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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평/백인덕/다시 생각하는 '행복한 시 쓰기'의 조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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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인덕
다시 생각하는 ‘행복한 시 쓰기’의 조건
1.
갖가지 서구 신화 중에 그래도 좀 알려진 내용으로 ‘sorge(愁情)’이 있다. 번역하면 ‘염려, 근심’ 쯤이 되는데, 이 신화는 인간의 창조 경위를 말하는 것이지만, 숨겨진 의미는 인간 존재의 밑바탕에 깔려 있는 근심과 불안을 드러내는 데 있다. 물론 ‘죽음’이지만, 신화 내용에 따르면 소멸이 아니라 영혼과 육체의 분리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 염려는 훗날 하이데거에 이르면 현존재의 존재성을 결정짓는 요인이 된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세계-내-존재로서 환경에 대해 항상 배려하고(besorgen), 타인에 대해 언제나 심려하고(fusorgen), 자기 자신에 대해 늘 염려하면서, 혹은 마음을 쓰면서(sorgen) 사는 존재인데, 이 세 가지를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인간의 존재 방식은 ‘염려(sorge)’라는 것이다. 이 철학적 이해가 시로 바뀔 때, 다시 말해 시인의 감성에서 추구될 때 극단적으로 감정이입에 몰두하거나 반대로 자아와 세계의 철저한 분리를 위장하게 된다. 그렇지 않은가, 염려가 불안을 낳고 불안이 관심을 낳고 관심이 새로운 관계를 형성한다.
지난 계절( 아마도 혹독한 겨울이었기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아라문학』에 수록된 신작시들은 앞의 내용과 궤를 같이 하는 작품들이 눈에 띄게 많았다. 물론 모든 것을 분리, 해체 심지어 매트릭스의 조합으로 만들려고 하는 문화적 폭압에 대한 일종의 반작용이 시작된 측면도 간과할 수 없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행복한 시 쓰기’에 대한 재인식의 요구가 거세지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시인-작품-독자’의 트라이앵글에서 시인이 ‘배려’, ‘심려’, ‘염려’하는 존재로서의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는 어떤 형이상학적 목적이나 사회적 목표와 무관하게 ‘자기 자신’을 돌보고자 하는 재생의 바람이, 말을 바꾸면 생의 근본적 불안에 대한 치유의 시도가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그 수많은 ‘해체’와 ‘분열’의 폐해가 백일하에 드러난 오늘, 필자의 소박한 생각은 새로움은 ‘생명-타자’에 대한 경외심에서 비롯할 것이다.
2.
먼저 시인은 ‘환경에 대한 배려’로서 저 자신의 생에 대한 이해, 태도를 바꾸는 지난한 노력을 시작한다. 거리를 좁히기 위해서는 다가가야 하고, 다가서게 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의 태도를 바꿔야 한다. 자세를 바꾸지 않는 관심은 그저 유혹이고 함정이고 덫일 뿐이다.
몸 밖으로 새어나가는 살의殺意를
최대한 줄여야 한다.
매화나무를 찾은 박새 부부가 의심 없이
다가서게 하려면
나무처럼 서서 바람에 살랑살랑
옷자락이 흔들리게 두어야 한다.
몸속에 맴도는 사냥의 본능이
완전히 사그러들 때까지
애증愛憎도
호흡도
가다듬고.
-정승열, 「동체同體 되기」 전문
시인은 “애증도/호흡도/가다듬”는 자세의 필요를 강조한다. 그 이유는 ‘사냥의 본능’을 완전히 잊고 싶기 때문이다. 이때 ‘나무처럼’과 ‘사냥의 본능’은 지금 세계를 구성하는 두 가지 사고방식의 강력한 비유가 된다. 굳이 덧붙일 필요는 없겠지만, 더불어 사는 삶과 양육강식의 경쟁체제를 함의한다. “나무처럼 서서 바람에 살랑살랑/옷자락이 흔들리게 두”면 세상은 시인을 21세기의 허수아비라고 조롱하고 야유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의심 없이’ 타자가, 아니 뭇 생명이 다가서게 하는 것이야말로 금세기 최고의 미덕일 것이다.
정승열 시인이 보여 준 생명을 향한 다가섬은 세계에 대한 배려라는 측면에서 값지고 더불어 “몸 밖으로 새어나가는 살의를/최대한 줄여야 한다”는 방법론에서도 옳다. 이런 배려의 경지를 장종권 시인은 “그가 카톡에 그믐달을 그려보냈다./나는 그에게 자른 발톱을 찍어 보냈다.”는 소박하고 선명한 진술로 보여준다. ‘그리다/자르다’와 같은 이분법이 순식간에 와해되면서 동형의 한 형상에서, 즉 닮음에서 순간 깨닫게 되는 동질감이 느껴진다.
하지만 배려가 비원(悲願)과 겹쳐질 때는 그 지향과는 달리 날선, 처절한 어휘가 동원될 수밖에 없다. 어조가 곧 주제가 될 수도 있는 것이 시적 발화의 특성이기 때문이다. 그런 측면에서 설태수 시인의 작품은 경계의 불변성이 아니라 맞닿아 있는 것들의 소통 가능성을 탐색하는 형이상적 탐구의 결과로 보인다.
이 아래서 놀아,
칼날보다 더한
수평선
그 아래서 놀 수밖에.
가도 가도 수평선
머리 위에 있지.
절대 끊어지거나 없앨 수 없는
철저한 울타리.
눈물도 넘어설 수 없는
시퍼런 울타리.
지상에서의 추락을
막아주기도 하는,
태풍도 꼼작 못하는 수평선.
그 너머가 어떤지는
노을빛이 말해준다.
핑크빛에서 검붉게 변해가는,
-설태수, 「수평선」 전문
아무래도 이 작품은 ‘수평선’ 그 자체가 상징하는 것처럼 끊어질 수 없는 두 경계, 물론 이것은 물리적 경계가 아니라 심리적 경계를 의미하지만, ‘사이’의 존재를 노래하는 것 같다. “절대 끊어지거나 없앨 수 없는 울타리”는 표면적으로는 제한, 가둠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눈물’을 바람으로 읽고, ‘추락을 막아주기도 하는’을 보호의 의미로 읽는다면 ‘수평선’은 가두면서 보호하는 울타리가 되고, 이는 뒤집어 생각하면 보호하기 때문에 바람(꿈)을 일으키는 울타리가 되기도 한다. 모든 접점(接點)이란 이도 아니고 저도 아닐 수도 있으며, 이도/저도가 아닌 그 무엇임을 시인이 모를 리 없으므로 “그 너머‘를 기대한다.
지금까지 엉성하게나마 ‘환경에 대한 배려’를 생각해봤지만, 이는 말을 바꾸면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에 대한 언급과 같다. 이때 우리가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이른바 ‘관습적 사유의 힘’이라는 측면이다. 얼핏 이해하면 ‘관습적 사유’란 그저 이 사회가 부과하는 기존의 가치체계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관습’이란 ‘수락한 나’, 즉 나의 신념이 그것을 수락하고 또 의연 중에 강화하고 있다는 데서 시작의 곤란을 불러온다. 그런 면에서 이정 시인은 솔직 담백하게 새와 새장의 관계를 나름대로 해석, 한 편의 작품을 보여준다.
처음 새장에 갇히던 날
새는 죽을 힘 다해 날아갈 구멍을 찾았다
창살에 부딪고 부리가 멍들도록 이곳저곳 쪼아댔다
새장 속이 평정을 찾을 즈음
변덕스런 주인이 새장문을 활짝 열어주었다
푸르게 퍼덕이며 힘차게 하늘에 꽂히듯
날아오를 새, 그새 보이지 않는다
몇 번을 날아갈 듯 갸웃거렸는가
때까치 한 마리.
새장 속으로 다시 날아든다
어미품에 안긴 양
콩알 눈이
새장 밖 세상을 걱정스레 바라본다
-이 정, 「콩알눈」 전문
정확하게 이 작품의 대립구도는 ‘새(새장 안의 새)/새(새장 밖의 새)’와 ‘세계(새장 안의 세계)/세계(새장 밖의 세계)가 되어야 한다. 결국 ’새/세계‘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비유에서 진짜 중요한 것은 세계를 가로 친 ’새‘에 있다. 즉 ’안의 세계/밖의 세계‘의 양자택일에 놓인 ’새‘의 존재론적 결단에 포커스가 맞춰진다. 이때 선택은 그 어떤 당위론도 개입할 수 없고, 객관적인 사실에 의거하지도 않는다. 순전히 고유한 단독적인 결단만을 의미한다. 이정 시인의 이 작품을 새롭게 하는 것은 ’콩알눈‘이라는 제목이다. ’콩알‘이 거느린 시적 뉘앙스가 무수하게 펼쳐지기 때문이다. 작다, 둥글다, 단단하다, 검다, 집중한다, 순수하다 등등, 아마도 이 결단이 있은 연후에 ’영향에 대한 불안‘이라는 더 큰 강물에 휩쓸릴 수 있을 것이다.
3.
행복하기 위한 조건에 꼭 빠지지 않는 것이 ‘타인에 대한 심려’일 것이다. 하지만 타인을 ‘남’으로 규정하는 것은 그 어떤 함의를 끌어댄다 할지라도 무의미하다. 아무리 백보 양보한다 할지라도 우리는 자기 신체라는 감옥에 둘러싸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주체-타자’와 같은 관념적 차원으로 밀어 올릴 필요는 없다. 우리의 ‘몸’은 감옥이면서 동시에 기억하는 생명의 저장소이기 때문이다. 마르틴 부버처럼 굳이 ‘나-너’를 부르지 않아도 시인들은 이미 알고 있다. 저들의 행복이 나의 행복과 깊게 맞닿아 있음을.
한 노파가 유모차를 밀고 간다
신혼의 기억이 푸성귀처럼 담겨 있고
출가한 아들딸의 유년이 봄볕과 함께 실려 있다
<중략>
한 생애를 비워낸 노파가 유모차에 의지한 채
모퉁이를 돌아 골목길을 걸어간다
가을이 모든 걸 비우며 저만치 앞서 걷고 있다『
-최일화, 「노파와 유모차」 부분
시인은 유모차와 한 몸이 된 그리 낯설지 않은 한 이미지로 ‘나-너(나)’의 시작의 중요성을 말한다. “출가한 아들딸의 유년이 봄볕과 함께 실려 있”는 유모차와 “모든 걸 비우며 저만치 앞서 걷”는 가을이 결코 대비적으로 쓸쓸하거나 어떤 긴장도 자아내지 않는 것은 ‘노파와 유모차’가 한 몸이 된 그 순간, 지금을 부정하지 않는 시인의 정신에서 비롯한다. 영원히 머무를 자리는 없다는 것을 체득하고, 빈 유모차에 새 생명이 열어갈 새로운 세계에 대한 기대를 가득 실어보는 것은 행복한 시 쓰기의 또 하나의 코드가 될 것이다.
최일화 시인이 일반적으로 추론된 세대 사이의 연계성을 시적 토대로 한다면, 김효선 시인은 환원될 수 없는 개별 체험을 시적 바탕으로 해서 정겨운 풍경 하나를 보여준다. 그것은 조금은 밉살스러운 ‘타자에 대한 배려’라고 할 수 있다.
자식이 개밥에 밀리고,
단풍구경이 개밥에 밀리고,
손녀가 사준다는 돈가스도 밀렸다.
아버지가 골목에 들어서기 무섭게
두 발로 담벼락을 짚고 컹컹 짖어대는,
아버지가 집에 돌아오지 않을 땐 종일
밥도 굶는다는,
반 사람이라서 사람 말을
귀신 같이 알아듣는다는
저 혼자 해피한 해피.
아버지 키만한 해피가
붉어서 더 이상 붉을 것 없는
찬란한 가을조차 개밥에 밀렸다.
-김효선, 「모든 것이 개밥에 밀렸다」 부분
여기 등장하는 ‘해피’는 문자 그대로 ‘해피’한 존재로 그려진다. 작품에서 드러나듯 이쯤의 해피는 시적 화자의 아버지의 유일한 정붙이고 동반자다. ‘단풍구경이’, ‘손녀가 사준다는 돈가스’가 나아가 너무도 당연하게 ‘자식’이 ‘개밥’에 밀린다. 이는 손쉽게 이해할 수 있지만, ‘유전자’의 문제가 아니라 ‘돌봄’의 문제다. ‘돌봄을 받다/돌봐주다’의 대립항에서 시 속 ‘아버지’가 선택하는 능동적인 자기 수행의 문제일 뿐이다. 더불어 시의 이면에 꼭꼭 숨겨진 마음, 아마도 자식들을 귀찮게 하기 싫은 노파심까지 덧붙여진다면 더 말할 나위 없을 것이다.
김효선 시인은 평범한 시어로 그려내는 모티브의 신선함이 놀랍다. “찬란한 가을조차 개밥에 밀렸다”는 시행에서 볼 수 있듯이, 정확하게 말해 ‘찬란한’이란 수식어가 자연에만 붙는 분별력이 작품을 더욱 살아있게 한다.
엄마가 잔다
어쩌면, 자는 척한다
여전히 토라져 있다
자식은 자식의 어둔 방에서
엄마는 엄마의 어둔 방에서
하지만 내가 먼저 사과하지 않겠다
내가 먼저 사랑한다고 하지 않겠다
엄마가 휙 등을 돌려 잔다
귀여운 면도 있다
그녀도 나처럼 고집이 무척 세다
지금은 서로 밀고 당기는 중
-최명진, 「엄마의 애인」 부분
최명진 시인의 ‘엄마의 애인’은 시적 화자다. 모자는 지금 세칭 ‘밀당’중이다. 이 작품이 아름다은 점은 “그녀도 나처럼 고집이 무척 세다”라는 마지막 연의 시행에 있다. 모자간의 관계를 말하는 일반적 언술이라면, “나는 그녀를 닮아 고집이 세다”라고 되어야 한다. 이 작은 차이가 일상적 발화와 시적 언술의 차이를 만든다. 시적 화자가 이처럼 발화의 주도권을 갖고자 할 때, 더욱이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관계를 전도할 때 우리는 시적 효과를 거둘 수 있다. 무엇보다 지나친 감정이입을 경계하면서 ‘그녀와 나’, ‘나와 그녀’의 관계맺음을 굳이 일그러진 얼굴이 아니더라도 성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육친(肉親)을 ‘몸’이 아니라 ‘기’로써 관계 맺으려 하는 것은 또 다른 행복의 조건이 될 수 있다. 몸은 분리되면 죽음 이전에 다시 결합할 수 없지만 기는 흐르고 건네주고, 건네받고 그렇게 소통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벼린 수술 나이프에 베인 향기가 몸에 실금을 내고
실금 속엔 난분분한 꽃잎들이 들어앉았다
잠시, 그의 숨결들, 차근차근 산사, 연못 속 연꽃 잎 위에
백목련 향처럼 쌓인다
그의 눈에 닿는 붉은 소리들,
자취를 감춘다
은하수빛 문장들, 어둑어둑 두께를 한 장 한 장 포개며
은은한 밥의 향기를 담은
은수저 동선 따라
그의, 미각의 파고는
지금, 정점으로 치닫고 있다
-고은산, 「백목련향」 부분
고은산 시인의 작품은 비록 ‘염려’라는 시어나 시적 이미지가 사용되지는 않았지만, 자기와 자기의 관계맺음에 대한 한 이미지를 선명한 시어를 통해 보여준다. 이 작품의 인용 부분의 전제는 “하지만 그는 얼마 전”이다. 다시 말해, 사건의 이후가 긴 시간이 경과하지 않았음을 말한다. 그런데 시적 인물은 “미각의 파고는 지금, 정점으로 치단”는 경험을 하고 있다. 물론 상징적으로 ‘향’에 대한 이해를 우선해야겠지만. 이 작품의 전편의 스토리는 자기 생에 대한 지극한 보살핌으로 읽힌다.
문을 뚫어져라 쳐다본다
차라리 문을 쾅 닫고 나가는 바람보다
모서리 삐걱거리는 불편은 불안하다
어디든 안으로 들어서기 전까지
두려움의 공포를 이기려면 어쨌든 찔려야 된다
치료과정이다
도대체 하늘은 어디서 저렇게 찔렸을까
비가 종일 내린다
-조경숙, 「모서리 공포증」 부분
자기에 대한 ‘염려’는 신체적 징후가 지속적으로 인지되기 전에는 대부분 시각적 대상들의 영향에서 촉발한다. 시인은 이를 ‘모서리 공포증’이라고 지칭한다. 그리고 첫 연에서 “모서리는 아프다/바라보는/그 느낌에 먼저 찔린다”라고 고백한다. 모서리에 대한 이 공포가 ‘마음’에 까지 이어져 시인은 “눈에서 신음소리”를 듣는다. 일반적으로 시에서 구조를 파악하는 방법은 선후, 층위와 대칭, 대립과 같은 변별적 요소들의 결합양상을 살피는 것이다. 어쨌든 이 작품에서 조경숙 시인은 시적 화자의 심적 상태를 “도대체 하늘은 어디서 저렇게 찔렸을까”라며 보다 큰 범주에 귀속하고 있다. 추상적, 유적 개념으로서의 인간이 아니라, 그냥 지금 나 자신이 자연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 또한 ‘행복한 시 쓰기’의 조건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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