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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시/최영준/난가爛柯의 전설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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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준
난가爛柯의 전설* 외 1편
가로세로 19줄 바둑반상에 일촉즉발의 전운이 감돈다
초반포석이 끝난 후 ‘목目’자로 신중한 행마를 한다
첨병으로 상대 진영에 돌 하나 밀어 넣고 반응을 살핀다
갑작스런 일격에 장고를 거듭하며 반격해 온다
밀고 당기는 반상에 우주의 운행법칙이 펼쳐진다
도전의 연속이었던 내 삶을 보고 있다
까마귀와 백로의 세력다툼 삼매경 속에
중원을 차지하기 위해
흑백의 행마가 한 데 엉켜 육박전을 치른다
밀어붙이고 어께를 짚고 허리를 끊고 협공을 한다
반상에 화염이 일고 곳곳에 죽은 말(馬)들이 누워있다
상대의 수읽기에 밀리면 싸움은 끝이다
버텨야 산다 집중력이 끊기면 지내온 삶은 사상누각
장고 끝에 악수를 둔 내 생각의 행마,
대마몰이하다 역습을 당한다
구석에 귀살이하며 겨우 옹색한 집하나 마련한다
늘 쫒고 쫒기며 살아온 반상에 세력경계가 뚜렷하다
큰 꿈 잘려나가고 쪼그라든 내 삶의 약도,
중국 원정바둑에서 반집 역전으로 세계타이틀을 거머쥔
이세돌의 짜릿한 승전보가 한 줄기 빛으로
내 반상에 내린다
*난가(爛柯)의 전설 : 진(晋)나라때 왕질(王質)이라는 나무꾼이 바둑을 두고 있던
두 동자를 만났는데, 그 바둑이 얼마나 재미있었는지 옆에 세워놓았던 도끼자루가
썩는 줄도 모르고 구경만 했다는 이야기.
수구초심 (首丘初心)
-속초 아바이마을에서
아바이마을(전쟁피난민촌)로 건너가는
갯배에 오른다
발동기도 노도 선장도 없는 배,
나룻배 한가운데 섬과 육지를 연결하는 쇠줄이
생선 등뼈처럼 늘어져있다
뱃길에 묶인 쇠줄을 끌어당길 때마다
가슴 긁는 소리를 내며 우는 소리가 난다
바닷물도 철퍼덕거리며 훌쩍거린다
밤이 오면 더 크게 소리쳐 운다
아바이마을에 도착, 묶인 쇠줄을 내려놓자
갈매기가 방언하듯 소리 내며 맞이한다
식당마다 속이 꽉 찬 아바이순대 사진들이
곰삭은 눈물처럼 걸려있다
속앓이를 풀어놓은 듯 아바이순대국 속에
저녁노을이 벌겋게 번진다
한 숟갈 입에 물자 목이 뜨겁다.
*수구초심(首丘初心)-여우가 죽을 때에 머리를 자기가 살던 굴 쪽으로 향하고
죽는다는 말로,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비유한 것.
최영준- 2009년 ≪문학과창작≫으로 등단. 시집 새우등꽃 꽃잔치. 성균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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