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토피아 - (사)문화예술소통연구소
사이트 내 전체검색

수록작품(전체)

25호/특집2 시인은 신인가, 시시한 사람인가/이성필/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부관리자
댓글 0건 조회 789회 작성일 20-01-23 11:53

본문

25호/특집2 시인은 신인가, 시시한 사람인가/이성필/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이성필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부지런한 계간지 가을호가 한 권 우편함에 도착해 있는데, 가을호 원고청탁을 받았다. 촉박하다. 촉박하다는 건 시간의 촉박이기도 하겠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을 수 있다. 지식의 촉박, 견문의 촉박, 경험의 촉박, 사색의 촉박, 사고의 촉박이다. 이런 촉박에 자유롭다면 단시간에 청탁원고를 일필휘지一筆揮之로 써 내려갈 것이다. 내게 권해진 건 전통적 관례로 볼 때 산문인데 산문과 운문 중 어느 것이 더 쉽게 써질까? 풀릴까? 촉박이 준비된 상황에서는 어느 것이 물꼬를 먼저 찾아서 터지느냐일 터이지만 그 촉박이란 게 어디까지가 완전한 준비인지도 모르겠다. 촉박이 늘 준비되어 있는 사람은 대단한 사람인데 이 대단한 사람이 시를 쓰면 대단한 시를 쓸까? 그렇다면 늘 촉박이 준비된 사람이 대단한 시를 써서 대단한 시인의 반열에 우뚝 설까? 미안하게도 내가 알고 있는 바로는 다 그렇지는 않다. 산문에 대단한 비평가나 평론가 수필가들 중에서 운문인 시나 시조를 잘 쓰는 사람은 손가락에 꼽을 정도이다. 그러므로 어느 게 더 어려운지도 모르겠다는 것이다.
내 자신은 감성적인가 감상적인가에 대해 골똘히 생각해 본 적이 있다. 이는 글쓰기에 치명적 영향을 준다. 아무리 촉박에 자신이 있는 사람일지라도 이 천성적에 가까운 감성적인가, 감상적인가가 자신이 써내는 글의 운명을 가른다. 천성적이라 했는데 후천적이 연습이라면 천성적 감성을 작품에 보이는 시인은 태어나기 전 어디에서 연습을 하고 세상에 나온 것일까? 참 궁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 시인이 신인가? 에도 궁금증을 던진다. 시인이 신이라면 이 생 전 어디에서 촉박을 준비했을까? 이 생 전 어디에서의 촉박의 준비가 아니라면 이 한 생은 너무 촉박하지 않을까, 사람이 시인이 되고 시인이 신이 되기까지는.


올해가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 출간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데미안』은 1919년 출간 되었고 아직까지도 꾸준히 읽히는 소설이다. 월드스타 BTS(방탄소년단)가 두 번째 앨범 「Wings」의 ‘피 땀 눈물’의 뮤직비디오를 만들면서 「데미안」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밝혔듯이 「데미안」은 지금도 젊은 영혼의 심금을 울리는 경전이다. 헤세는 1962년 세상을 떠났다. 그 다음 해에 나는 태어났다. 그냥 그렇다는 것이다. 그냥 그렇다는 것을 위안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 그 사람들에게 헤세는 오늘도 말한다.


“새는 투쟁하여 알에서 나온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세상은, 세계는 그저 위안으로만 살아지는 게 아닐 것이다. 그저 아침마다 일어나 하루하루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다. 바라본다, 에는 일명 4찰 관찰, 고찰, 통찰, 성찰이 있다. 세계(알)에서 깨어나는 정도程度의 경도徑道로서 시 쓰기의 한 방법들이다. 관찰-사물의 현상이나 동태 따위를 주의하여 잘 살펴 파악하는 행위. 고찰- 대상 따위를 깊이 생각하여 음미하고 생각을 펼쳐가는 것. 통찰-예리한 관찰력으로 사물을 환히 꿰뚫어 봄으로서 자기를 둘러싼 내적 외적인 전체 구조를 새로운 시점에서 파악하는 일. 성찰-자신의 일을 반성하며 깊이 살펴 대상 속에 자아를, 자아와 자아의 관계를 살피는 일. 관찰, 고찰, 통찰은 오직 대상만을 보는 행위이다. 자아는 대상에서 제외 되어있다. 성찰은 보는 대상 속에 자아를 포함시킨다.


잃어버렸습니다  무얼 어디다 잃었는지 몰라  두 손이 주머니를 더듬어  길에 나아갑니다 
돌과 돌과 돌이 끝없이 연달아  길은 돌담을 끼고 갑니다  담은 쇠문을 굳게 닫아  길 위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길은 아침에서 저녁으로  저녁에서 아침으로 통했습니다
돌담을 더듬어 눈물짓다  쳐다보면 하늘은 부끄럽게 푸릅니다  풀 한 포기 없는 이 길을 걷는 것은  담 저쪽에 내가 남아 있는 까닭이고  내가 사는 것은, 다만,  잃은 것을 찾는 까닭입니다


─윤동주 시 「길」 전문
 
 거울속에는소리가없소
 저렇게까지조용한세상은참없을것이오
 거울속에는내게귀가있소
 내말을못알아듣는딱한귀가두개나있소
 거울속의나는왼손잡이오
 내악수를받을줄모르는 악수를모르는왼손잡이오
 거울때문에나는거울속의나를만져보지도못하는구료마는
 거울이아니었던들내가어찌거울속의나를만나보기라도했겠소
 나는지금거울을안가졌소마는거울속에는늘거울속의내가있소
 잘은모르지만외롭게사업에골몰할게요
 거울속의나는참나와는반대뇨마는
 또꽤닮았소
 나는거울속의나를근심하고진찰할수없으니퍽섭섭하오


 ─이상 시 「거울」 전문


본질적 자아를 찾기 위한 노력의 시 두 편이다. 현실적 자아(일상)와 본질적 자아(내면)에서 사람(시인)은 늘 흔들리며 산다.
  
산에는 꽃 피네
꽃이 피네
갈봄 여름 없이
꽃이 피네
 
산에
산에
피는 꽃은
저만치 혼자서 피어있네


산에서 우는 작은 새여
꽃이 좋아
산에서
사노라네


산에는 꽃 지네
꽃이 지네
갈봄 여름 없이
꽃이 지네


─김소월 시 「산유화」 전문


이 시의 절창은 2연의 ‘저만치’이다. 저만치는 방관적 거리이며 나와는 상관없이 나의 관심과 무관하게 물상이 존재하는 곳이다. 저만치에서. 나이를 먹으면서 더욱 선명해지는 사람과 사람의 간극, 물상, 자연과 사람의 간극이 고적하다. 어떤 수단으로도 방법으로도 힘으로도 다가설 수 없는 곳, 다가섰다 싶다가도 멀어지는 저만치의 거리는 늘 아프다. 슬프다. 사람은 존재론적으로 슬픔을 안고 태어난다. 세상에 나올 때 울지 않으면 죽는다.울지 않으면 볼기짝을 탁, 때려서 울게 한다. 살리는 방법이 울리는 것이다. 슬픈 존재임을 기억하라는 것이다. 꽃을, 사람을, 가까이에서 보는 것 보다 적당한 거리, 저만치에서 볼 때 그윽하다. 더욱 아름답다. 그립다. 나는 시를 무지개라고 생각했다. 어릴 적 여름 소나기 지나간 뒤 고향집 앞산에 뜨던 무지개, 그 순수한 고운 아름다운 빛이라 생각했다. 그러다가 김소월의 시 「산유화」를 읽고 ‘저만치’를 감흥感興하고 왜 내가 시를 무지개라 생각하며 살았는지를 비로소 알게 되었다. 유년 시절 어린 마음에 고향집 앞산에 무지개가 뜨면 그 무지개를 잡으러 앞산에 올랐던 기억, 무지개 앞산에 오르면, 무지개는 저만치 물러나 있고, 다가가면 또 저만치 멀어지던 기억. 그게 나는 자꾸 아쉬웠던 것이다. 그리웠던 것이다. 그래서 외로웠던 것이다. 슬펐던 것이다.


물론 나는 알고 있다 오직 운이 좋았던 덕택에
나는 그 많은 친구들 보다 오래 살아남았다
그러나 지난 번 꿈속에서
이 친구들이 나에 대하여 이야기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강한 자는 살아남는다.”
그러자 나는 내 자신이 미워졌다


       ─브레히트 시 「살아남은 자의 슬픔」 전문


강해서 살아남았음마저도 내 자신이 밉다고 슬퍼하는 존재, 시인. 시인은 늘 슬픈, 슬픔의 존재다. 눈물이 많은 게 아니라 슬픔이 깊은 존재, 세상에 처음 나올 때의 울음에 더 가까이 깊어가는 존재이다. 결코 시시하지않다. 그렇다고 해도 시를 쓰는 시인이 신은 아닐 것이다.
‘시는 신의 말이다’(I.S투르게네프/루딘) 했지만 시가 신의 말을 해준다는 것이지 시인이 신이라는 건 아니다. 시인은 자신의 속내를 반성을 시인하는 사람이다. 시인한 것을 시로 드러내어 보여주는 사람이다. 시인이 신은 아니지만 결코 시시한 사람도 아니다. 헤세가 말했듯이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그렇다. 시인은 성찰로서 자아를 찾아 언제부터인지 지금도 신에게 가까이 다가가고 있다.





*이성필 2018년 《리토피아》로 등단. 시집 『한밤의 넌픽션』. 본지 편집위원.

추천0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사)대한노래지도자협회
정종권의마이한반도
시낭송영상
리토피아창작시노래영상
기타영상
영코코
학술연구정보서비스
정기구독
리토피아후원회안내
신인상안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