없는 견해들이다.
어쨌든 지난 호에서 한 중견 시인은 이런 여러 고민을 ‘시작법’이라는 틀에 담아 원칙에 의한 정의보다 생생한 이미지가 생성한 의미의 가치, 효용의 무게를 강조하는 작품을 보여준다.


침침한 어두운 골목길에선 눈물이 난다
힘들고 피곤하고 구석에 웅크렸던 기억들뿐
예전엔 쨍한 햇빛 아래서 눈물이 났다
눈물방울로 스미는 한 줄기 빛이 반가웠을까


시에는 무슨 근사한 얘기가 있다고 믿는
낡은 사람들이
아직도 살고 있다 시에는
아무 것도 없다

조금도 근사하지 않은 우리의 생밖에*


시를 쓰면 세상은 어두워진다
어두워져야 작은 빛이 소중해지니까
부정하고 또 의심하며 살아왔다
부정에 부정을 더하면 강한 긍정이 되니까


시에는 허섭스레기 같은 얘기도 있다고 믿는
새로운 독자들이
지금 태어나고 있다 시에는
있을 건 다 있다
반드시 쓰이고 읽힐 우리들의 생이니까


─조현석, 「우리들의 시작법詩作法」 전문


선제적으로 밝혀야 할 정보가 있다. 작품 말미에 붙은 주註에 따르면 작품에서 *표시된 2연은 전체가 ‘오규원 시 「용산에서」 중에서 인용’되었다는 것이다. 오규원 시인은 ‘날 이미지’라는 시론으로 대표되면서 한국 모더니즘 계열의 한 갈래로 충분히 자리 잡았지만, 그의 시는 추상으로 관념화되거나 관념을 재주조再鑄造해서 형성하는 이데올로기적 가치를 배격하고 있다는 점에서 보다 ‘실존적인 시’라고 보아야 한다.(스승이었던 오규원 시인을 떠올렸던 한 순간에) 시인은 갑가기 환하게 밝아진 눈앞의 현상에 대한 자신의 시각을 깨달았을 것이다. “시에는 무슨 근사한 애기가 있다고 믿는/낡은 사람들이/아직도 살고 있다”의 ‘아직도’가 지금 이 순간에도 지속하고 있다는 것. 그래서 “시에는/아무 것도 없다/조금도 근사하지 않은 우리의 생밖에”이라는 가르침이 더 깊이 되살아났을 것이다.
조현석 시인은 옛 시구에 기대 오늘의 나를 짚어 본다. “시를 쓰면 세상은 어두워진다/어두워져야 작은 빛이 소중해지니까/부정하고 또 의심하며 살아왔다/부정에 부정을 더하면 강한 긍정이 되니까” 말이다. 이 역설, 혹은 전제를 뜻밖의 것으로 만드는 결과의 강조를 통해 시인은 ‘우리들의 생’의 원칙과 가치를 동시에 포착하고자 한다. 이는 우리들의 생밖에는 담을 것이 없는 ‘우리들의 시’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면 우리들의 생을 담는 시작법은 어떻게 구체화 되는가, 다시 말해 어떤 모습으로 형상화 되어 우리 앞에 현시現示하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옆집 할머니가 옥상에 심은 호박이
넝쿨째 우리집 쪽으로 건너 와 더부살이를 한다


넉살 좋은 호박잎 속에 꽃이 피고, 꽃이 지고
호박순치기도 걸렸는데 누런 엉덩이가 실하다


달덩이 같은 호박 머릿속에 굴리며 호박씨를 깐다
옆집할머니 몰래 호박마차 타고 할로윈 파티를 연다


호박씨 까서 한입에 털어 넣고 죽 쑤는 상상을 하다가
몇 달째 꿀 먹은 벙어리 된 할머니의 안부를 여쭌다


지병인 치매가 심하여 요양병원에 입원 중이시란다
맷돌호박이 할머니의 위중을 알아 뙤약볕 건너 왔다


뭉근한 죽 만들어 병문안 다녀오라는 보살심이다
호박찜 만들어 먹은 속이 뜨끔하다


─정미소, 「맷돌호박죽병문안」 전문


우리는 간혹 거대한 대전제에만 휩쓸려 사태의 특질을 형성하는 세부적이지만 중요한 요소들을 너무 쉽게 간과하곤 한다. 가령, 현대와 도시화, 소외와 핵가족 등이 전제로 작동하면 생존의 필수 요소인 주거와 공간에 대한 인식을 지나치게 아파트나 다가구 같은 분절형태로 인식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분명한 건 나란히 담장을 맞댄 단독 주택 형태의 주거 공간도 충분히 유의미한 비율로 남아 있다는 점이다. 시인은 “옆집 할머니가 옥상에 심은 호박이/넝쿨째 우리집 쪽으로 건너 와 더부살이를”하는 광경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이 구체성, 즉 호박이 담장을 넘어온 사건이 시인의 상상(‘할로윈 파티’)을 자극하고, 시인은 즐거움 끝에 이웃 할머니의 ‘안부’를 궁금해 하는 데 까지 나아간다. “뭉근한 죽 만들어 병문안 다녀오라는 보살심”이 호박이 자체적으로 드러낼 수 있는 성질은 아닐 것이다. 이는 호박이라는 매개물을 옆집할머니가 전하는 안부거나 선물이라고 인식하는 시인의 마음가짐이 선행되어야만 할 수 있는 종류의 상상이다. 이렇게 읽으면 “호박찜 만들어 먹은 속이 뜨끔하다”라는 표현은 사실에 대한 죄의식의 표출이라기보다는 그 호박을 사용하면서도 옆집할머니를 직접 대면하지 않은 시인의 일상에 대한 자기성찰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정미소 시인은 ‘맷돌호박죽병문안’이라는 표제, 즉 행위의 촉매인 ‘맷돌호박’과 그로 인해 발생할 사건인 ‘병문안’을 직접적으로 결합함으로써 지난날 사물의 교환이 함의했던 인간적 교류, 즉 ‘정情’의 가치를 다시 환기하고 있다. 본문 인용을 하지는 않았지만 박달하 시인의 「어머니의 기억」에서 “어머니가 광 깊숙이에서 잠자던 콩자루를 꺼내신다,/볕 좋은 한낮 지난 기억들을 멍석 위에 쏟아낸다.”는 것도 앞과 같은 경우라 할 수 있다. 어머니는 광에서 지난해의 콩이 담긴 자루를 꺼내 멍석 위에 펼쳐 말리면서 자신의 기억을 햇볕 아래 다시 반짝이게 하는 것이지만, 이를 언어로 형상화하면서 박달하 시인 또한 자신의 ‘어머니의(에 대한)기억’을 다시 현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이런 세부들이 바로 ‘우리들의 시작법’을 더욱 확산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2.
주지의 사실이지만, 인간과 문명을 정의하는 방식 가운데 하나로 원활한 ‘의사소통’을 들기도 한다. 좀 편하게 생각해 보면 의사소통에서 ‘의사’는 생각, 즉 사고를 뜻하고 ‘소통’은 ‘함께  나눈다’는 어원적 의미가 있다. 즉 자신의 생각이나 느낌을 타인과 더불어 공유한다는 것이다. 공유되는 내용은 크게 ‘정보와 정서(감각적 인지에서 비롯하는)’가 된다. 필자의 추론으로는 정서전달이 먼저 생겨났고, 교환할 정보가 많아지면서 정보 전달이 나중에 생겨났다고 보인다.(물론 그 역을 주장할 수도 있다. 간단한 정보 전달(비가 온다. 강물이 불었다. 어디에 사냥감이 있다 등등)에서 시작한 의사 교환이 보다 복잡한 내면 상황의 표현으로 발전했다고 볼 수도 있다.
어쨌든 ‘우리들의 시작법’은 이 ‘의사소통’의 범주에 들어가고, 그것이 “반드시 쓰이고 읽힐 우리들의 생”이라면 더욱 더 그럴 것이며 숱한 의사소통의 결과물을 자양분 삼아 새로운 형태와 질감의 꽃, 아니 균菌을 퍼지게 할 수도 있다.


멧돼지를 씹어 삼키는 강한 아래턱이라야 활자의 맛을 볼 수 있다
책을 이해하는데 수천 그루의 잎맥을 독해하듯
송곳니 박고 말의 뿌리를 흡혈하고 있다
맹목의 소용돌이,
과녁이 빗나간 신념,
늙어가는 비유들이 유령처럼 어슬렁거리는 시간을 지나면
입 안 가득 활자의 새 잎이 돋아날 터이다


─기명숙, 「도서관」 전문


시인은 ‘도서관’이라는 스스로 완결하고자 폐쇄하는 공간과 그 안에서 벌어질 사건들을 통해 삶의 근본적이지만 잘 드러내지 싶어 하지 않는 모습 하나를 보여준다. 지나치리만큼 ‘개성화’를 강조하는 시대에 살고 있지만, 사실 개성화란 “늙어가는 비유들이 유령처럼 어슬렁거리는 시간을 지나”하면 시작되는 어두컴컴한 복도(‘골목’)에 지나지 않다. 타자를 바로세우고 정면에서 인식해야만 눈 뜨게 되는 주체 인식처럼, 언제나 ‘육화肉化’가 개성화를 앞서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도서관’을 “입 안 가득 활자의 새 잎이 돋아”나게 할 배양처로 받아들이는 순간, 시인은 삶의 다른 다양한 영향 관계를 다 수락한다는 표시를 한 것이 된다. 즉 그의 시는 단순한 배열이나 배치가 아닌 유동하는 형식이 되는 것이다.
전혀 다른 형질의 사물이나 유사 사건을 내재화 하는 능력이 발달함에 따라 의사소통은 깊고 풍요해졌고, 그만큼 시는 사유와 공감의 깊이와 영향을 극대화할 수 있게 되었다.


사냥개가 물고 있는
이백 근 숫멧돼지
버둥거리는 뒷다리 발목에
이장님은 칼을 그었단다
출구는 그걸로 막혔다
일어서지 못하면 달아날 길이 없다


죽은 새의 발가락은
나뭇가지를 쥔 모양으로
오그라져 있다
쥐고 있으면 날 수도 없다


잡은 짐승의 털을 벗기면
발목부터 잘라낸다
삶의 흔적도 죽음이 나갈 다른 길도 지워진다


흔들림이 심할수록 발목은
더 굵고 곧다
발바닥의 주름을 펴며 기지개를 하는 밤에도
두근두근 발목은
출발선에 선 아이의 양 주목처럼
복숭아뼈를 꼭 쥐고 있다


─유재복, 「발목」 전문


이 시의 핵심 제제는 엉뚱한 곳에 잘못 들어선 멧돼지가 아니다. 표제가 강하게 상징하듯 ‘발목’의 중요성, 아니 발목이 거느린 함의들이 이 작품의 핵심이다. 1연에서 보이는 “일어서지 못하면 달아날 길이 없다”는 명제는 ‘뒷다리 발목’이 베인 ‘멧돼지’에게는 정확하게 참인 명제지만 언표의 이면까지 생각하면 단독자인 존재 일반에게 다 참인 명제라 할 수 있다. 잘린 발목으로 홀로 일어설 수 있는 존재는 어디에도 없을 테니. 2연의 발목을 잘라내면 “삶의 흔적도 죽음이 나갈 다른 길도 지워진다”는 표현은 존재의 고독을 드러내는 적확한 표현이라 할 수밖에 없다.
유재복 시인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가 반드시 경험에서 건져 올렸을(이런 식의 표현은 관찰이나 발견 없이는 형성되지 않는다) 유사 상황을 하나 더 적시摘示한다. “죽은 새의 발가락은/나뭇가지를 쥔 모양으로/오그라져 있다”는 것인데 여기서 시인은 죽음의 양상이 아니라 “쥐고 있으면 날 수도 없다”는 사실, 즉 발목과 그 계열의 이미지(발가락, 복숭아뼈 등)들이 환기하는 지탱과 이동의 중요성과 가치를 보여준다. 일상적으로 흔하게 노출되어 있으면서도 시선의 주의를 끌지 못하는 대상으로 ‘발목’만한 것도 드물 것이다. 이를 통해서 삶의 기저에 깔린 수고와 비애, 나아가 그것의 허망과 가치를 읽어내는 시인의 눈이 예사롭지 만은 않다. 





*백인덕 1991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끝을 찾아서』, 『한밤의 못질』, 『오래된 약』, 『나는 내 삶을 사랑하는가』, 『단단斷斷함에 대하여』, 『짐작의 우주』. 저서 『사이버 시대의 시적 상상력』 등. 본지 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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