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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호/신작특선/정동철/뽕나무는 나와 외 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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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호/신작특선/정동철/뽕나무는 나와 외 4편
정동철
뽕나무는 나와
뽕나무는 나와 사랑을 나누는 것을 좋아한다
처음엔 달빛이 어룽대는 줄 알았다
연초록의 빛나는 어깨를 가진 뽕나무가 슬쩍 내 창문에 기대었을 때,
밤마다 뽕나무가 창문을 두드리다 돌아가는 것을 알지 못했다
창문을 열자 와하하하하 쏟아지는 달빛에 빼뚜름하니 서 있었다
잎사귀를 맛보고 잎맥을 더듬었다 물관을 타고 올라오는 뒷면의 목청에 귀 기울였다 옹이를 핥았다 그물맥들이 시큼했다 둥글고 오목해지는 물방울들, 탱탱하고 도드라진 소름들, 앙칼지고 섬세한 그러나 은밀하고 외로운 것들을 사랑하였다
그림자가 드리워지면 뽕나무를 불러들여 차를 내리고 장감장감 얘기를 나누다가 찰방찰방 밤을 지샜다.
기다리는 편지
산으로 간다
세상으로부터
고립되기를 원했으나
세상이
나를 버려서
가을 산으로 간다
아무래도 당신은
기다리지 않기로 했다
단풍잎으로
발자국을 덮으며
세상 가는 길을 쓸어내며
나를 벌하러 간다
아무래도 당신은
올 리가 없다
햇살 물감
울타리를 넘어 온 햇살을 베어다
곳간에 쌓아두었다
처마 밑에서 빗물이 뚝뚝
떨어지던 구름이 어느새
꾸덕꾸덕 말라갔다
은행나무 이파리들을 모아
문풍지를 발랐다
바람이 불 때마다
무릎이
노랗게 물들었다
사방 연속무늬 속에 갇힌 새들을 풀어놓고
창가에 비친 햇살을 불러다
벽에다 바르며 놀았다
시월 햇살은 추운 겨울날을 기다려
나를 물들이는 것을
제일 좋아했다
연밥
다른 꽃들은
꽃잎이 지고 나면
씨앗을 품는데
그나마 품지도 못하는
꽃만도 못한 것들도 있는데
연꽃은 밥을 짓는다
몸에 좋으라고
까만 잡곡까지 섞어
뜸을 들인다
쩨쩨하게 한두 그릇도 아니고
밥 한 솥을 통째로 내 놓는다
나는 누구한테
따듯한 밥 한 술도 되지 못하는데
생각하니 문득
연꽃이 피듯 화다닥
양 볼이 달아오른다
어렸을 적엔 연잎을 우산 삼아
빗속을 뛰어다닌 적도 있다
가을비
술이 한 번도
내 영혼을 구원한 적 없다
술을 마시면서
묻는다
왜, 마시는 거냐
묻다가
서러워져 한 잔 더 마셨다
가야산 골짜기 가득
가을비가 들이치는 풍경
물끄러미 바라본다
■시작메모
한 일 년을 혼자 보냈다. 찾아오는 사람도 없고 찾고 싶은 사람도 없었다. 우둑하니 초막에 앉아 나를 가뒀다. 처음 며칠은 잠을 이루지 못해 꼬박 날을 지새운 적도 있었고 전화기 벨이 울리는 환청이 들리는 듯해서 자꾸 없는 전화를 찾아 앞뒤 마당을 서성거리기도 했다. 대책 없이 누군가가 그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누가 찾아오는 것 아닐까 싶어 때때로 울타리 너머를 넘어다보기도 했다.
아무도 나를 찾아오는 이가 없었다. 비로소 나는 혼자가 되었다.
혼자가 되니 보이지 않는 것들이 보였다. 뽕나무 그림자가 밤마다 내 창에 어룽거리는 것을 알았다. 뽕나무를 불러들여 차를 마시고 사랑을 나누었다. 뽕나무가 밤새 끌어올리는 수액과 뽕 이파리를 타고 흐르는 달빛의 속삭임, 그 둥글고 오목한 대화를 들을 수 있었다. 세상으로부터 고립되기를 원했으나 내가 버림받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기다리지 않는 것의 기쁨을 알게 되었다. 내 속에서 세상으로 나가는 길들이 지워졌다. 내 속에 갇힌 나를 풀어주는 일이 조금은 쉬워보였다. 바쁘지 않게 살아가는 법을 알게 되니 햇살에 기분 좋게 내가 물들여졌다. 일부러 마음을 붙잡으려 하지 않으니 마음이 들뜨지도 않아서 좋았다. 마음이 가자는 대로 따라가 보았다.
생각해보니 즐거운 幽閉의 나날들이었다.
*정동철 2006년<광주일보>,<전남일보>신춘문예 시부문 동시 당선. 시집 『나타났다』. 2014년 작가의 눈 작품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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