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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호/특집2 시인은 신인가, 시시한 사람인가/안명옥/시인은 신이며, 시는 신의 소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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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호/특집2 시인은 신인가, 시시한 사람인가/안명옥/시인은 신이며, 시는 신의 소리이다
안명옥
시인은 신이며, 시는 신의 소리이다
1.
자본주의 사회에서 시는 명예도 되지 않고 권력도 되지 않고 부도 될 수 없다. 어디에도 유용하지 않다. 그런데 이 유용하지 않음이 오히려 우릴 억압하지 않는다. 유용한 것들은 억압하기 마련이라고 평론가 김현 선생은 말했다. 억압하지 않은 시를 쓰면서 나는 부러운 게 줄어들었다. 부러움이 줄어들자 시야가 넓어졌고 세상을 달리 보는 눈도 틔었다. 나만의 시, 나만의 우주는 이렇게 만들어졌고 이러한 힘으로 나는 이 사회의 부조리를 견디는 내성을 길렀다.
시인은 이처럼 아주 사소한 것에서 힘을 기르는 자다. 그래서 나는, 이슬처럼 맺혔다가 순간적으로 사라지는 생각들을 붙잡아 새 세계를 창조하는 시인들이야말로 신이 아닐까 여긴다. 생각해보라. 우주 만물을 창조하는 신처럼 시인들은 여기에 없던 시들을 세상에 내어놓지 않는가.
중국어 강사로 있을 때, 제자들은 나에게 엉뚱한 소릴 잘한다고 말하곤 했다. 나는 이 ‘엉뚱하다’는 말을 좋아한다. 시인은 엉뚱해야 한다. 그 당시 나는 주름 늘어가는 걸 걱정하는 여제자들에게 “동안 가꾸려하지 말고 동심을 가꾸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여제자들은 무슨 엉뚱한 소리냐고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지금은 그들도 알게 되지 않았을까. 동심이 얼굴을 동안으로 만든다는 내 엉뚱한 말의 진실을.
실은 신도 얼마나 엉뚱한가. 신은 사람들이 바라는 대로만 나아가지 않는다. 착한 사람들이 사는 땅에 천재지변을 일으키는 오작동을 범할 때가 숱하다. 신은 결코 전지전능하지 않다. 신은 어쩌면 실수와 실패를 거듭하는 자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신을 본떴다는 인간이 이 모양으로 사는 것 아닐까. 전지전능한 신이라면 인간을 이렇게 만들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완벽하다면 이렇게 전쟁과 슬픔과 아픔 속 신음소리 높아지게 놓아두지 않을 것이다. 신의 엉뚱함으로 오늘을 사는 우리가 몹시 고통스럽다.
나는 다른 이보다 더 예민해서 신의 엉뚱함에 더 많은 피해를 입고 있다. 한 뼘은 더 슬프고 한 뼘은 더 아프다. 참 다행스러운 것은 내가 시를 쓴다는 사실이다. 시는 내게로 온 이와 같은 숱한 곡절들을 긍정의 에너지로 바꾸어준다. 신의 엉뚱함이 나를 시인으로 만들었다고 할까. 그런 점에서는 나는 시의 탐험자이며 아직 태어나지 않은 수많은 미래의 내 세계를 품은 자궁인지도 모른다.
시인은 이처럼 탐험하는 자이기도 하고 자궁을 가진 자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우주의 작은 기척에도 스스로 떨리고 반응하는 자이다. 이 반응들을 예리하게 기록할 때 시는 태어난다. 그렇기 때문에 이를 내밀하게 받아들인 시작품을 평할 때 신의 경지라는 말을 쓰는 것이다. 우리가 작품들에서 흔히 접하는 ‘전지적 작가 시점’은 이를 양식화한 시적 구성방식이다. 전지적 작가시점에 의한 작품들은 화자가 신이라도 된 것처럼 작품 전체에 관여한다. 나이기도 하고 너이기도 그이기도 하고 심지어는 사물이 되기도 한다.
2.
시인은 또한 온몸으로 세상을 밀고나가는 자이기도 하다. 온몸으로 삶의 현장인 일상에 부딪쳐가는 사람이 시인인 것이다.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해나가야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시인도 마찬가지이다.
땀 흘리며 쇼핑백 로고를 디자인해 안치다가 원고청탁 전화를 받았다. 낯선 분야에 도전한지 벌써 3개월째다. 어찌나 섬세함과 긴장과 집중을 요구하는 일인지 마치 시를 쓰는 것과 다름없다.
지난 가을, 5번째 시집 『달콤한 호흡』을 내고 난 뒤, 아날로그형 인간인 나를 디지털인간으로 바꾸고자 했다. 이 세상을 달콤하게 호흡하기 위해서는 먼저 디지털 세상에 진입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나는 디지털 문맹인 나에게 도전장을 쥐어주었다. 그러고는 컴퓨터 학원 일러스트, 포토, 인디자인 취업반에서 4개월을 보냈다.
오전 8시 반까지 도시락을 싸서 등원하고 저녁 6시 학원을 나서는 생활이었다. 지루하고 긴 겨울 동안 인공눈물을 넣어가며 가습기를 틀어놓고 배웠다. 운동도 그만두고 약속도 만들지 않고 배움에 몰입했다. 어깨도 아프고 목도 아팠다. 종일 컴퓨터와 놀았다. 함께 배우던 40대 남성은 쉴 나이인데 웬 생고생이냐고 농담을 던졌다. 내 나이가 어때서? 나는 이를 악물었다. 더 해내고 싶은 오기가 생겼다.
젊은이들 틈에서 새로운 기술을 배우고자 한 것은 오로지 살아내기 위해서였다. 디지털 세상으로 변해가는 환경 속에서 살아남으려면 나를 바꾸어야 했다. 힘센 공룡이 멸망한 것도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프리카 개발로 초원이 줄어들면서 설 땅이 없어지는 치타처럼 아날로그인 채로는, 여기에 설 땅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나는, 오십대 중반임에도 직업 디자이너로서 첫 발을 내딛게 되었다.
지금 와서 뒤돌아보면 난 참으로 많은 직업을 거치며 여기까지 왔다. 중국어 강사, 광고 카피라이터, 독서코칭 강사, 신문기자, 학교 선생님, 병원 근무, 그리고 디자이너.
이렇게 온몸으로 느끼고 겪었던 경험과 삶은 내게 시로 자라났다. 내게 맺혀진 온갖 힘겨움과 아픔, 슬픔과 인내가 시로 승화된 것이다. 시에 몰두하는 순간만큼은 현실을 잊을 수 있었다. 시는 종교처럼 나를 구원해주곤 했다. 삶의 외곽으로 밀려나는 순간에도 시는 놀라웠다. 모든 것을 견디고 지나갈 수가 있었다.
소외를 통해 나는 아주 작고 힘없는 생명들에게 눈 기울일 수 있었다. 물질이 가난해져도 마음은 넉넉한 자로 사는 법을 깨달았다. 어떤 일을 하면서도 시를 병행할 수 있었다. 시에는 정년이 없지 않은가.
한 곳에 제대로 뿌리를 내려야 삶이 안정되나 시에게는 이와 같은 안정성이 그리 달갑지만은 않을 것 같다. 내 경우, 시를 쓰는 데는 불안이 더 나은 결과를 가져오기도 했다. 시는 나에게 끊임없이 경험에 투자하는 삶을 살라고 속삭였다. 상처나 실패, 불행이나 실수도 나에겐 스펙이 되어 간절한 시의 자양분이 되어주었다.
내가 좋아하는 고흐나 프리다 칼로, 실비아 플라스 등도 생전에 얼마나 아프고 힘들었던가. 그럼에도 그들의 그림과 시가 우리 가슴을 울리는 이유는 그들의 아픔이 그림과 시에 녹아 승화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예술가들을 불행을 먹고 사는 사람들이라 여긴다. 그렇게 생각해서일까. 고난이 닥쳐와도 바라볼 수 있는 힘이 얼마쯤은 생긴 것 같다.
아마도 이러한 힘은 다양한 직종을 전전한 덕분 아닐까. 웬만해서는 흔들리지 않을 자신감이 내심 가라앉아 있다. 마치 백조처럼. 한가롭게 물위에 떠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백조의 물갈퀴는 쉬지 않고 물을 가르고 있다. 이런 게 바로 겉의 평화와 안의 바지런함일 것이다. 내 삶의 지혜는 이처럼 다양한 삶과의 끊임없는 분투와 노력 속에서 생성되었다. 이것들이 또한 내 시의 중심이 되었음은 말할 필요조차 없다.
3.
시는 나를 충족시킨다. 내가 지은 시의 집이 허술하다고 하더라도 나를 살게 하는 건 내 시들이다. 나는 내 시 안에서 시와 함께 살아간다. 수영 선수들이 물 먹는 연습을 불사하듯 바닥에서 온몸으로 상처를 감당하면서.
탐험과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는 내겐 삶의 현장들이 시의 현장들이다. 학교에선 기간제 교사들의 불합리를 알게 되었으며 요양병원에선 삶과 죽음을, 정신병원에선 우울증과 알콜중독자 등 정신이 아픈 사람들의 고통을 체감했다. 내가 겪은 수많은 현장들은 여전히 내게 다가와 현장의 소리들을 전한다. 그곳에서 일어나던 각종 이야기와 사건들은 아직도 내 가슴을 일렁이게 한다. 이런 게 바로 시의 그리움이며 시의 싹이 아닐까.
그런 점에서 시인은 천지간에 그리움을 앓는 자일 것이다. 아마도 시인은 평생 동안 무엇인가를 그리워하며 사는 존재가 아닐까. 그리움의 대상이라고 하는 모든 것들은 붙잡는 순간, 허깨비가 되기 때문이다.
시인이 그리움을 앓는 자라면, 신은 아마도 하늘과 땅 사이에 그리움이 가득하게 하는 자일 것이다. 이렇게 나눌 경우 앓는 자와 앓게 하는 자로 구분되는 것 같지만, 실은 이 둘은 하나다. 그리운 자나 그립게 하는 자나 다 그리움의 포로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시인은 신이며 신 또한 시인이다. 따라서 그리움을 잃고 살다가도 문득 그리움이 내안에 가득 차오면, 신이 오셨다고, 나의 뮤즈가 납셨다고 느끼게 되는 것이다. 아마도 그러할 때에는 그가 누구든 간에 원고지를 마주하지 않을까.
이렇게 생각하면 시인은 신의 말씀을 지상에 사는 이들에게 전달하는 매개자인 것도 같다. 그 옛날 주술사들처럼, 무당들처럼, 신의 어떤 계시를 알려주는 자들이 아닐까 싶은 것이다. 그래서 시인들이 불행한 사회는 그 사회도 틀림없이 불행하다. 시인들이 전하는 하늘의 소리, 자연의 질서나 자연의 이치를 귀담아 듣지 않기 때문이다. 시는 그런 면에서 볼 때, 쓸모없음의 쓸모있음이다. 시는 우리에게 ‘내가 나로서 나를 살아가게 하는 밥’인 것이다.
날마다 최선을 다해서 살아도 뜻대로 되지 않는 게 인생이라고 여기는 이여, 그러니 이제 시를 살아라. 늘 영혼이 말라간다고 느끼는 이여, 시를 살아라. 시는 신의 소리, 시인의 입김이다. 누구나 시인으로 태어난다고 하지 않던가. 시를 사는 동안 당신의 정신은 풍요로워질 것이며 입가는 늘 촉촉해질 것이다.
*안명옥 2002년 《시와시학》으로 등단. 시집 『칼』, 『뜨거운 자작나무숲』, 『달콤한 호흡』. 서사시집 『소서노』, 장편 서사시집 『나, 진성은 신라의 왕이다』. 창작동화 『강감찬과 납작코 오빛나』, 동화 『금방울전』 『파한집과 보한집』. 역사동화 『고려사』. 성균문학상, 바움문학상 작품상, 만해 ‘님’시인상 우수상, 김구용시문학상, 베스트 멘토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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