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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두칼럼/장종권/우리들의 어머니인 감성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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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두칼럼/2014년 아라문학 여름호
장종권
우리들의 어머니인 감성의 세계
‘플라톤을 대표로 하는 서양의 전통적 미학은 초월적 가치로서의 미를 고찰한다. 미학이라는 말을 오늘날과 같은 의미로 처음 사용한 사람은 A.G.바움가르텐이다. 그는 그때까지 이성적 인식에 비해 한 단계 낮게 평가되고 있던 감성적 인식에 독자적인 의의를 부여하여 이성적 인식의 학문인 논리학과 함께 감성적 인식의 학문도 철학의 한 부문으로 수립하고, 그것에 에스테티카Aesthetica라는 명칭을 부여하였다. 그리고 미美란 곧 감성적 인식의 완전한 것을 의미하므로 감성적 인식의 학문은 동시에 미의 학문이라고 생각하였다. 여기에 근대 미학의 방향이 개척된 것이다.’ 두산백과에 실려있는 ‘미학’의 해석 일부이다.
이성이 유리 같은 냉철한 아름다움이라고 한다면 감성은 우물이나 동굴 같은 신비스러운 아름다움이라 할 만하다. 인간이 인간답게 평화로운 세상을 이루어 나가고, 미래의 더 가치 있고 유익한 세계를 꿈꾸는 것은, 이성에 충실하려 노력하는 자세에서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인간이 진정 위대한 존재라면 아마도 이성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라는 점에도 이론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성은 결국 감정의 통제를 위한 반작용에 의해 탄생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 인간의 감정이 자연 그대로 동물적으로 발현된다면 인류사회가 어떤 식으로 전개될지는 불문가지라 할 수 있다. 인간 감정의 관리와 통제는 더불어 살아야 하는 세상에 어쩔 수 없는 중요한 덕목이 되었다.
그렇다고 해도 이성은 결코 감성의 세계를 관리하거나 통제할 수 없다. 이성은 다만 감성의 껍데기를 형성하면서 마치 그래야만 한다는 식의 강력한 요구를 주장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인간의 본성 속에 묻혀 있는 본질은 오로지 발현의 저지를 통해 결사적으로 막아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겨우 껍데기를 형성하면서 마치 인간 본성의 전부인 것처럼 시늉하는 이성이 예술세계에서 달갑지 않은 대접을 받는 이유일 것이다.
세상은 온통 그렇다. 인간의 따뜻한 세상을 위해 만들어진 숱한 껍데기들이 어느 사이에 인간세상의 본질로 둔갑하여 알맹이를 현혹시키고 학대하는 세상으로 변해버렸다. 감성적 미학을 하찮은 감정의 발산으로 왜소화시키고, 대신 철저하게 이성적이고 논리적이고 법리적인 세상으로 총 진군하는 듯한 양상이다. 알맹이를 보호하기 위해 형성된 껍데기가 드디어 알맹이를 파내기 시작한 것이다.
눈에 보이는 현상에만 집착하는 이유는 본질을 읽어내는 일이 불가능하다는 판단에서 왔을 것이다. 인간은 신이 아니므로 아무도 다른 사람의 감정을 읽어내기는 어렵다는 것인데, 사실은 누구도 그 감정을 이미 알고 있다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어떤 이가 누군가에게 주먹질을 하여 상해를 입혔다면 반드시 그 상해를 보상하고 법적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 오늘날의 일반적인 법철학이고 사회적 정서이다.
그러나 그가 주먹질을 꼭 해야만 했던 감정적 사정과 변화에 대해서는 아무도 묻지 않는다.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의 작용이기 때문이다. 현상으로 드러나지 않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증거 위주의 세상에서 증거를 댈 수 없는 사안이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다는 것이다. 그가 제아무리 죽음보다 무서운 공포에 사로잡혔었다 해도 그 사정은 참고 되지가 않는다.
인간은 심리적인 존재이다. 마음의 변화로 세상을 산다. 인간의 마음을 읽을 수가 없다면, 그 사람의 감정까지 배려해줄 수가 없다면, 적어도 돌맹이는 던지지 말아야 할 것이다. 또한 인간의 미래사회는 인간의 감정세계나 감성의 세계가 고려되는 시스템이 개발되는 사회가 되어야 할 것이다.
깐족대는 이성의 현실철학을 불안한 모습으로 지켜본다. 어머니는 논리가 아니다. 어머니는 理性이 아니다. 어머니는 철학도 아니다. 우리들의 어머니가 쉬고 있는 감성의 세계를 다시 한 번 돌아보면서 따뜻하고 신비스러운 인간 본연의 세계가 회복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2014년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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