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작품(전체)
25호/신작시/성영희/뻘배 외 1편
페이지 정보

본문
25호/신작시/성영희/뻘배 외 1편
성영희
뻘배
파도를 밀고 간다. 개펄에 굴러야 사는 뻘배들, 출발선은 노련하다 노도 없고 돛도 없는 배밀이 항해, 갯벌을 파면 수 천 개의 입들이 뻐끔거린다. 열리면 길이 되고 닫히면 집이 되는 갯벌의 문들
한쪽 발을 뒤척일 때마다 노 젓는 소리가 난다 잠자리에서 조차 뻘을 밀고 나가는지 끙끙 용쓰는 소리가 새어 나온다 질척거리는 소리들이 푹푹 빠진다.
느리게 이동하는 흑백스크린, 갯벌에서는 누구나 새 같다 먹이를 찾아 머리를 쳐 박고 꼬리를 잔뜩 치켜세운 물새들, 가끔 펴는 허리에서 그르렁거리는 소리들이 빠져 나온다.
뻘배에도 뱃 시간이 있다. 바다를 여닫는 조류潮流의 흐름, 물밀며 나갔다가 물을 앞질러 나와야 하는 뻘밭 출근부엔 잔업도 없다. 개펄을 씻고 나면 이 길이 삶이라는 듯 배의 등
에도 긁힌 자국이 선명하다.
갯지렁이 짱뚱어 칠게들 덩달아 길을 낸다.
물소리는 귀가 밝아
폭염 속으로 계곡이 몰려온다
밤 깊어 잠결로 들어온 물소리는
발끝에 첨벙거리는 구름을 데려왔고
오르막과 내리막이 한 물길로
합쳐지는 소리를 데려왔다
물의 본거지는 얼마나 고요한 곳이기에
쉬지 않고 쏟아지는 소리들을 흘러 보내나
머리맡을 지키던 별들도
새벽에야 이불을 말아 자리를 떴다
물의 순서가 뒤집힌 지난밤
어느 악몽에 떠내려 온 신발인지
다 헤진 구두 한 짝
계곡을 가로질러 돌멩이에 걸려 있다
먼 마을의 남자가
낯선 물길까지 찾아와 길을 놓쳤다는 이야기가
퉁퉁 불어 이름마저 놓친다
후두둑후두둑 새벽 비 돋는 소리
물소리는 귀가 밝아
청력으로 범람한다
어떤 소리가 저렇게 무성해져서
저희들끼리 입을 만드는가,
흐르는 물에 발을 넣어 보면 여름이 차다
문득 잠에서 깨면
조금씩 새어 든 물이 요의를 일으킨다
*성영희 2017년 <경인일보>, <대전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섬, 생을 물질하다』, 『귀로 산다』. 농어촌문학상, 동서문학상, 시흥문학상 수상.
- 이전글25호/신작시/변선우/마지막에서 시작되는 무슨 일 외 1편 20.01.23
- 다음글25호/신작시/김보일/입관 외 1편 20.01.23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