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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덕
인천에는 인천교가 있다
-기억의 지평 너머로 잠겨가는 갯골과 번지기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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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에는 인천교(仁川橋)가 있다. 그러나 교량(橋梁)으로서 인천교는 고향을 떠나갔다. 인천교는 이제 ‘갯골’, ‘번지기나루’와 함께 인천사람들 기억의 심연에 ‘희미한 옛 사랑의 그림자’로 남아 있을 뿐이다.
인천국제공항과 송도신도시를 초현실적으로 연결하는 인천대교(仁川大橋)에 그 이름의 태반을 넘겨주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지만, 명칭 하나로 이 도시를 대표하던 그 다리도 한때는 인마(人馬)통행용 첨단 교량이었다.
교량(bridge)의 사전적 의미는 ‘물이나 어떤 공간 위로 사람이나 차량이 건너다닐 수 있도록 만든 시설물’이다. 그렇다. 인천교 아래는 바닷물이 버젓이 드나드는 갯골이었다.
과거 인천은 사실상 반도(半島)였다. 빛바랜 1920년대 지도 속의 인천은 한반도를 다섯 시 방향으로 돌려놓은 것 같은 모양이다. 동남쪽으로만 내륙과 연결되어 있었을 뿐이다. 그 유명하던 주안염전은 십정동까지 이어졌는데, 지금의 간석역 부근까지 바닷물이 드나드는 갯골이 없었다면 양질의 천일염 생산은 언감생심(焉敢生心)이었을 것이다.
인천시내와 근교 농업에 종사하던 서곶(서구)은 갯골로 단절되어 있어서 나룻배가 사람과 물자를 운반했는데, 그 나룻배와 뱃사공의 모항(母港)이자 기항지(寄港地)가 ‘번지기(番作里)나루’다.
구한말 인천 앞바다에는 이양선(異樣船)이 자주 출몰하여 해안가에 경계초소를 세우고 군대 내무반 불침번처럼 번(番)을 짜서 보초를 세웠는데, 이곳이 한자로 ‘번작리(番作里)’라는 지명을 얻었다. 부평부(富平府) 관할이었던 이 마을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부천군(富川郡 - 부평의 앞 글자와 인천의 뒷 글자를 조합한 새로운 지명)이 신설되면서 인근 고잔리와 합해져 부천군 서곶면 고작리가 되었다가 1940년 서곶면 전부와 함께 인천부로 편입되었다.
원래 하구의 ‘아랫나무’가 먼저 생겼고 이후 갯골이 좁아지는 위쪽에, 바닷물이 빠지는 썰물 때는 갯골에 놓인 징검다리를 걸어서 건널 수 있는, ‘웃나루’가 생겼다. 한번 건너는데 요금이 1인당 30전이었다. 그곳에 인천교가 들어선 것이다. 현재 송림로 인천교삼거리에서 방축로까지의 구간이다.
인천교는 1957년에 착공하여 그 이듬해인 1958년 1월에 개통되었는데, 그 공(功)의 팔할(八割)은 고(故)심덕기씨에게 있다. 서구 백석동 한들마을 출신인 그는 지금의 서울시립대 전신인 경성농업학교를 나왔다. 아직 전쟁 중이던 1951년 초대 민선 인천시의원에 당선된 심의원은 1954년 재선되어 인천시의회 의장까지 역임했다.
심덕기씨는 서곶지역 주민들의 교통 불편 해소와 인천의 도농균형발전(都農均衡發展)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타고난 뚝심과 협상능력을 발휘하여 인천교 건설을 관철시켰다. 1950년에는 검암동에 있던 사유지 3만여평을 출연하여 영화중학교를 설립, 지역의 후진 양성에도 큰 기여를 했다. 그 학교는 이후 고려중학교, 인광중학교 등으로 명칭이 바뀌어오다 지금의 서인천고등학교가 된다.
1967년 경인고속도로 공사가 시작되면서 인근에 인천톨게이트가 생기고 명실상부한 인천의 관문으로써 고속도로 전용 교량이 약 500미터 위쪽인 지금의 ‘염전로 303번길’ 부근에 나란히 설치되었지만 새 교량에 별도의 명칭이 부여되지는 않았다. 교통량이 급격히 늘어나면서 인천교는 1971년 확장되었다가 갯골이 점차 매립되면서 1998년에는 역사 속으로 완전히 사라졌다.
그런데 과거 이 갯골 하구에서는 가끔 참혹한 일이 벌어졌다. 달의 중력으로 인한 조수간만의 차가 크기로 유명한 인천에서 밀물은 썰물 보다 그 속도가 2배는 빠르다. 지금도 그렇겠지만 당시 바닷가 서민들은 갯벌에 나가서 게나 조개, 바지락같은 해산물을 캐서 고단한 삶을 영위했다.
내가 아주 어릴 때의 일이다. 한 번은 인천의 외갓집에 다녀오는데, 버스가 갑자기 인천교 위에 정지했다. 웅성거리는 소리와 함께 차창 밖을 보니 멀리 갯골이 넓어지는 하구에서 ‘사람 살려, 사람 살려’라는 다급한 외침소리가 바람결에 실려 왔다. 그 사람은 아마도 해산물 채취에 열중하여 미쳐 물이 들어오는 것을 몰랐던 모양이다. 이미 갯골에는 소용돌이처럼 바닷물이 시퍼렇게 들어와 있었으며, 물은 갯벌 높은 곳까지 점점 차오르고 있었다. 황량한 해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인천교 위에 서있던 버스안의 승객들은 갯골 하구를 바라보며 발을 굴러 탄식만 할 뿐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 바닷물은 어느새 살려달라고 소리치는 그 사람의 허리에서 가슴, 이윽고 목까지 차올라왔다. 나는 그 사람이 물속에서 허우적대다 속절없이 물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고 말았다. 버스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승객들을 싣고 다시 출발했다. 그러나 그 장면은 내 아픈 기억 속에 각인되어 지금도 119구급차를 보면 그때 그 일이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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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지가 음지가 되고 음지가 양지가 된다는 말이 있다. 갯골로 서북부와 사실상 단절되었던 인천은 그 많은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잇점도 적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우선 그 갯골 덕분에 6,25전쟁 초기 인천이 인민군의 주요 공격 축선에서 벗어나 비교적 평온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고금동서를 막론하고 전쟁이 나면 민간인들은 양쪽 군대가 공방을 벌이며 화력이 집중되어 큰 피해가 예상되는 주요 전장(戰場)에 남게 되는 것을 우려하여 피난을 떠난다.
그런데 삼팔선 넘어 파죽지세로 김포반도를 지나 남하하던 북한 인민군 6사단 예하 부대 병력들은 6,25 당일 지금의 경인 아라뱃길 부근 시천교가 폭파되자 방향을 틀어 계양구 쪽으로 진군했다. 어렵사리 서구청 방향으로 짓쳐들어왔어도 이 갯골 때문에 탱크를 앞세운 인천 도심 진입이 여의치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덕분에 인천은 한동안 국지전도 없는 소강상태를 유지하며 비교적 안전할 수 있었고, 이후에도 인천에서는 대규모 전투가 없었다. 불행 중 다행이었다.
맥아더 장군이 전세를 반전시킬 상륙작전 장소로 조수간만의 차가 커서 지형적으로 불리함에도 불구하고 인천을 택한 이유도 인민군 정규군의 인천 방어태세가 매우 허술하다는 첩보가 결정적이었다고 한다.
압록강까지 진군했던 미해병1사단이 장진호전투에서 중공군에게 포위되어 거의 궤멸되었을 때, 평북 군우리에서 중공군과 용맹하게 백병전을 치루며 미군의 퇴로를 열어주고 후퇴하던 터키군이 지금의 서부교육지원청 인근에서 부대를 정비한 후, 인천으로 들어가지 않고 시흥을 거쳐 수원으로 이동했던 이유도 이 갯골이라는 장애물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한반도가 대규모 국제 전쟁의 무대가 되었던 6.25 동란의 와중에도 인천의 산업기반이 크게 무너지지 않고 비교적 온전하게 보존되어 이후 ‘경인공업지대’라는 이름으로 우리나라 산업화에 큰 기여를 하게 된 것도 팔할이 이 갯골 덕분이었다고 나는 믿는다.
전후 복구기간에 인천시민들은 광활한 서북부 근교농업지역에서 생산된 쌀을 비롯한 각종 채소와 싱싱한 과일 등 농산물을 비교적 싼값에 먹을 수 있었다. 인천교가 개통되어 공급이 원활치 않았다면 시민들의 생활수준은 더욱 열악했을 것이다.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6,70년대 송림로타리 버스 정거장은 이른 아침부터 중고등학교 통학생들과 농산물을 소규모 보따리로 갖고 내리는 아낙들과 흥정을 벌이는 시장 상인들로 활기가 넘쳤다. 수인역과 함께 송림동시장이 비약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도 번지기나루터 갯골위에 놓인 인천교 덕분이었다.
인생만사 새옹지마(塞翁之馬)라고 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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