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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호/신작특선/윤병주/산목련에게 외 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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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호/신작특선/윤병주/산목련에게 외 4편
윤병주
산목련에게
비가 언 나뭇가지 사이를 지나고 나니
봄 하늘이 송사리 떼가 지나간 물처럼 투명하다
봄 농사일이 한참인데
나는 몸이 아프고 밥맛이 씁쓸하다
이 사바세계에서는 살아가는 동안은
몸도 하나의 물질이라
가끔은 척도를 벗어난 곳을 고치고 달래며
살아가야 하는데
산맥의 바람과 후미진 곳에 몸을 숨겼던
새벽녘까지 한낮의 뜬 별처럼 바람을
삭히며 나무 위 꽃들이 몸을 열어 놓았다
한 몇 날을 깊은 잠에 들어서지 못하고
한 통점을 바라보며 무엇을 해서
먹고 살아야 하는데 아픔이 지나고 나니
고단한 낙타가 살아온 짐을 벗고
헐렁한 옷을 입은 듯이 큰 영을 넘은 듯이
바람의 공적으로 핀 꽃들이 가까이 와 있다
나는 꽃잎이 구름처럼 살고 있는 이 산중의
바람에 밀려온 사람처럼 혼자 술을 마신다
안반대기*
처음부터 길은 없었다
한 계절 빠른 기온의 배추와 감자를 찾은 도시 사람들이
웃돈을 얹고 조직이 단단한 고랭지 맛을
사들이는 사람들로 인해
산골 밭은 투기농사가 되었고
자본의 갈등을 생산하는 곳이 되었노라고 변덕스러운
고원의 구름이 내 문장을 질끈 밟고 지나친다
먼 옛날 이곳은 산짐승들이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는 그들의 생존터였다
비와 구름은 적당했고 서로의 영역을
넘지는 않았다 지금은 먹이사슬에
밀린 짐승들이 이 산밭에
걸리여 죽기도 하는데 산그늘이 깊어지면
산밭의 주인들이 찾아와 이름 모를 귓속의
바람 소리를 깨우고
웃자란 감자꽃처럼 산막집을 흔든다
풀빛이 짙어지면 이곳은 길어진 햇살들을
묻고 사는 일손들의 무덤이 되기도 한다
밤새 돌과 새들의 소리를 퍼 나르기도 했을
한 세대를 건너간 사람들은 별자리가 회전하는 동안,
제 가슴 한 쪽 퍼먹고 자란 뻐꾸기 소리들은
감자알처럼 또록이던 어느 고단했던 밭을
두고 어디를 지나왔나
이 산중의 일과 꿈도 깊어지면 병이 되고 남은
밤하늘 별을 쏘아 올릴까
너무 늦게 알아차린 숲에 버려진
녹이 슨 농기구들 같이 품세 바람이 부는 날
한 시절 버린듯한 허공에 걸린
저녁밥 짓는 집들이 가묘같이 서서
천길 끄트머리 어둠에 베고 잠긴다
나는 가끔 이 산밭의 평등한 바람은 한적한
공적을 쓰지만
가끔씩은 어느 생물 묻은 지나간 생이 와 담기도 한다
* 안반대기 : 강릉에서 제일 높은 곳에 있는 고랭지 산밭이다.
지나온 날을 지리산에 두고 오다
큰 산 하나만 넘어도
안 보이는 세상 풍경이 울고
해질녘 눈물나는 산골짜기 운해들이
바다처럼 살고 있는 데
나는 너무 많은 날을 한 곳에서만 살아왔구나
해마다 외롭다고 목 쉰 새들과 꿀을 몇 병 얻은
한 계절을 넘기며 깃털처럼 부드러운 어스럼을
뒤에 세워두고 살았구나
어떤 날은 잠이 들지 못하고 남녘 가는 날을
생각하며 소같은 눈을 가진 어둠을 내려다보기도
했는데, 나는 지금 멀리와
바람에 몸을 뒤집어 멀어지는 나뭇잎들을 보며
그래도 가족보다 며칠 더 이 깊은 산으로
가고 싶은 것은, 내 삶이 어딘가에서 상처를 입었기 때문이다
이게 사는 것이라며
철새같은 생을 떠메고 날아온
지리산 찻숲 마을에서 지는 해 바라보며 첫 눈을 바라보며 섰는데
너무 일찍 지리산에 온 것인지
먼 외딴 집 감나무 잎들이 감들이 낮에 뜬 별처럼
내가 지나온 길들이 가까이 보였다
소나기
물의 노래를 듣는 다
막막한 습기에 갇힌 채
가을을 향한 모든 기류들이 순해진
잃어버린 사람들의 저녁을 생각해본다
산기슭에서 바닷가 나무들이 서 있는
빗줄기 낮게 포복하는 비의 함성을 얻고 듣는다
낮게 내려오는 비의 노래를 낮은 풀들이
건너가고 있다 건너편 밭에서 일하던 할머니 비를
맞고 건너오고 있다
물이 구름이 되는 날과 어둠에 여윈 음성 하나,
내가 맨발로 선 풀처럼 낮아진 소리를 듣는다
지독한 자본주의
한 여름 사막의 건기를 낙타 한 무리가 정오의
햇살 건너가고 있다
멀리 선 구름 몇 층이 짐을 얹고 가는 낙타의 생을
사람처럼 위로해 준다
태양과 사막의 상인들은 서로의 열기를 같이 건너야하는 것이
숙명일지 모른다
짐을 실고 사막을 넘어서야 살 수 있는
노동이 된 흰 뼈들을 밟고 살아야 하는 것이
낙타와 상인들의 운명일지 모른다
사막의 길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야 하는지
멀리 선 나무 몇 그루 아래 습기들이
사람들의 광기처럼 사막을 지키고 있다
참 예의 없는 자본의 노동들
서로의 그림자를 밟고 살다가 짐을 언질
힘이 없으면 빈 병처럼 버려지는 것이 낙타의 운명일지 모른다
어느 시인의 부음이 문자로 왔다
그가 쓴 시는 이제 사회를
비판하며 문장에서 식어버린 책은 얼마에 팔리게 될까
*윤병주 2014년 《시와 정신》으로 등단. 시집 『바람의 상처를 당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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