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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시/유현숙/스테인드글라스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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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현숙
스테인드글라스 외 1편
당신을 만나는 일은 혼자 걷는 일이지요, 비우고 오래 기다리는 일이지요
또 ‘밤 한때 눈발’이래요, 콧등이 추운 창가에서 자주 창을 열어보는 일이겠지요
비우는 동안, 기다리는 동안, 나는 너무 낡습니다
앙리 미쇼는 메스칼린을 먹었고, 박정만은 두 달 동안 오백 병의 소주를 마셨고, 기형도는 이십여 일 동안 백 병의 소주를 마셨지요. 김관식, 조지훈, 천상병, 조태일……, 생전의 그 이름들도 제 정신을 내려놓고서야 허무의 면목과 독대 했는가요
의식도 무의식도 끄트머리는 모두 한 점에 닿는 것이겠지요
레이온 치마폭에 묻은 감즙의 얼룩이 다 바래어지고
내가 닳아 조용해지고 나면, 닳아서 조용한 당신과 만날 수 있을는지요
언어가 유리조각 같이 날을 세우는 새벽이 오면
그때는,
타투(Tattoo)
늦게 받은 편지 속에 뼈바늘이 들어있습니다, 몇 번을 읽고 뼈바늘을 빼고 지포라이터를 켰습니다, 편지지의 모서리에 불이 옮겨 붙습니다
팽팽하게 당긴 천을 수틀에다 끼웁니다, 뼈바늘의 귀에 매단 무명실을
갈무리 해 둔 잿물에다 적셨습니다
나의 살갗을 꿰며 수를 놓습니다
뇌성벽력 같습니다, 눈 확에 괸 핏물입니다
한 이름을 부릅니다, 예전에는 이럴 때 헛구역질을 했습니다
뼈와 살 사이로 스미는 것이 용암처럼 뜨겁고
어깨를 타고 앉은 늙은 고양이의 눈빛이 어둠 속에서 빛납니다
Don't Touch Me!…… 둥글게 타이포그래피한 어깨와 젖무덤과 엉덩이에는
누군가의 지문이 묻어 있습니다
뼈바늘을 쥐고 레위기를 읽으며
쪼개고 뜯고 가위질한 언어의 파편들로 답신을 쓰는,
마오리족 여자들은 이마에다 문신을 합니다
나는 어느 종족의 여자입니까.
유현숙- 2001년 <동양일보> 신인상 수상. 2003년《문학 ․ 선》으로 등단.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창작기금 수혜. 시집『서해와 동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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