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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호/특집2 시인은 신인가, 시시한 사람인가/이충재/시인은 신의 정원에 선 나무인가? 시시껄렁한 사람 정원에 난 풀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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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호/특집2 시인은 신인가, 시시한 사람인가/이충재/시인은 신의 정원에 선 나무인가? 시시껄렁한 사람 정원에 난 풀인가?
이충재
시인은 신의 정원에 선 나무인가? 시시껄렁한 사람 정원에 난 풀인가?
─참된 시인의 됨을 위하여
과거장의 시제를 하나 받아든 기분이다. 평소에도 이 부분에 대해서 수많은 사유의 결실을 수확하고는 있지만, 막상 쓰려니 올곧은 마음이 좀처럼 읽혀지지 않는다. 무슨 일일까? 늘 사람에 대해서 말을 하려고 할 때면, 동시에 휩쓸려가는 부끄러운 나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자화상 때문에 멈칫멈칫거리게 된다.
누구를 청해놓고 말을 걸으면 속이 시원할까? 시인들을 생각해 본다. 신의 섭리 안에서 시를 쓰다가 생애를 마감한 이들의 무덤을 노크하려니 불안이 밀려서 오고, 생존하는 이들의 서재를 노크하자니 믿음이 안가고 그렇다고 높고 푸른 하늘을 윙윙 날아드는 새들과 들녘에 피어난 꽃잎과 얼굴을 마주하고 방언을 하자니 동료시인이나 독자들이 알아들을 것 같지도 않고 혹시 그들이 나를 멀리하고 만나주지 않을 것 같아 늘 불안의 손짓만 해댄다.
한숨을 쉬고 제목을 다시 한 번 읽어본다. ‘시인은 신의 영역을 배회하는 영성을 지녔는가? 아니면 시시껄렁한 사람과 눈이나 마주치는 한량들인가?’로 고쳐 읽기로 했다. 조금은 마음이 편해진다.
헤르만 헤세의 언어가 기억에 나고, 김종삼 시인의 쓴 소리도 새롭고, 횔덜린의 헛웃음 소리도 들리고 릴케의 속삭임도, 니체의 묵언도 그리고 장미꽃밭을 일구다 가시에 찔린 이어령도 따라와 시의 문을 열어 놓고 동석을 한다. 분명 그랬다. 지금까지 우리가 오독한 그리고 오독을 권한 인물들이 지금까지 시단을 좌지우지 해 왔던 것도 잊을 수 없는 사실이다. 스스로가 우상이 되었던지, 비즈니스차원에서 우상을 만들어 세웠든지 모두가 다시 읽혀야만 한다. 그래서 시인들의 일상과 사생활을 기웃거려보는 여유를 가져보는 것이다. 누군가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다. 시인을 알고 시를 이해해하는 것이 옳은가? 시인의 일상과는 관계하지 않은 채 시 자체만을 연구하고 분석하는 것이 옳은가? 진지하게 물어 왔다. 물론 어느 하나만을 고집하는 학습은 정답이라고 말할 수 없는 법, 그들의 삶도 적지 않은 역할을 한다는 측면에서 볼 때, 좌우 균형을 이루는 대칭적인 감상법이 우선해야만 한다고 은근슬쩍 답변을 냈다. 다음은 시 정신에 도움을 줄 인물들의 소리를 통해서 진실된 시인으로 거듭나는 계기를 탐구하고자 한다.
헤르만 헤세의 직언, “귀하께서 시인이 되려고 열망하는 것은 시구나 명예 때문이 아니라, 시인이 겉보기에 자유나 고립을 누린다고 생각해서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가면을 쓴 위선적인 시인이 되지 않으려면 시인은 높은 정도의 책임감을 가져야 하고, 스스로 희생해야 한다.”
또한 옥타비오 파스의 조언. “시인이 자신의 언어를 찾는다고 말할 때 그것은 오래되거나 새로운 문구를 채집하기 위하여 도서관이나 시장을 배회한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처음부터 자신과 같이 있었으며 실제로 그에게 속하는 말과 책과 거리에서 배운 다른 말 사이에서 머뭇거리며 주저한다는 뜻이다. 시인은 그의 말을 발견할 때, 그 말이 이미 자기 자신 속에 있었음을 인식하게 된다. 그리고 그도 이미 그 말 속에 있었다. 시인의 말은 시인의 존재 자체와 혼동된다. 시인이 그의 말이다. 창조의 순간에, 우리 자신의 가장 비밀스러운 부분이 의식에 떠오른다. 창조는 우리의 존재와 떼어놓을 수 없는 어떤 말에 빛을 비추는 것이다. 다른 말이 아니라 꼭 그 말인 것이다.”
김춘수 시인의 고백, “왜 나는 시인인가? 존재하는 것의 슬픔을 깊이깊이 느끼고 이해하려고 노력하기 때문에 나는 시인이다. 그중에서도 사람이란 더없이 슬픈 존재다. 사람으로 태어난 슬픔을 아름다움으로 승화시켜야 한다고 깊이깊이 느끼고 생각하기 때문에 나는 시인이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이 점에 있어 많이 부족하다. 그것을 솔직히 남 앞에 털어놓을 수 있기 때문에 나는 시인이다. 그 상태를 시로 쓰고 있기 때문에 작품(시)으로 다듬어보려고 힘을 다하고 있기 때문에 나는 시인이다.”
위의 세 사람의 말을 기억하며, 순수시를 향한 열정을 품고 밤을 새워 가면서 시를 쓰는 시인, 시를 쓰면서 자신의 삶을 정화시키고, 시대의 어두운 터널을 힘겹게 지나는 이들의 의식을 깨워 밝은 지대로 이끌고자 몸부림하는 시인, 돈과 명예가 되지 않지만, 적지 않은 책임과 자기희생 정신을 가지고 사유의 결실로서의 시를 생산해 내려고 가슴앓이를 거듭 행하는 시인, 결코 자신을 드러내고자 온갖 술수를 앞세워 거짓을 남발하는 이들과 반대 선상에서 거룩한 망명자적 삶을 살아가는 순수한 인격체로서의 언어를 대하는 시인, 이들이야말로 신의 영역 안에서 그 분의 영성을 얻어 시를 쓰는 신의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은 동물들과 같지 않아서 영혼을 지닌 피조물이다. 그 피조물은 반드시 신을 찾아야 하고, 신에게 의존적 삶을 살지 않을 수 없다. 더욱이 사유의 행위를 거듭해야 하며, 정신적인 고귀한 울림을 시라는 언어와 리듬으로 창작해내야 할 일에 목숨을 거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 시대는 이들을 몹시도 고통스럽게 만드는 동기로서의 물질, 명예, 권력, 인기 등에 너도 나도 많은 시인들이 흔들리고, 죄책감을 안고 넘어지고 만다는 것이다. 그래서 더욱 더 자신의 세계를 단속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신의 영역에서 신의 뜻을 기리고, 신으로부터 영성의 양식을 공급받아 끊임없이 아름다운, 그리고 영혼의 울림을 주는 시를 쏟아 놓아야 한다.
그런가 하면 사람들의 말초신경이나 그들의 탐욕을 즐거워하는 시시껄렁한 유사 시인들도 적지 않다는 것이 우리를 슬프게 한다. 마치 저자거리의 패거리들처럼, 자신의 열악한 생활의 일부를 보상이라도 받을 듯 술수를 삶의 도구로 삼고 살아가는 이들이 독자들을 슬프게 하고, 시의 순수와 아름다움과 거룩한 영역을 탐할 뿐, 속히 무너져 쓸모없는 인생이 되도록 망치질을 해대고 있다.
김종삼 시인의 탄식, “나는 사진사처럼 그러한 아무도 봐주지 않는 토막 풍경들의 셔터를 눌러서 마구 팔아먹는 요새 시인들의 그릇된 버릇들을 노상 고약하게 생각해 내려오고 있는 터이나, 시단의 ‘헤게모니’는 우리들의 경우에 있어서 더욱이 이 고약한 풍속 속에 누적되어 가는 것이니, 이것은 비단 내 혼자만의 탄식은 아닐 것이다.”
이어령의 고백, “문학인의 싸움은 장미 밭의 전쟁이다. 아름다운 자기 장미 밭을 수호하는 싸움은 장미와 같이 아름다워야 한다. 시의 이념을 위하여, 산문의 정도를 위하여 싸우는 것이라면, 문단적 신뢰를 위해서가 아니라 내일의 문학을 위하여 싸우는 것이라면 도리어 우리의 장미 밭은 더욱 풍성해 질 것이다. 지금 독자는 배고프다. 그들은 문인들의 추태와 그 희극의 연기를 구경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은 지금 고갈한 정신을 축여주는 이슬과 같은 시를 원하고 있다. 타오르는 불꽃을 기원하고 있다.”
그리고 마리아 릴케의 말, “새로운 언어란 언어의 도끼가 아직도 들어가 보지 못한 깊은 수림 속에서 홀로 숨 쉬고 있다.”
말하자면 함부로 지껄이는 언어들은 대개가 아름다운 언어의 정신을 찍어서 불태워 버리는 이른바 언어의 도끼와 같은 수단에 지나지 않으므로 그와 같은 언어 속에는 새로운 말이라는 것이 없다는 것이다.
위에서 밝힌 바와 같이 김종삼이나 이어령, 그리고 마리아 릴케가 남기고 있는 말 가운데는 오늘을 살아가면서 뚜렷한 문학관과 인생관을 지니지 못하고 시를 쓴다고 요란을 떠는 시인들을 향한 뼈아픈 교훈이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시인이라는 명함만 들고 다니며 독자들의 눈살을 찌푸리거나 낭만가객이라는 그릇된 명분 아래 패거리를 이루고 다니면서 시대 주변을 요란스럽게 하는 무리들이나 그 밖의 식자 노릇을 하면서 사회의 이질적인 현상을 도모하는 이들이나 보아주지 않는 토막 풍경을 찍어대는 낡은 사진사와 같은 행위를 반복하는 이들과 고갈해하는 독자들의 정신을 축여주지 못하고, 이슬과 같은 시로써 그들에게 희망을 제공하지 못하면서 함부로 언어를 지껄이기만 하는 모두가 시시껄렁한 사람들 주변에서 왕과 주인공 노릇을 하려고 술수를 도모하는 사람들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들은 진정한 시인이 아닌 유사시인, 명패만 시인일 뿐 독자들을 대상으로 사기를 치는 파렴치범이라고 감히 말할 수가 있다. 시인들 중에 시의 부활을 위하여 탄식하면서 몸부림하는 이들의 수효가 턱없이 부족한 채 점점 줄어들고 있음이 안타깝다. 마치 신으로부터 사명을 받았다고 자부하면서 겸허하고도 감사한 마음으로 시 창작에 열중하는 시인들보다는 마치 가벼운 취미 정도 혹은 타인들을 의식하여 자신의 영달이나 한 번 취해 볼까 해서 펜을 들고 문단에 발을 들여놓은 이들의 수효가 늘어나고 있음이 슬픈 현실이다. 시는 분명 돈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시로써 물질을 추구하면서 적지 않은 상행위를 하는 이들이 많음은 우려하지 않을 수 없는 현실이다. 문제는 그들이 시인의 순수성이나 시가 가지고 있는 본래의 목적을 저버리지 않은 채 시의 홍보대사 정도로만 여겨도 문제는 달라지겠지만, 시의 목적성을 상실한 채 아무런 죄의식도 가지지 않고 비즈니스 차원에서 시를 다루고 시 창작 행위를 하고, 시인 명패를 이용하려고 든다면 이 문제는 궤도수정이 시급하다고 할 수가 있다.
다시 헤르만 헤세에게로 돌아가서 시인의 제대로 된 사명을 교육받는 단상을 삼고자 한다.
“시인이 된다는 것이 대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는가? 시인이 된다는 것은 많은 재능 있는 젊은이에게 하나의 이상이다. 그들은 시인이란 존재를 독창적인 사람, 섬세한 감각과 정화된 감정을 지닌 마음이 순수하고 감수성이 예민한 사람으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덕목은 굳이 시인이 되지 않아도 누구든 가질 수 있다. 또 미심쩍은 문학적 재능을 갖는 대신에 그런 덕목을 갖는 게 더 낫다. 어쩌면 유명해질 수도 있겠다는 심정 때문에만 시인의 길에 관심이 있는 자라면 차라리 배우가 되는 게 좋겠다. 지금 시를 짓겠다는 욕구가 있다는 것 자체는 칭찬할 일도 부끄러워 할 일도 아니다. 체험한 것을 의식 속에서 분명히 하고, 간결한 형태로 포착하는 습관은 귀하를 진척시키고, 진정한 인간이 되는 것을 도와줄 수 있다. 하지만 시를 짓는 일은 당신에게 해를 끼칠 수도 있다. 그것은 아주 많은 사람들에게 해악을 끼친다. 체험한 것을 순수하게 충분히 맛보는 대신 금방 아무렇게나 해치우고 처리하는 쪽으로 오도함으로써 말이다.”
짧은 글이지만 이제 할 말을 다 했다. 이것이 필자가 시를 쓰고 평론을 하는 자세를 찾아가는 구도자의 삶의 과정에서 배우고 깨달은 것이다. 분명하건데, 오늘날 한국의 문단은 분명 시인의 사명을 잃어버렸다. 시의 순수한 정신마저 잃은 지 오래이다. 시인에게 주어진 책임과 희생정신을 또한 잃어버렸다. 우리는 시를 쓰고 있는 시인인가? 더욱이 신의 거룩한 영성을 기반으로 스스로 몸과 정신을 정화시켜 순수하고 맑은 그리고 인간성 상실이란 고갈을 회복시키는 일에 도움이 될 삶의 목적성을 가지고 시 창작 행위를 하는가 묻고 싶은 것이다. 그렇다면 당신은 확신하건데, 신 앞에서 주어진 삶을 성실하게 살아내면서 시의 호흡으로 정진하는 시인이라고 고백할 수 있다. 만약 그렇지 못하고 여전히 저자거리의 유혹과 인기나 명예나 문단의 헤게모니 싸움에 연루되어 문학의 미래를 향한 선한 투쟁을 하지 않고 자신의 안위만을 추종하는 자의 위치에 머물기를 고집한다면 그대는 시시껄렁한 사람들 주변을 배회하는 시 주정꾼에 불과할 것이다. 바라건대 우리 모두 건강한 정신을 지니고 신의 부름에 순수한 영혼으로서 응답하여 시를 창작하는 시인이 되어 시대를 정화시키는 선봉에 서기를 약속하자.
*이충재 1994년 《문학과 의식》으로 등단. 2016년 《월간 시see》 평론 대상 수상 문학평론가로 활동. 시집 『사람 섬에서 살며』외 10권. 수필집 『책의 숲속에서 멘토를 만나다』외 2권. 산문집 『아버지의 영성회복』외 2권. 칼럼집 『아름다운 바보 세상 보기』. 한국기독시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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