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토피아 - (사)문화예술소통연구소
사이트 내 전체검색

수록작품(전체)

아라포럼/강우식/시인으로 가는 길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편집부2
댓글 0건 조회 2,412회 작성일 15-07-06 10:21

본문

4차 아라포럼 특강(2014621, , 오후 5, 아라아트홀)

시인으로 사는 길

강우식 시인

 

 

저에게 神氣가 있는 것 같습니다. 얼마 전 문학행사가 있어 고향 강릉에 다녀왔습니다. 강릉에는 단오제 행사가 한창이었어요. 강릉 단오제는 전국적으로 유명한 축제인데 무당의 굿거리가 볼만하지요. 무당들이 굿을 하며 아주 신명나게 놉니다. 그 굿거리장단은 단오제 끝날 때까지 이어지는데 무당들은 단오제가 끝나면 신기가 풀려서인지 크게 앓는다고 해요. 강릉에서 무당처럼 술 마시며 놀고 올라와서는 가까운 문인 친구들과 매실 따겠다고 충청도 서천에 가서 밤새 술 마시고 바둑 두고 동으로 서로 놀다 올라 왔더니, 온몸이 쑤시고 특히 옆구리가 아파서 상당히 힘이 듭니다. 그런데 여러분을 보니 아픈 것이 많이 사라져서 내게도 무당끼 같은 게 있지 않나 생각을 한 것입니다. 시도 무당처럼 미쳐서 하는 일이니까요.

한 시간 정도의 시간이니까 그냥 편하게 얘기를 하려고 합니다. 몸도 안 좋고, 정신도 제 정신이 아니어서 대강 메모한 대로 얘기를 끌어갈까 합니다. 주최 측에서 주제를 달라 했는데 그냥 쉽게 얘기하자고 했습니다. ‘시인으로 사는 길로 방향을 잡고 얘기를 해보고자 합니다.

사실 시인으로 사는 길이 별 거 있겠습니까. 대부분 시인들에게는 일상으로서의 개인적인 길과 시인으로 창작을 하면서 살아온 두 갈래의 길이 있으리라 봅니다. 생활인으로서의 길과 시인으로서의 길이 양립되어 있다고 봅니다.

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시로써는 생계가 안 되지만 평생 시를 버릴 수는 없고, 일생 생활과 시의 조화라 할까 균형을 이룬다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었던 것 같습니다.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들도 제 얘기에 공감하리라 봅니다. 그러면서도 저 자신이 평생을 시를 쓰고 살아올 수 있었던 것은 행복은 돈이 안 되는 시로, 아니 시적 자질에 맞는 일은 되도록 선택하여 살아온 것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저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이제까지 시를 외면하지 않고 한세상을 살아온 것이 기적 같다는 생각입니다. 제가 만약 여러분들 나이의 중년 이후에 시를 시작했었다면 평생 시를 쓸 수 있었을까요. 아마 좀 쓰다 포기하고 말았을 겁니다. 제가 선대로부터 선천적 자질을 받았던, 후천적인 노력에 의해서 시인이 되었든, 간에 확실한 것은 어렸을 적부터 뭣도 모르고 겁도 없이 시를 쓰다 보니까 그것에 잡혀서 일생을 시를 써온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철모르는 문학청년의 혈기가 오늘까지 나를 이끌어 온 거지요. 어쩔 수 없이 그렇게 시작이 되어서 오늘에 오게 된 것이지요.

며칠 전에 어떤 시인의 첫 시집 출판기념회에 갔어요. 50대의 중년 시인인데 시단에 나온 지 4, 5년만에 자신의 첫 시집을 낸 자리였어요. 제가 축사를 할 처지여서 늦은 나이에 첫시집을 내는 기쁨이 얼마나 크겠는가, 하는 얘기를 했지요. 그 시인이 시집을 보니까 서문의 끝에 米壽인 어머니에게 시집을 바친다고 해놨어요. 홀로이신 시인의 어머니가 88세랍니다. 어머니와 가족에 대한 얘기, 또 자연에 대한 것들, 나름 일정 수준을 유지한 시집이었는데, 이 시인의 머리말이 눈길을 끌어서 거기서부터 얘기를 풀어갔어요. 저도 첫 시집을 시인이 된지 10년만에 냈지만 그때까지도 시가 뭔지 모르고 썼는데, 이 시인은 시집을 내는 기쁨과 함께 넓은 바다의 물색도 물길 따라 다르듯이 자기만의 색을 가진 시세계를 추구하고 싶다는 얘기를 하고 있어요. 아마 나이 들어 시를 쓰시는 분이니까 그런 얘기를 하는 것이겠지만 얼마나 당당합니까. 그런 얘기를 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도 곁들였습니다.

가령 그 시인이 사오 년 정도 시를 썼다 하더라도, 시를 썼던 시절과 시를 쓰지 않았던 시절은 전혀 다를 것입니다. 시를 썼기 때문에 잘 썼던 못 썼던 자신의 속에 있는 얘기를 한 권의 시집 속에 담을 수 있었고, 그 얘기 속에 어머니에 대한 사랑이라든지 어머니에 대한 효성심을 담을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만일 시를 쓰지 않았더라면 시집 속에 담긴 이야기들이 하나도 얼굴을 내보이지 않은 채 한 시인에게서 사라졌을 것이 아닌가. 뿐만 아니라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자기성찰적인 면들도 시집에 담을 수 없었을 것이 아닌가. 시인은 시집 속에서 외할아버지의 이야기를 하며 있는 듯 없는 듯 살아 온 생을 이야기하면서 의미 있게 살아 온 생도 그 나름이 목표이고 가치일 것이다. 중년의 나이에 한 권의 시집을 낸다는 것은 참 대단한 일이다. 시를 쓰는 사람하고 안 쓰는 사람하고 차이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한다. 평생 한 권의 시집을 가지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던 사람이 시집을 갖는 그 감격이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자신을 행복하게 만들어 줄 것인지, 얘기한 적이 있습니다.

시를 쓴다고 하는 것은 개인적인 면에서 보면 대다수가 자기 성찰적인 면을 상당히 많이 가지고 있어요. 하지만 좀 더 크게 보면 사물과의 교감을 통하여 사물의 본질을 꿰뚫고 이웃을 이해하고 긍휼히 여기며 시를 통하여 감정의 공감대를 만들어가고 넓게는 인간 존재에 대한 내 속의 많은 것을 담아내는 과정이 시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는 인간에 대한 간명한 정리로는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와 파스칼의 팡세에 나오는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이다를 들고 싶습니다. 물론 이 명언들은 우리들 자신을 돌아보는 널리 알려진 중요한 얘기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시를 쓰는 우리들과도 깊이 관계가 있는 얘기들이라고 나는 믿습니다. 자기 성찰적이라는 면에서 이 두 개의 명언은 일치하고 있습니다.

왜 사람을 생각하는 갈대라고 했겠는가. 보통 갈대라는 것이 연약하기도 하지만 강인한 생명력을 가지고 있어서 파스칼이 그렇게 얘기를 했다고 합니다. 때로는 종교적인 면과 결부시키기도 하지요. 하지만 인간이 생각하는 갈대라고 하는 것은 시적인 사유로서 얼마든지 말할 수 있지요. 사유로서의 생각이란 시적 상상력과도 관련이 있다고 저는 보고 싶은 것입니다. 인간은 상상력을 가진 존재로서의 생각하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고, 갈대의 연약성이 인간의 감정과 밀접하게 연관되어있는 감성으로서의 갈대일 수도 있습니다. 실제 시가 자기성찰이나 인간존재에 대한 본질을 밝히는 한 방편이라면 위의 명언들이 시와의 밀접한 연관성을 부정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생각하는 존재이고 갈대이지만, 저는 한걸음 더 나아가서 자기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존재로서의 갈대라고 주장하고 싶습니다.

인간은 생명을 부여받아 태어나면서부터 표현하는 존재였습니다. 소리로건 행동으로건 표현하고자 하는 존재였습니다. 우리는 흔히들 오늘날에도 바디랭귀지라는 말을 자주 씁니다만, 말과 행동의 표현보다 인간을 한 단계 끌어올린 것이 문자임을 아무도 부인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언어를 사용하는 습관으로써 인간은 역사를 기록하게 되고, 인간에게 내재된 감정의 파동을 완벽하지는 않지만, 희곡이라는 형식으로, 시라는 형식으로, 표현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어차피 생각하는 존재로서의 인간이기도 하지만, 더 나아가면 표현하는 존재로써의 인간이라고 하는 것이 보다 적합한 얘기가 아닌가 합니다. 그런데 표현하는 존재로써의 인간이 가지고 있는 시에 대한 개념도 동양과 서양이 전혀 다른 개념을 갖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쓰는 현대시라는 것은 서양적인 이론에 치중하는 것들이기는 합니다만 동양적인 시의 개념도 존재합니다. ‘詩三百首一言以蔽之曰 思無邪라고 하는 詩經 속에 담긴 시의 정의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 思無邪를 글자 그대로 시란 사악함이 없는 순수한 것이라고 보는 경향이 있는데 저는 이런 해석은 너무 편협한 것이라고 봅니다. 思無邪라는 글자 자체에 얽매일 게 아니라 시경 전체가 가진 내용에 그 의미를 두어야 합니다. 詩經은 공자 당대의 사회상과 풍습과 남녀 간의 사랑을 담은 책입니다. 다시 말해 당시의 사회상을 시로써 바로잡고자한 공리적인 면이 있는 저서라는 얘깁니다. 그래서 책 이름도 시경이라고 지었다고 저는 보고 있습니다. 시가 경서의 위치까지 간 경우입니다. 바이블처럼 말이지요. 중국에서 당시 이후의 시들이 시대를 거치면서 성리학의 영향 등으로 상당히 교조적이고 딱딱한 시들이 되었듯이, 이런 중국이 문화권에 있었던 우리에게도 그 영향권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봅니다. 물론 향가나 여요 등의 우리 나름의 시도 있습니다만.

반면 서양은 보편적으로 얘기할 수 있는 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을 들 수 있겠습니다. 시학은 아주 짧은 글입니다만 그 글은 그리스의 비극을 바탕으로 해서 씌어진 것입니다. 그리스의 비극은 극의 바탕입니다만, 비극의 구성이라든지 기타 여러 시적 이론에 근거를 하고 작시술적 면을 중심으로 시의 이론을 이끌어 온 것들이거든요.

그러니까 서양의 시론은 풍기 문란이나 인습을 바로잡자는 교화성이 시의 목적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서구의 시론은 플라톤의 시의 불용설이라 해야 하나, 허구성에서부터 아리스토텔레스의 시의 자연모방설에서부터 시작하여 헤겔 등에 이르러서 창조적 개념으로 흐르는 경향을 거쳐 오는 과정에서도 시가 주는 즐거움, 즉 문학유희설적인 면을 늘 유지해 왔고, 이 즐거움이 그 발전과정에서의 서구의 현대시의 발아점 역할을 한 살롱문학적 요소와 결부된 점이 짙다는 뜻입니다. 인성에 바탕을 둔 시보다는 이론적이고 때로는 보다 이론적이고 유희적인 시가 이루어져 왔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서구문학은 일본을 거쳐 수용한 소위 한국의 현대문학사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문학연구가들이나 학자들은 현대문학을 공시적인 면으로 구분하기도 합니다만, 제가 볼 때는 한국의 현대문학도 문학사적으로 얘기하면 서구의 살롱문학이 그랬듯이 동인지 문학이 아직까지도 중심이 되어 이어져오고 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우리 시의 흐름을 흔히들 1908해에게서 소년에게로 봅니다. 그후 안서 등에 의해 1920년 무렵에 프랑스 상징주의가 소개되고 문단이 형성되면서 창조, 장미촌, 백조, 폐허 등 수없는 동인지 문학으로 오늘까지 왔습니다. 그 영향이 아직도 한국문학의 주된 흐름이라고 봅니다. 오늘날 한국문단을 주도하고 있는 흐름을 범박하게 창작과비평, 문학과지성이 그 주축이라 해도 별로 틀리지 않는다는 사실도 동인지 위주의 문학의 한 양상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고 각종 문학지나 계간인 시 전문지를 형성하고 있는 문인들도 무슨무슨 가족, 식구라고 일컫는 것도, 가족적인 형태의 동인지 범주를 못 벗어나고 있는 것도, 그 좋은 예일 것입니다. 가령 민중시, 또는 민중문학이라 하는 한 시대를 휩쓴 문학의 흐름도 그 시발점은 창비라는 동인지 형태의 문학 그룹이 주도한 것입니다. 문학의 사회적인 면이나 공리성을 따질 때도 마찬가지로 개인의 문학형태가 아니고 집단성을 띈 문학형태로 한국문단을 70년대, 80년대, 90년대 초반까지 이끌어 왔습니다.

민중시의 집단성은 최초 창비를 중심으로 사회현실적인 면을 추구하며 생겼습니다. 60년대부터 농촌주도의 경제에서부터 산업위주의 경제로 탈피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부작용이 발생하고 점차 소시민의식이 싹트면서 시작된 민중시는 한국시단에 이제까지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커다란 강물이었습니다. 제 개인적인 견해로는 민중시란 용어도 우리가 만들어낸 고유의 용어라고 봅니다. 세계 어느 나라 문학사에도 민중시라는 용어가 없지 않은가 생각됩니다. 민중시와 유사한 용어로는 아놀드 하우저의 문학의 사회사에 간단히 나오는 농민시가 아닐까 합니다. 농민시란 글자 그대로 농촌 현실과 관련된 농민들의 고난과 착취와 억압을 읊은 노래요 시입니다. 적당한 예일는지 모르지만 러시아의 혁명 당시의 시인 예세닌 같은 시인이 아닐까요. 예세닌은 아시다시피 러시아의 시골 출신으로 농촌 현실과 풍경을 아주 잘 노래한 시인입니다. 그의 모스크바의 목로술집이란 시를 보면 혁명이 끝난 후 농촌으로 갈 수없는 농민들이 목로주점에 앉아 보드카나 마시며 농토가 있던 고향을 그리워하는 애환들도 잘 그려져 있지요. 그런 면에서 농민시로서의 집단성은 얘기가 되곤 했지만, 우리 문학은 동인지 문학이 발전하는 과정에서 시대적인 양상을 잘 반영한 집단성을 띤 문학으로써의 민중시라는 양상으로 나타난 것이라고 얘기를 하고 싶습니다.

시인으로 살아가는 삶에는 생활인으로 평범하게 살아가는 삶도 있지만 시대 양심에 따라 시인으로 사는 삶도 있습니다. 저 자신도 창작과 비평에서 고려의 눈보라라는 두 번째 시집을 펴낸 후, 현실문제에 관심을 가진 적이 있지요. 민중문학의 첫 결사모임의 공표할 할 수 있는 자유문인실천협회에 105인 발기인으로 가담하여 몇 번 지금의 시청 옆 성공회의 작은방에 모여 회합 및 결의 같은 것도 했고, 또 정부가 동아일보 탄압의 일환으로 지면의 광고를 끊었을 때 가까운 문인들과 십시일반의 의미로 광고를 내 작은 소리를 내기도 했습니다만, 하지만 저는 얼마 안가 시인의 현실문제와 작품과 어느 쪽을 택하느냐에 고민하기 시작했고, 그 후 현실참여에서는 점차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시는 철저한 자기 고민이며 순전히 개인적 작업인 것이지, 시대성이나 사회성으로 뭉쳐 부수고, 몰아내고, 혁명하자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었습니다. 그 중에는 민중문학을 팔아 개인적으로 이름을 높여 대한민국 대표 시인이 된 사람도 있습니다만, 저는 지금까지도 대다수 구호에 지나지 않는 민중시가 시로서 작품성을 지니고 있다고 인정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문학성이 결여된 시가 제 구미에 안 맞기 때문이지요. 우스운 얘기 하나 늘어놓을까요. 제가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시를 가르치고 있을 때입니다. 한때 대학 전체가 민중시 일색으로 도배된 적이 있었지요. 심지어 대학원에서 문학을 전문으로 공부하겠다는 학생들마저 김수영이나 신동엽 논문 일색이었으니까요. 그러니 강의실에 들어가서 민중문학이 아닌 제 얘기가 먹혀 들 리가 없었지요. 자칫하면 어용시인으로 물러나야 할 판이었지요. 저는 그래서 창비에 나온 시집 고려의 눈보라를 판 적이 있습니다. 고려의 눈보라는 창비시선으로 13번째 순위로 나온 시집이어서 공산당 서열로 따지면 13위쯤 되는 위치에도 있어봤다고 너스레를 떨며, 민중문학이 아닌 순수문학의 길도 있다는 것을 진정성을 띠고 얘기해도 학생들이 귀담아듣지 않던 시절도 지금 불현듯 기억납니다. 그래서 시인으로서의 득명이 이 정도 밖에 안됐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한국의 시 양태는 다분히 공익적이고 집단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반면 서구의 시는 개인적인 경향이 강하다고 보고 싶습니다. 저의 시인으로서의 큰 불만은 왜 우리시에는 성인시라는 것이 싹트지 못하는가 입니다. 교과서 같은 시만이 시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물론 서양에도 집단성을 띤 적이 있습니다. 문예사조를 보면 농민시 위주의 낭만주의 시에서부터, 상징주의 시, 초현실주의 시, 모더니즘 시로 흘러가는 시 양상은 세계적인 문예사조입니다. 그만큼 영향력이 큰 집단의 성격을 띤 것들임에 분명합니다. 가령 현대시의 시발점이라 보는 보들레르 같은 시인을 보더라도 살롱문학 중심의 성향이 강했고 그의 작품에서 상징주의가 발아되었습니다만, 그 집단성도 어떤 면에서는 철저하게 자기 작품 위주의 문학 발생 양태였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통 상징주의 시를 얘기하면서도 대표적으로 들 수 있는 것은 보들레르, 발레리, 말라르메, 베를레느, 랭보 등이나 희화성인 강한 다다이즘의 앙드레 부르똥 등 몇몇 대표적인 사람들을 열거할 수 있는 것도 그런 양상이 아니겠는가 생각합니다.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동양의 문학 양상은 상당히 공리적인 면이 강했는데, 일본은 좀 다릅니다. 일본은 소설이나 하이쿠를 봐도, 상당히 사소설적인 면이 발달되었습니다. 서구문명을 누구보다도 빨리 받아들이면서 사소설적 위주의 소설적인 양상이 발달된 것이 아닌가 합니다. 물론 일본문학에도 미시마 유끼오 같이 우국주의를 내세우는 작가도 있지만 그런 집단성은 결국 비극적인 결말을 가져 왔지요. 한편 일본적인 색채가 농후한 유미주의적 작품을 쓴 가와바다 야스나리 같은 사람을 들고 있습니다만, 지극히 개인적인 문학 양상을 가진 작가도 비극으로 끝나고 말았지요. 그런 면에서 보면 일본문학은 종잡기 어려운 점도 있다고 봅니다.

이제 시인으로 살아온 제 개인적인 얘기를 좀할까 합니다. 제 시 쓰기는 집단성보다는 철저히 개인적인 것으로서의 시 행위였습니다. 저는 올해로 직장이었던 대학을 뜬지 9년째 접어듭니다. 65세 이후 9년까지의 제 시 쓰기를 보면, 미네르바에서 이라는 시집을 정년하고 처음 낸 이후에, 재작년 문학아카데미에서 종이학, 작년에는 살아가면서 슬픔이라는 2행 시집을, 금년에는 리토피아에서 마추픽추 장시집을 출간했습니다.

그러고 보니깐 계산해 보면 제가 대학정년까지 13권의 시집을 5년 터울로 낸 폭이 되는데, 정년 이후에는 시집을 더 열심히 냈죠. 3년 전부터는 거의 매년 한 권씩 내다시피 했어요. 그래서 내가 왜 이렇게 시를 많이 쓰고 시집을 내는가 돌아보니,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시인으로서의 초조와 또 한편으로는 살아는 있으되 늙어서 별 할 일도 없는 한가함이 시를 많이 만드는 거 같습니다. 이렇게 시를 쓰다 보니깐 시 쓰는 것도 일이라고 어쨌든 시 쓸 일이 있으니깐 오래 사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고요. 아마 개인적으로 시를 못 쓰게 되면 빨리 죽지 않을까 하는 느낌도 들어서 좀 오래 살려고 부지런히 시를 씁니다. 늙어서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것은 무슨 일이든지 다 좋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저는 상당히 긍정적으로 생각합니다만, 개인적으로 제가 시를 쓴다 해도 하루아침에 시를 썼던 것은 아니겠죠,

저는 직장생활을 한 40년 했어요. 따져보니깐 출판사에서 한 20년을 일했어요. 출판사에서 20년 책 만들고 술 먹고 놀다가 대학에 와서도 뭐 돈도 안 되는 시를 쓴 덕택에 시를 팔면서 한 20년 먹고 살았어요. 어찌 보면 괜찮은 인생이지요.

제가 일생 시인으로 행세하게 만든 기본적인 바탕을 다진 것은 출판사에서 한 20년 수많은 책을 읽고 만들고 기획하고 한 것인데요, 이것이 오늘날 그나마 나라고 하는 개인을 만들어주지 않았나 생각을 하게 돼요. 그 얘기를 조금 해보려고 합니다. 제가 출판사를 많이 돌아다녔어요. 어문각에서 시작해서 삼성출판사. 현암사, 동서문화사, 문학예술사 등 6~7군데를 다녔어요.

출판사를 다닐 때는 가진 것이 없는 적수공권으로 시작한 생활이니까 모든 것이 어렵고 힘들었어요. 아르바이트도 많이 했어요. 원고 윤문 등 무슨 일이든 닥치는 대로 했어요. 끊임없이 일하면서 술 먹고 다녔지요. 왜 한 직장에 자리 잡고 오래 있지 못하고 여기저기 돌아다녔는가 생각해 보니까 돈 때문이었어요. 젊어 철도 없고 돈이 궁하기도 하니까 다른 출판사에서 몇 푼 더 준다면 좋아라 그 이튿날에 보따리 싸서 떠난 것이지요. 나중에 그게 후회가 되더라고요. 20년 제가 돈 벌어준 회사도 수없이 많아요. 근데 그렇게 돌아다니다보니 돌아오는 건 없는 겁니다. 출판문화협회에서 주는 출판 편집상상이라고 하는 것이 있어요. 자격이 20년만 되면 받는데, 제가 제일 많이 있어본 것이 현암사에서 7년을 있어본 거 같아요. 그러고 수없이 돌아다녔고, 그래서 자격이 없으니 그 상을 못 받은 것이 좀 아쉽더라구요. 한 곳에 오래 있었으면 당연히 차례가 왔을 텐데 말이에요. 좀 오래 한 군데 있으면 미련해 보였었죠? 자기 정체성도 잊은 미련한 놈 같기도 하고, 죽어라 일만 하고 그러는 것이 젊은 날엔 싫더라고요. 내가 취직시켜 준 친구가 어문각에서 코피가 터지게 일하면서 죽어라 있는 걸 보았어요. 속으로는 저 바보 같은 놈, 그랬는데 나중에 보니깐 걔들이 나보다 훨씬 잘 된 거야. 제가 많이 배웠어요.

시골에서 자란 제가 뭘 배운 게 있겠어요. 강원도에서 하나뿐인 주문진수산고등학교를 다녔지만 실업계 학교라 문과 과목에는 등한시하는 경향이 있었어요. 국어선생님도 문학과는 담을 쌓은 분이었고요. 혼자서 문학을 공부했지요. 문학을 공부한다니 좀 이상한 생각이 들지만은 공부했어요. 그러니 원고지에 글을 쓴다는 것도 몰랐고, 맞춤법이라든지 문장의 문단 나누는 요령이라든지, 아주 기본적인 것도 전혀 아는 것이 없었어요. 서정주 시인이 날 문단에 내보낸 분이시지요. ‘현대문학을 통해 첫 추천을 받은 시가 박꽃이라는 것인데 시 구절에 박박 긁는다.”라는 표현이 있어요. 여러분은 이라는 글자를 쓸 줄 아시죠. 저는 그 리을 기역조차도 모르는 거야, 그러니깐 미당 선생이 야 이거 틀렸다고 고쳐주셨지요. 그때 나보다 훨씬 늙은 연세의 노인도 아는데 젊은 내가 모른다는 것이 속으로 부끄러웠어요.

근데 군인 제대하고 사회인으로 가진 제 첫 직장이 어문각이라는 출판사였어요. 편집사원으로 하는 일은 다목적 국어사전의 교정을 보는 일이었지요. 국어사전을 만들면서 단어의 수없는 항목들을 만나며 우리말을 배웠어요. 그 많은 단어에서 내가 몰랐던 수없이 많은 단어들을 익히고 뿐만 아니라 고유한 우리말의 아름다움도 만나게 되었지요. 여러분이 집에 가지고 있는 사전은 참으로 어렵게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단어의 뜻도 분명해야 되고 오자가 나도 안 되지요. 사전을 만들면 교정도 적어도 15번은 거칠 겁니다. 사전을 만들면서 틈틈이 익혔던 우리 고유의 말들에 대한 대학노트가 지금도 내 서재에는 있습니다. 제 초창기 시를 보면 우리 고유 언어를 가지고 차용해서 쓴 시들이 많이 눈에 띕니다. 이렇게 어문각에 들어가 다목적 국어사전 만드는 일을 했던 것이 아마 일생 시 쓰는데 결정적 재산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50년대 시인들이나 그 이전의 일어 세대의 시인들을 보면 해방되고 나서 우리 글을 익히고 시를 쓰기 위해 국어사전을 통째로 읽었다고 하는 분들도 몇 명 봤어요. 아마 일제라고 하는 시대적 상황이 있어서 조선말, 우리말을 배우기 위해 국어사전을 읽었겠지만, 그런 것 아니더라도 시인으로서의 가장 기본적인 것은 살아가는 과정에서 많은 접촉과 경험에 의해 습득한 우리말을 많이 가지고 있는 것이 우선 시인으로서의 자산이라고 생각합니다. 시인은 언어를 무엇보다는 자유자재로 주무를 줄 아는 장인이어여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면에서 저로서는 어문각에 들어갔던 것이 참으로 잘 됐고, 그 다음 옮긴 것이 삼성출판사였습니다. 삼성출판사 가서는 한국단편문학대계라는 전집의 교정을 봤지요. 단편소설의 교정을 보면서 문학작품에 동원된 단어들의 다양성에 적응했다고나 할까요. 어문각의 사전적인 일과는 전혀 다른 경험을 체득한 것입니다. 제가 모신 파트에 부장으로 김균희씨 라는 분이 계셨는데 이 분이 교정에는 베테랑 같은 분이었어요. 그분 밑에서 배운 것이 아주 큰 힘이 되었지요.

다음에 옮긴 곳은 현암사였습니다. 현암사를 가서 제가 처음 한 것이 한국의 명저라는 것을 만들었는데, 필자들이 거의가 대학교수들입니다. 원고를 받아오고 편집도 하고 때로는 교정도 보는 일을 했지요. 대학에서 이름이 나 있는 많은 분들을 만나보았지요. 그분들의 이야기도 듣고 제 인생에 많은 도움이 됐어요. 솔직히 저는 우리나라에 어떤 명저가 있는지 꿈에도 생각을 못했어요. 고전이라고 대학에선 배운 건 금오신화, 구운몽, 춘향전, 삼국유사, 삼국사기 등 이게 제가 배웠던 고전에 대한 목록의 거의 다 아니었나 싶습니다. 현암사에서 기획한 한국의 명저라고 하는 것은 우리 명저에 대한 해설서인데 놀랬어요. 의학, 법률, 병법, 산술 각 분야에 거쳐 없는 책이 없는 거야. 정말 놀랐어요. 비록 다이제스트지만 그것을 읽으면서 겉핥기지만 한국의 고전에 대한 전반적인 것을 알았습니다. 또 당시에는 국학 부흥이 붐이 사회 일각에서 크게 일었는데 한국의 명저를 통해 한국적인 것이 무엇인가 하는 쪽에 눈을 돌리게 되는 계기가 됐습니다.

시인으로서 내가 누구인가를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얘기지요. 다산이 말처럼 나는 조선인이니까 즐겨 조선인의 시를 쓰겠다는 자각이 온 것입니다. 내가 써온 시는 서구시의 흉내를 낸 시다. 잘 알지도 못하는 서구의 이론을 받아들여 그것도 남들이 쓰니깐 그러려니 흉내를 내면서 쓴 거지요. 오늘날 자유시라고 하는 것이 왜 자유시라고 하는지 여러분들은 아십니까? 모르면서도 남들이 쓰니깐 나도 그저 이런 꼴이 시이거니 따라 쓰는 거지요, 왜 이것이 자유시냐고 묻는 사람을 누구 한 사람 못 봤습니다. 어느 문학이론서에서도 왜 자유시의 형식이 이런 것인지 하는 얘기를 듣고 보지 못 했어요. 이것이 우리 시인들이고 현실입니다. 저 자신도 시인 되고서도 늘 그렇게 살았죠. 늦게나마 자신을 돌아보는 기회가 책을 통하여 눈뜨게 된 것은 다행이었다고 지금도 여깁니다.

출판사를 다니던 중 현암사에서 내 인생을 결정짓는 책들을 참으로 많이 만났습니다. 사서삼경입니다. 사서삼경 중에 논어를 그 중 높게 칩니다만 전 시경을 깊이 읽었고 당시에 빠졌습니다. ‘당시는 전체가 주는 느낌이 당비파의 가락과 흡사하다는 점이고 자유롭고 감정이 풍부하게 우러나오고 때로는 잔나비 울음처럼 애를 끊기도 하고 인간의 희노애락과 환과고독과 모든 것을 담은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불가사의하지만 중국시에서 가장 대표적인 시는 당시가 아닐까요. 이백, 두보만이 아니라 많은 훌륭한 시인들의 작품을 만나게 되었지요. 현암사판 사서삼경 속에 당시는 작고하신 이원섭 시인이 번역한 것입니다. 원시에서 많이 벗어난 의역임에도 불구하고 편편마다 시로서의 생명을 지닌 번역이었지요. 시인으로서는 누구나 한 번을 꼭 접해야 될 시집이라고 믿습니다. 저는 백거이, 이하라든지 이런 시인들의 작품에 많이 빠졌던 적이 있어요. 오늘날 우리가 자주 입에 담는 초현실주의라든지 하는 시가 서구 보다 훨씬 앞서 동양에서 있었다는 사실도 당시를 통하여 깨닫게 되었지요. 시 주머니를 차고 다니며 매일 시를 썼던 프로의식에 투철했던 시인 이하도 떠오릅니다. 우리에게도 시가 餘技가 아니라 전문적인 것으로서 있었다는 얘깁니다.

현암사에서 한 7년을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러면서 육당 최남선 전집을 편집책임으로 완간했지요. 우리나라에 대한 상식적인 것들, 역사에 대한 것들을 참 많이 공부했습니다. 육당전집은 읽기도 힘들고 한자자전을 뒤적여도 없는 어려운 글자들이 있는 원고여서 힘들었던 기억도 있지만 그만큼 공부가 되었던 책이었습니다. 특히 시에 관한 것들 경부철도가라든지 우리나라 초창기 시에 나타나는 계몽성이나 시조집 백팔번뇌 등을 보게 되어 우리 시문학사의 출발점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다음으로 잊지 못할 책은 대세계사입니다. 작고한 문학평론가 장문평이 일본의 중앙공론사 발간의 책을 번역한 스물 몇 권인가 되는 방대한 책인데 세계사에 권한 저서가 별로 없던 현실에서 자세하게 세계 역사에 대한 인식을 높일 수 있는 책이었습니다. 아마 젊은 날의 이런 독서에 대한 축적이 나름 틈만 나면 해외여행을 자주하게 되고 근래 시인으로서 연작 장시 마추픽추를 쓰게 되지 않았나 합니다.

한국 분단전쟁이 휩쓸고 간 강원도 조그만 어촌에서 자란 제가 클래식 음악이나 미술을 알 리가 없잖아요. 골동품 같은 것은 더더욱 알 리가 없지요. 추사라는 이름도 들어보지 못했어요. 대학을 졸업하고 출판사에 다니면서 추사체라는 말도 들어봤지요. 정말 엉터리죠. 직장 다니며 학국학에 대한 이해를 하다 보니 골동품 쪽에도 관심을 가졌어요. 책을 가까이 하니 자연스럽게 이런 것들도 오게 되더군요. 한때 서화 골동 등에 관심이 있어 상당히 미쳤습니다. 주말만 되면 공주고 전주고 인사동이고 수없이 다녔어요. 하지만 돈이 있나요. 박물관 앞에 가서 구경이나 하고 올라오고 그랬죠. 그러다 보니깐 이 골동점 주인들이 낯이 익으니까 구경하라고 보여주기도 해요. 돈 있으면 싼 것들을 사기도 했어요. 토기류, 벼루 등이지요. 하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 하다보니깐 싫더라고요. 집에 술 먹으려고 오는 친구들이 갖고 싶어 하면 줬어요. 모르고 나쁜 것 골라가려고 하면 더 좋은 거 가져가라고 했지요. 그게 또 무슨 재산이라고 갖고 싶지도 않더라고요. 달라고 하나씩 주고 그랬어요. 지금도 벼루는 한 2~30개가 있지 않을까 싶네요. 언젠가 청주 골동품 인쇄박물관 앞에 가서 형편없는 걸 물어보니 3~40만원 달라고 하더라고. 집에 있는 벼루는 아마 몇 백은 나가지 않을까 싶어요.

벼루얘기 좀 하겠습니다. 제가 한양대학원을 다녔는데, 고전 전공의 교수가 학점도 잘 안주고 까다로워요. 그래서 어떻게 잘 보여야 할 것 같았지요. 늙어서 다니니깐 젊은 대학원생들이 많잖아요. 대다수가 젊은 애들이거든요. 교수들이 출석 부르고 안 나오면 학점도 안주고 그러는데 나는 출석 안 해도 학점도 잘 주고 하니깐 분위기가 좋지 않은 것은 당연하지요. 고전하는 교수가 까다롭게 굴어서 제가 인사동에 모시고 술 한 잔 하면서 좋은 벼루를 하나 줬어요. 근데 이 교수가 벼루를 보고자는 굉장히 좋아하는 거예요. 자기도 못 본 건거든. 지금도 그 벼루 생각이 나죠.

어쨌든 시만이 아니라 시와 관련된 여타의 공부에도 관심을 갖다보니 계몽사에서 미술책도 내게 되고 고려원에서 우리 문화의 길잡이이라는 책도 냈어요. 이들 책들은 당연히 전문가로서 낸 것이 아니라 다 시인의 안목으로서 보고 느낀 점을 글로 표현한 것들입니다. 시인인 내가 보는 우리나라 그림이 어떤가, 우리나라 고려청자가 왜 내가 볼 때 좋은가, 그런 얘기를 했던 것입니다.

제가 이제까지 늘어놓은 얘기는 개인으로서의 삶이 시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가를 말하고 싶어서였습니다. 저는 제가 오늘날 시를 잘 쓰든 못쓰든 일생에 시를 쓸 수 있었던 것은 시가 전인격적인 산물이라는 확신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시론 때문입니다. 시라고 하는 것이 어떤 한 가지 재능만 있어서 되는 것이 아니고 모든 것이 복합되어 한 편의 시가 된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어느 한쪽에만 지엽적으로 매달려서는 안 된다는 말을 하고 싶습니다.

어쨌든 시를 쓴다고 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남이 아닌 자기만의 시세계를 가지는 것이거든요. 그래야만 누가 읽어도 자신의 색깔이 분명한 시를 쓸 수 있습니다. 나로서 설 수가 있는 것입니다. 자기의 시 세계를 끊임없이 탈바꿈 해가는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한곳에 오래 머물러 있으면 안 되는 것 아닙니까. 박목월 시인도 시적 변용에 대하여 얘기를 한 적이 있어요. 시적 변용이라고 하는 것. 어떤 시인은 일생 자기의 시세계가 하나도 변치 않고 그대로인 채 끝나는 시인도 있지만 다른 시인은 시를 낼 때마다 다른 목소리를 내는 시인이 있다고 합니다. 어느 시인이 더 좋은 시인이고 나쁜 시인이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시세계가 자주 바뀌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바뀐 시세계가 나름 성공한 것이냐 아니냐가 중요하다고 해요. 그만큼 한 시인이 시세계가 변하는 것이 성공하기 힘들다는 얘기지요. 정말 어렵다고 해요. 하지만 저는 어느 시점을 기준으로 시인은 끊임없이 자기 시세계를 개발해야 되고 자기의 색깔과 자기의 언어로써 시를 쓸 수 있는 고여 있는 물이 아니라 흐르는 물이어야 한다고 봅니다.

저는 요즘 시를 읽으면서 감성으로 읽던 시대는 지났다고 봅니다. 제가 6~90년대 자주 보며 낯익던 시들하고는 차원이 다릅니다. 매체가 다양해지고 정보화되고 컴퓨터가 있고 종편이 있고 그러다 보니깐 말이 많아졌어요. 산문시적인 경향이 많아지고 말이 많아지다 보니깐 하나의 상식으로써 시를 읽을 필요도 있게 됐어요. 시를 읽다 보면 전혀 모르는 외래어를 접하거든요. 상식으로 시를 읽는 시대가 된 거지요. 모르는 시어가 나오면 컴퓨터 검색창도 두드려 봐야 되고요. 저는 그런 시들도 긍정적으로 이해하려 합니다. 그것이 바람직한 방향인지 아니지는 모르지만 배운 것이 많고 본 것이 많은 시인들에게 있어서는 너무나 당연한 결과가 아닙니까.

제 이야기 끝은 여기까지입니다. 무슨 시를 쓰던 자기만의 색깔과 목소리을 내는 시인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추천0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사)대한노래지도자협회
정종권의마이한반도
시낭송영상
리토피아창작시노래영상
기타영상
영코코
학술연구정보서비스
정기구독
리토피아후원회안내
신인상안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