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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호/특집2 시인은 신인가, 시시한 사람인가/박일/시인은 상상력으로만 신神과 인간人間의 경계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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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호/특집2 시인은 신인가, 시시한 사람인가/박일/시인은 상상력으로만 신神과 인간人間의 경계에 서 있다
박일
시인은 상상력으로만 신神과 인간人間의 경계에 서 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의 사전적 정의는 ‘사고와 언어 능력을 바탕으로 직립보행을 하며 문명과 사회를 이루며 사는 고등동물’이다. 학명으로는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사고하는 인간), 호모 에렉투스homo erectus(직립 인간), 호모 아르텍스homo artex(예술적 인간), 호모 부커스homo bookus(독서하는 인간), 호모 크레아투라homo creatura(창의적 인간), 호모 듀플렉스homo duplex(이중적 인간), 호모 엠파티쿠스homo empathicus(공감적 인간), 호모 팔락스homo fallax(속이는 인간), 호모 로퀜스homo loquens(언어적 인간) 등등으로 인간만의 특징을 보인다. 그러한 인간은 지식과 행동을 중심으로 세상을 살아간다. 살아가면서 현실주의와 기회주의, 이기주의, 이타주의, 이상주의, 염세주의들을 수렴하며 사회 속에서 개인이 되어 간다. 그러한 인간 가운데 몇 사람이 어느 날 시인詩人이 된다. 선천적인 재능을 지녀서 아니면 후천적인 교육과 취미생활의 현실화라는 등의 행위를 통해 문단에 얼굴을 내민다. 등단이라는 형식을 거쳐서 또는 시집을 만들어서 스스로 그 자리에 올라선다. 일반인은 손쉽게 입문하기가 어렵게 느껴지는 시작詩作 활동. 그렇지만 시대가 변화해 출판등록이 자유롭게 되면서 각종 문학 관련 잡지들이 나타나고 시가 흔해졌다. 문학단체가 아니라도 모든 행사마다 꼭 끼는 게 글짓기 대회이다보니 요즈음 흔한 게 수필가이고, 시인이다.
쉽게 여겨지는 시, 한편에서는 흔해서 그 시를 읽어 보지도 않고 의미를 생각하지도 않는다. 도처에 시詩라고 하는 글들이 읽을거리가 아닌 볼거리로 벽면을 장식한 곳도 많다. 지하철역에 가도 붙어 있고, 시는 도처에 흔하다. 역설적으로 그런 시들은 귀하지 않다. 학생들도 교과서에 나온 시를 가지고 점수따기에만 바쁜데 시험문제나 교과서에 없는 시는 눈만 피곤하게 할 뿐이다. 피곤하다. 그뿐인가 어르신들도 마찬가지이다. 본인이 고상함을 증명하기 위해 각종 직위를 나열하고 한 줄 더 써서 시인 아무개요, 수필가 아무개요 하는 사람들도 많다. 명함의 특징은 받은 사람이 그 사람에 대해 볼일이 없으면 버려지고 만다. 이 또한 버려지는 시인과 수필가가 된다. 존경스럽고 권위가 있는 단어가 아닌 한낱 흔한 명함 종이 위의 활자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문인은 작품으로 말하지, 명함에 굳이 활자화해서 특수한 인간이라 말하는 게 아니다. 작품도 마찬가지 한쪽에서는 베스트셀러 작품집이라 칭송하고, 훌륭한 상을 탄 작품이라 하나 기실은 ‘가치의 의미’를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훌륭한 작품의 선별이 달라지는 게 아닐까 한다.
이번에는 시에 대해, 시인이 신과 같은 존재인지, 시시한 사람인지 생각해 보자. 이야기를 꺼내기 전에, 시가 무엇인지 동서양의 고전을 통해 간추려 훑어보고 생각해 보자. 시를 쓰는 행위를 모르고서는 시인을 말하기는 어렵다는 생각에서다.
인류가 탄생하고부터 비롯된 희로애락喜怒哀樂의 표출은 개인이 무리를 이루어 사회를 형성하면서 노래가 되고 시가 되었다. 그리고 숱한 노래들이 생겨나고 사라졌다. 중국에서는 공자孔子가 전시대前時代의 시편들 300여 편을 수집 편찬해 『시경詩經』을 만들었다. 주나라 시대 700여 년 동안 귀족과 민중들이 부르던 가요를 정리해 편집을 한 것이다. 그 가운데 몇 편을 읽어 보자. (번역 내용은 현암사의 『시경詩經』을 인용함.)
碩鼠碩鼠 쥐야 쥐야 큰 쥐야
無食我黍 내 기장을 먹지 마라
三歲貫女 세 해 삼년 위했건만
莫我肯願 인정 사정 없는 쥐야
逝將去女 떠나가리 너를 두고
適彼樂土 살만한 곳 찾아가리
樂土樂土 살만한 곳 어디메냐
爰得我所 거기 가서 나는 살리
─「석서碩鼠」의 일부
遵大路兮 대낮이라 한길 가에
摻執子之袪兮 임의 소매 잡는다고
無我惡兮 밉다고는 마오시라
不寁故也 잊으시니 안 그러리
─「준대로遵大路」의 일부
園有桃 복숭아 익었기에
其實之殽 복숭아를 먹었네
心之憂矣 근심이 있기에
我歌且謠 노래했더니
不我知者 모르는 이들
謂我士也驕 나를 교만하다고
彼人是哉 저 사람 잘하거늘
子曰何其 무슨 군말이냐고
心之憂矣 내 마음의 이 근심
其誰知之 그 누가 알리
其誰知之 어느 누구가 알리
蓋亦勿思 그러기에 생각을 말려네
─「원유도園有桃」의 일부
석서碩鼠는 ‘머리가 큰 쥐’인데 현실에서 가렴주구苛斂誅求를 일삼는 권력자를 나타낸다. 「준대로遵大路」는 ‘큰길 가’에서의 남녀상열지사男女相悅之詞 내용이며, 「원유도園有桃」는 어지러운 세상을 개탄하는 내용이다. 위 시들을 음미해 보면 우리 고전의 시가, 현대시의 내용과 흡사한 의미가 엿보인다. 그만큼 시에 나타나는 의미는 표현하는 단어와 제재, 소재만 변화했을 뿐 과거와 현재의 시적 상황과 주제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면 공자는 『시경詩經』을 왜 만들었을까. 그 이유를 BC 450년경에 만들어진 공자의 언행을 기록한 『논어論語』에서 찾아보자.
·興于詩, 立于禮, 成于樂 (시로 감정을 일으키고, 예절로 행동하는 규범을 세우고, 음악으로 이룬다.)
·不學詩, 無以言 (시를 배우지 않으면, 말을 하지 마라.)
·人而不爲周南召南, 其猶正牆面而立也興 (사람이 주남周南과 소남召南을 배우지 않으면, 그것은 오히려 담을 마주하는 것이다.)
·詩三百, 一言蔽之, 曰 : 思無邪 (삼백 편의 시는, 한마디로 말하면, 일컫기를 : 생각함에 사특함이 없다.)
공자는 언어의 의미를 가다듬고 그것의 적확한 사용을 통한 격식의 완성. 그리고 그런 예禮의 격식을 통한 흥의 절제를 아는 ‘인仁을 갖춘 올바른 사람’을 길러내는 근본으로서의 시를 생각한 것 같다. 공자 생존 당시의 중국은 혼돈스러운 상황의 연속이었고, 단순한 논리로 천하를 다스리기 어려웠다. 그래서 세계를 한눈에 꿰뚫어 보는 직관적 능력을 지닌 인물이 중요함을 깨닫게 되었고, 그 근본 방향을 시詩를 통해 설파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한 공자의 생각에 맹자孟子는 덧붙여 “그러므로 시를 말하는 자는 글을 꾸며 문장을 어긋나게 하지 않으며, 문장으로 뜻을 그르치게 하지 않는다. ; 문장의 뜻으로 본뜻을 받아들이는 것이 그 시를 이해하는 것이다.(故說詩者, 不以文害辭, 不以辭害志 ; 以意逆志, 是爲得之 『맹자孟子 - 만장상萬章上』)”라고 했다. 그리고 시인이 시를 쓰는 목적과 의도를 분석하는 ‘이의역지以意逆志’, 작가의 생애나 사상, 시대의 환경을 따져 보는 ‘지인논세知人論世’, 도덕이 수양된 채로 말을 이해하는 ‘지언양기知言養氣’를 말하기도 했다. 이는 모름지기 시인이라면 있는 그대로의 의미를 가지고 직관과 통찰을 통해 세상 사람들과 문장으로 교감해 공감을 얻어야 한다는 말과 비슷한 내용이리라.
그렇다면 그리스 시대에는 어떠했을까. 시와 시인에 대한 생각을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빌려 생각해 보자.
·시인은 행동하는 인간을 모방하는데 행동하는 인간은 필연적으로 선인이거나 악인이다.
·시는 시인의 개성에 따라 고상한 시인은 고상한 행동을 모방하고 저속한 시인은 비열한자들의 행동을 모방한다.
·시인의 임무는 실제로 일어난 이야기가 아니라 개연성, 필연성의 법칙에 따라 가능한일을 이야기한다.
·시인은 운율보다는 플롯의 창작자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내용을 곰곰이 살펴보면 시인은 자신의 개성에 따라 행동하는 인간을 모방하며, 시인은 인과성이 있는 언어로 플롯을 통해 시를 써야 한다. 바꾸어 말하면 시인의 시는 플롯이 탄탄하고 개성이 돋보여야 한다는 이야기로 들린다. 다음은 호라티우스가 한 말인데 곁들여 간편하게 음미해 보자
·시는 하나의 유기적인 통일체라야 한다.
·시를 쓰겠다고 약속한 작가는 언어를 선택함에 있어서도 신중을 기하여 취할 것은 취하고 버릴 것은 버려야 한다.
·시는 아름다운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무엇보다도 청중의 마음을 사로잡지 않으면 안 된다.
·올바른 작시의 원리와 근원은 분별력이다.
·시인의 교훈은 간결하고 정확해야 한다.
·시는 그림이다. 가까이서 볼 때 더 감동적이고, 멀리서 볼 때도 그럴 수 있다.
·훌륭한 시를 만드는 것은 타고난 재능이나 숙련이 아니다. 타고난 재능이 결여된 노력이나 가꾸지 않은 재능은 필요가 없다.
─호라티우스Quintus Horatius Flaccus
호라티우스는 분별력이 있는 적절한 언어의 선택, 독자와의 소통과 공감, 진솔성의 추구 이런 것이 없다면 시가 볼품이 없어진다고 말한다. 시인이라면 늘 생각해 봐야 할 이야기들이다. 시인이 되었다고 저절로 모든 기본이 저절로 갖추어진 사람이 된 것은 아니기에. 시인이라면 자기 시가 가는 방향과 내면에 있어야 할 인품, 독자를 배려하는 마음, 세상과의 소통 등 모든 것을 스스로 공부하며 깨달아야 한다. 운전면허증만 따면 저절로 차가 굴러가는 게 아닌 것처럼, 운전자가 차를 내 분신처럼 움직이게 해야 한다. 그러나 어떤가, 나만 운전에 숙달되었다고 해서 사고를 피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늘 조심에 조심을 거듭해야 한다. 상대방에 의해 내 목숨도 잃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운전면허증을 지닌 지 몇십 년의 경력에 자아도취가 되어 자칭 베스트 드라이버best driver처럼 산다면 죽음이 바로 앞에서 기다림을 모르는 미물에 지나지 않는다. 시인도 마찬가지이다. 시인이라면 시가 자기의 분신처럼 언어 속에 나타나 시에도 그 흐름이 보여야 한다. 시인의 자격을 가진 지 오래되었다는, 그리고 선점했다는 자기과시적인 습관적 편견 하나로 모든 것을 절대시하려는 생각은 망상에 지나지 않는다. 시인은 원래 괴짜라 남다른 직관으로 파격적인 언행만을 일삼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한다면 착각이다. 세상은 점점 실증화가 되고 개방화되어, 보편적이며 대중적인 편리함 속에 정보력에 의해 살아가고 있다. 이제 시인의 직관력은 인공지능人工知能, Artificial Intelligence으로 분석해 적용시키면 소소한 인간 특성의 일부에 지나지 않아 보인다. 그만큼 존경받을 특수인의 특징이 아니다. 시 쓰기를 즐기며 취미로 하는 사람의 관찰력에 불과하다.
상아탑이라 칭송받는 곳에 머물러 있기에 절대권력처럼, 모 단체에서 좌장座長 격이기에 안하무인으로 행동하는 시인이 더러 있다. 마치 신처럼 갑질을 하면서 과시욕에 사로잡혀 온갖 추문이 나게 기행을 일부러 하는 인간도 있다. 이런 이들은 시인의 탈을 쓴 다중인격자일 뿐이다. 이 시대의 시인들은 동시성의 상대성을 생각하지 않으면 관찰자의 착각을 일으켜 자신의 눈만을 믿는 오류를 만들어낸다. 다른 관찰자와의 시간이 주는 그 차이를 모르는 인간으로 전락한다. 관찰자는 그 혼자가 아니라 다중의 시선 속에 있다. 시인도 일반인과 마찬가지로 세상을 바라보는 관찰자에 지나지 않는다. 독자와 다른 점은 사물과 상황에 대한 언어 능력과 사회에 대한 관심이 보통 사람보다 조금 발달된 사람일 뿐이다.
주변을 살펴보면 평소 자기 몸에 대해 이해를 하지 못해, 건강을 잃고 죽음에 이르거나 불편한 상태에 이른 사람들을 많이 본다. 시도 사람과 마찬가지의 유기체이다. 스스로의 내면을 보지 못하면 사망에 이른다. 시의 사망은 가치 없는 것의 나열이다. 시인의 언어는 하루아침에 달라지지 않는다. 인간이 노화에 따라 달라지는 것처럼 세월과 함께 서서히 변화한다. 갑자기 시가 변화하지 않는다. 언어의 의미도 시대에 따라 변화를 가져온다. 시간이 흘러가고 시인 내부의 변화와 시대의 외부 변화는 보는 시각의 스펙트럼에 따라 변화한다. 시인도 시인다운 언행을 해야 존경받는다. 남보다 튀는 언행과 기행을 일삼는 것은 신적神的인 행동이 아니라 잡놈의 특성이다.
요새 아이들 말대로 ‘시인이 개 많다.’ 그래서 ‘시는 존나 어렵다.’ 그래서 읽지 않는다. 대중 선동과 국수주의, 인종주의, 이기주의 등으로 인한 불안과 갈등이 난무하는 이 시대에는 독자들도 투명하고 진솔한 언행을 원한다. 남보다 유식한 척 치장된 언어로, 개연성이나 인과성보다는 소설을 쓰듯, 가치가 없는 시각적 장식과 장면만을 보이는 시들이 많이 보인다. 시인이나 특정 비평가를 위한 어렵고도 복잡한 언어를 대중들은 원하지 않는다. 옛사람들의 언행을 다시 들여다볼 때인 것 같다. 노자老子의 “가장 아름다운 소리는 소리가 없는 것이고, 가장 아름다운 형상은 형상이 없는 것이다.大音希聲, 大衆無形”를 생각해 본다. 그리고 호라티우스가 말한 “기억하라, 언젠가는 죽는다는 것을memento, mori”, “현재에 충실하라, 가급적 내일이란 말은 조금만 믿어라Carpe diem, quam minimum credula postero”를 음미해 본다. 시인은 진솔하게 자신의 내면에 반영된 언어를 통해 ’정신적 가치‘를 표현하는 사람이다. 시인은 상상력으로만 신神과 인간人間의 경계에 서 있는 주변인일 뿐이다.
*박 일 1985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사랑에게』, 『바람의 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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