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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호/특집2 시인은 신인가, 시시한 사람인가/박진형/시인은 신도 아니고, 시시한 사람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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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부관리자
댓글 0건 조회 947회 작성일 20-01-23 1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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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호/특집2 시인은 신인가, 시시한 사람인가/박진형/시인은 신도 아니고, 시시한 사람도 아니다


박진형


시인은 신도 아니고, 시시한 사람도 아니다



1. 첫머리
시인은 신인가 시시한 사람인가? 이것은 시인에 대한 정의를 묻는 질문이면서, 시의 본질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도대체 시인은 누구이고, 시란 무엇인가?
시인에 대한 정의를 내리기에 앞서 시인은 무엇으로 사는 사람인가 먼저 묻는다. 당연히 시인은 시를 쓰는 사람이다. 시를 쓰는 사람이 있다면 시를 읽는 사람이 있는 것이다. 시인은 독자와의 관계 속에서 존재이유를 찾는 사람이다. 즉, 시-시인-독자라는 삼각의 틀에서 생각해 보아야 시인은 신인가 시시한 사람인가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2. 시
어쩌면 시에 대한 정의가 필요한 시대는 지났는지도 모른다. 시는 정의 되는 순간 사라지거나 시가 아닌 다른 무엇인가가 되는 신기루 같은 것이다. 현대시는 고전시와 달리 일정한 틀에 가둘 수 없는 무정형이 특징이다. 따라서 시에 대한 선입견이나 고정 관념을 버리는 것이 필요하다. 시는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시는 언어의 근원에 가장 근접한 예술이다. 비평계나 학계에서 시에 대한 이런 저런 분류를 하고 있지만, 비평이나 연구가 시의 본질을 밝히는 데는 부족하다.
시인 옥타비오 파스에 의하면 시는 순간의 성화聖化이다. 시로 옮기면 소멸될 순간도 영원히 살아남게 된다. 시는 사물을 재발견하게 해 준다. 시는 시인으로 하여금 자신을 돌아보게 만드는 자기성찰의 예술이다. 흔히 시는 아름다울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시는 인간의 모든 것을 다루기 때문에 때로 수치스럽거나 굴욕적일 수도 있다.
“아우슈비츠 이후에 서정시를 쓰는 것은 야만이다.”라는 테오도르 아도르노의 유명한 말이 있다. 나중에 그는 스스로 그 말의 의미를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다고 밝힌 바가 있다. 그의 의도는 그러한 폭력의 시대에 문화의 부활이라는 것이 얼마나 공허한지를 지적하기 위한 것이었지, 서정시를 쓰지 말라는 뜻은 아니었다. 어찌되었든 현대 사회에서 시 쓰기의 무거움을 느끼게 해주는 말이다.


3. 시 쓰는 사람
플라톤은 『국가』에서 시인추방론을 폈다. 예술의 모방적 특질과 시의 부정적 측면을 비판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의 긍정적인 측면에 주목했지만, 시에 철학만큼의 위상을 부여하지는 않았다. 시적 상상력과 철학적 사유는 곧잘 충돌하기 때문이다.


시인은 시를 쓰면서 스스로 행복하다고 느끼기보다는 저주 받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프랑스 상징주의 시인 중 대표 시인인 샤를 보들레르는 「알바트로스Albatros」라는 시를 통해 시인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밝히고 있다.


시인은, 폭풍 속을 자주 드나들고 활 쏘는 사람을 비웃는
저 큰 구름들의 왕자를 닮았다.
야유의 한가운데서 지상에 유배되어
그들은 그의 커다란 날개들 때문에 걷기조차 힘들어 한다.


─「알바트로스」 부분, 필자 번역


시인은 하늘을 나는 창공의 왕자 알바트로스지만, 지상에 내려서는 서툴고 부끄러운 몸짓으로 커다란 흰 날개를 배의 노처럼 가련하게 질질 끄는 신세인 것이다. 보들레르는 이 시에서 현실에서 낙오되어 비웃음을 당하는 시인의 운명에 대해서 한탄하고, 이상과 현실의 괴리에 괴로워하는 시인의 모습을 비유적인 이미지로 제시한다. 그는 신천옹의 모습을 통해 답답한 현실세계에서 벗어나 이상세계에서 자유인이 되려고 처절하게 시도하지만 현실에서는 시시한 존재로 살아가는 시인의 모순된 운명을 잘 그려내고 있다. 요컨대, 알바트로스는 세속적 삶 속에서 제대로 역할을 할 수 없는 무능한 시인의 상징이다. 그에 의하면 시인은 신이라기보다는 시시한 존재에 가깝다.
현실 세계에서 생활인으로서의 시인의 무능함은 자타가 공인하는 바가 아닌가. 시인의 평균 소득은 최저임금에도 훨씬 못 비치는 바, 경제의 측면에서는 시인은 시시한 존재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김수영 시인은 자기 자신이 시시하고 하찮은 시인이라고 그의 시에서 자주 고백한다.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왕궁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
50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 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하고(중략)

모래야 나는 얼마큼 작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작으냐.
정말 얼마큼 작으냐


─「어느 날 고궁古宮을 나오면서」 부분


김수영은 자주 일상적이고 사소하고 본질적이지 못한 것에 대해서 예민하게 반응하면서 정작 맞서 싸워야 할 중요하고 본질적인 사건에 대해서는 외면하고 방관하는 시인 자신의 허위의식을 폭로하는 시를 쓴 것이다.


독자들을 의도적으로 불편하게 만들면서, 현대 사회의 위악성을 폭로하고, 전면적인 자기 폭로의 길을 걸어 온 장정일 시인은 시인을 ‘쉬인’이라고 희화화하기까지 한다.


그런데 내 내가 누 누구냐구요?
아아 무 묻지 마쉽시오
으 은 유 와 푸 풍자를 내뱉으며
처 처 천년을 장슈한 나 나 나는
쉬 쉬 쉬 쉬인입니다요


─「쉬인」 부분


반면에, 시인이 신과도 같은 위상을 지닐 수 있음을 백석 시인과 김영한의 관계에서 엿볼 수 있다. 영어교사로 재직 중이던 백석은 술자리에서 기생 김영한을 보고 반하게 된다. 그는 이태백의 시집 『자야오가子夜吳歌』에서 영감을 받아 그녀를 자야子夜로 부르며 “오늘부터 당신은 영원한 내 여자야.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기 전까지 우리에게 이별은 없어.”라고 말하지만, 신분의 차이로 사랑은 이루지 못한다. 자야는 백석의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에서 나타샤로 나타난다.
백석은 월북해서 초라하게 죽지만, 남녘에 남은 자야는 대원각이라는 고급 요릿집을 세워 엄청난 부를 축적한다. 그녀는 법정 스님의 『무소유』를 읽고 감명을 받아 조건 없이 대원각을 시주한다. 대원각 자리에 길상사라는 절이 들어선다. 길상사 낙성 법요식 때 어떤 기자가 그녀에게 “막대한 재산을 기부한 것이 아깝지 않습니까?”라고 물었을 때, 그녀는 “그까짓 천억 원, 그 사람 시 한 줄만 못해! 다시 태어나면 나도 시를 쓸 거야.”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시인은 시를 통해 독자에게 단 한 번의 감동으로 평생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주기도 한다. 자야에게 백석은 그렇듯 신과도 같은 존재였다.


4. 시 읽는 사람
시인들이 세상에서 모두 사라지면 어떻게 될까? 상상만 하더라도 끔찍한 일이 벌어질까? 만약 시인이 없는 세상이 끔찍해 진다면 시인은 세상을 구원하는 신이란 말인가? 신은 아니지만, 시인이 사라진 후에도 시는 살아남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시인은 시시한 존재이면서도 어느 정도 신적인 면모를 지니고 있는 존재이다.
프랑스 가수 샤를 트레네가 부른 후 여러 가수들이 불렀던 「시인들의 혼L’âme des poètes」이라는 샹송은 시인들이 사라지고 난 후의 일을 노래하고 있다.


시인들이 사라지고 난 후
오랫동안, 오랫동안, 오랫동안
그들의 노래는 여전히 거리에서 울려 퍼진다
군중은 조금은 어수룩하게 그것을 부른다
저자의 이름도 모르면서
누구의 마음을 두드리기 위한 것인지도 모른 채
때로 하나의 낱말, 하나의 구절을 바꾼다

그리고 잘 생각나지 않으면
사람들은 흥얼거린다 라 라 라 라 라 라


─「시인들의 영혼」 부분, 필자 번역


시인들이 사라지고 난 후 사람들은 그저 건성으로 노래를 부른다는 내용이다. 과장해서 해석하자면 일반 독자들이 시를 대하는 태도를 잘 보여주는 노래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시인이 독자를 무시할 수는 없다. 독자 없는 시인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시를 시인만이 소비한다면 일기와 다를 바 없을 것이다. 독자와의 소통, 독자의 수용을 통해 시는 생명을 부여 받는 것이다.
시인들은 섬세한 마음과 시로써 사람들을 즐겁게도 하고, 슬프게도 한다. 그것이 바로 시의 역할이다. 가끔 시문을 잊어버리고 시행을 빼먹더라도 독자들은 시를 통해 희로애락의 정서적인 반응을 하게 된다. 이것이 시의 생명력이 아닌가.
시인은 고급 독자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일반 독자도 필요하다. 시를 향유하는 것은 독자의 몫이고 모든 독자들에게 시인은 다소간의 권위를 갖게 되는데, 그것이 시인의 위대성이자, 신과 같은 위상이기도 하다.


한편, 보들레르는 「독자에게Aux lecteurs」라는 시에서 독자와 시인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대는 그것을 알리라, 독자여, 이 까다로운 괴물을
위선적인 독자여, 나와 닮은 이여, 내 형제여!


─「독자에게」 부분


결국 시인은 독자에게서 동류이자 형제와도 같은 유대감을 느낀다고 볼 수 있다.


5. 끝머리
시인은 신인가 시시한 사람인가? 시인은 신과 시시한 사람의 양면성을 모두 가지고 있으며, 또한 신도 아니고 시시한 사람도 아니다. 어찌 보면 인간이란 천사도 아니고 악마도 아니지만, 생각하는 갈대라고 밝힌 블레즈 파스칼의 관점과 유사하기도 한 결론이다.
그렇다면 나는 왜 시를 쓰는가? 구체적인 답변 대신 르네 데카르트의 유명한 명제 ‘Cogito ergo sum’을 패러디 하며 이 글을 맺고자 한다.


Scribo ergo sum.(나는 쓴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박진형 2016년 《시에》로 등단. 2019년 국제신문 신춘문예 시조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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