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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산
안개는 짙을수록 맑다
-남태식 시인의 시를 읽고
남태식 시인은 섬세하면서도 강한 필력을 갖고 있는 시인이다. 그가 마음을 열고 자유롭게 놀 때, 그의 날쌘 몸동작과 신들린 듯한 몸짓에 많은 사람들이 즐거워하고 감탄하며 경의를 표하기도 한다.
이렇듯 섬세한 그의 몸짓처럼 그의 시어들에도 섬세하면서도 강한 시어들이 등장한다. 최근 그는 안개, 무덤, 꽃 등의 시어에 세상과 권력자들에 대해 불합리한 것, 비판적인 것들을 숨겨두기도 하고 얹어두기도 하면서 그의 세계를 펼치고 있다. 그러면서도 집중과 공존, 협동으로 그가 꿈꾸는 세상에 대한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이상적인 세계를 꿈꾸기보다 현실을 예리하게 관찰하면서 불합리한 것들을 지적한다. 그러면서도 따뜻한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다.
복지사회란 경제적인 조건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영혼의 탐구가 상식이 되는 사회이어야만 하는데, 이러한 영혼의 탐구는 경제적 조건이 해결된 후에 해도 늦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마치 소학생들이 숙제시간표 만드는 식으로 시간적 절차를 둘 성질의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하자면 영혼의 개발은 호흡이나 마찬가지다. 호흡이 계속되는 한 영혼의 개발은 계속되어야 하고, 호흡이 빨라지거나 거세지거나 하게 되면 영혼의 개발도 그만큼 더 빨라지고 거세져야만 할 일이지 중단되어서는 안 될 것이고 중단될 수도 없는 일이다.―김수영, 1960.
이른 새벽부터 일어나 종일을 피어 있는 꽃이 있다.
한낮에나 어슬렁거리고 나와 한나절만 피어 있는 꽃도 있고,
종일을 싸돌아다니다가 해질 무렵 잠깐 피는 꽃도 있으며,
낮에는 어딘가에 박혀 있다가 달뜨는 밤에만 나와 피는 꽃도 있다.
여러 철을 이어서 피는 꽃도 있지만, 봄에만 피는 꽃도 있고,
여름에만 피는 꽃도 있으며, 가을에만 피는 꽃도 있다.
겨울에만 피는 꽃도 있고, 언제 피었지? 모르는 새 지나간 꽃도 있으며,
피울까 말까 고민하다가 끝내 안 피는 꽃도 있다.
어떤 꽃이 보기에
한낮에 피는 꽃은 한나절을, 해질 무렵 피는 꽃은 종일을 논 꽃,
밤에만 피는 꽃은 정신이 온전하지 못한 꽃일 수 있다.
한 계절만 피는 꽃은 집 말아먹을 꽃,
모르는 새 피었다가 진 꽃은 멍청한 꽃,
끝내 피지 못한 꽃은 말을 말아야 할 꽃일 수도 있다.
하지만 하늘은 언제나 어김없이 모든 꽃들에게
고루고루 물과 바람과 흙과 햇빛을 내리시고,
꽃들은 또 고루고루 내리시는 하늘을 탈 잡지 않으며,
제 필 때를 알아 피고 함께 피어 있으니,
누가 보시더라도 이건 공정하고 조화롭다.
상식의 집에서의 일이다.
상식의 집에서는 이건 그냥 상식이다.
영혼의 탐구가 상식이듯,
호흡이 또 상식이듯.
―「놀며 피는 꽃」 전문
이 시에서 ‘꽃’은 우리의 일상, 우리가 살아가는 여러 모습이다. 첫 연에서 시인은 다양한 꽃들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이른 새벽부터 종일 피어 있는 꽃, 한나절만 피는 꽃, 해질 무렵 잠깐 피는 꽃 등 우리 주변의 다양한 군상들을 꽃에다 투영해 놓았다.
둘째 연에서의 꽃들은 한나절이나 종일 피는 꽃은 그만큼 논 것이라고 하고 밤에 피는 꽃은 정신이 온전하지 못하며 한 계절 피는 꽃은 집안을 말아먹을 꽃, 멍청한 꽃, 말을 말아야 할 꽃들을 이야기 하면서 우리 주변에서 마주칠 수 있는 온전하지 못한 또 다른 군상들을 투영해 놓았다. 그러면서 그들에게도 하늘은 ‘언제나 어김없이 모든 꽃들에게 고루고루 물과 바람과 흙과 햇빛’을 내려주고 꽃 들은 그런 하늘을 탓하지 않는다고 이야기한다. 제가 필 때를 알아서 피고, 함께 핀다고 이야기 한다.
모두가 그들만이 갖고 있는 제각각의 다름이 있고 그 다름을 인정하며 받아들이는 것이야 말로 누가 봐도 공정하고 조화롭고 상식적인 것이다. 나는 하루 종일 피는데, 너는 왜 잠깐만 피냐고 탓하지 않는다. 각자가 주어진 자리에서 주어진 만큼의 몫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그들만이 간직하고 있는 모습 그대로를 인정해 준다. 우리가 숨을 쉬고 호흡하는 것이 상식이듯이 모두가 조화롭고 공정하게 사는 세계를 말한다. 이것은 ‘상식의 집에서의 일’이라고 하며 어떤 힘도 가해지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며 각자의 자리에서 알아서 피고 함께 피는 것이 상식이라고 주장하면서 그렇지 못한 세상에 대해 꼬집고 있다.
상식적인 것이 상식적이지 못하기에 그의 시들에는 무덤이나 안개 등의 시어들이 많이 등장한다.
금강봄맞이꽃 윤판나물 대극 갯장구채는 봄에 피는 봄꽃이고, 해오라비난초 돌꽃 약모밀 우산나물 절굿대는 여름에 피는 여름꽃이며, 울릉국화 꼭두서니 돌피 낙동구절초 수원잔대는 가을에 피는 가을꽃이고, 수선화 털머위 사프란 해국은 겨울에도 피는 겨울꽃이다.
모두 야생의 꽃으로 산과 들과 강변과 길가에서 철을 알고 철따라 핀다. 한꺼번에 다투어 피기도 하고 다투어 이어서 피기도 하지만, 다툼은 다툼이 아니어서 사시사철 갖가지 색 색깔로 조화롭게 꾸밀 뿐, 산야의 작은 한 귀퉁이도 무너뜨리거나 사라지게는 안 한다.
무덤 안에서 피는 꽃이 있다. 이 꽃은 그러니까 무덤꽃이다. 무덤 안은 철이 따로 없으니 이 꽃은 철없는 꽃이다. 그러니까 망나니꽃이다. 아무 때나 다투어서 피고 다투어 이어서 피는데, 다툼은 다툼이어서 말을 휘두를 때마다 산야의 한 귀퉁이가 무너지거나 사라진다.
개는 개끼리 한통속으로 골목에서, 새는 새끼리 한통속으로 하늘에서 놀듯이, 무덤꽃은 무덤꽃끼리 한통속으로 무덤 안에서 논다. 야생의 꽃들은 야생의 꽃들끼리 다투어도 야생에서 한통속으로 놀아야 하는 법, 무덤 안을 기웃거리는 야생은 곧 시들어 향기를 잃는다.
무덤꽃들은 자주 말을 휘둘러 야생의 꽃들을 찍어 내모는데, 언젠가는 무덤꽃들이 어느 야생의 한 꽃무리를 찍어 내몰 때 다른 야생의 몇 꽃무리도 무덤 안으로 가 들러리를 서더니, 철없는 말바람에 철 이른 눈바람이 몰아쳐 한통속의 야생의 꽃들이 무수히 스러졌다.
낯익으나 낯 선 풍경 앞에서 나머지 야생의 꽃들은 말을 잃었는데, 무덤꽃들이 뒷춤에 감춘 이어서 누구를 향할지 알 수 없는 저 손가락들을 못 본 체 하고 미리 떨며 선 들러리에 또 오래 줄줄이 수치를 당할 거다. 그러니까 무덤 안에서 노는 꽃은 다 무덤꽃이다.
―「무덤꽃」 전문
첫 연에는 야생에서 철따라 피는 꽃들을 나열해 놓는다. 모두 야생의 꽃으로 산과 들과 강, 그리고 길가에서 철을 알고 철따라 피고 다투어 피기도 하지만, 다툼은 다툼이 아니라 사시사철 갖가지 색깔로 조화롭게 제 주변을 꾸미는 것이고 한다. 인간은 좀 더 편리함을 위해서 또는 돈이 되는 일이라면 가리지 않고 자연을 개발하거나 파괴한다. 그러나 그들은 주어진 그대로 살아간다. 불공평하다고 탓하지 않고 인간처럼 자연을 무너뜨리거나 사라지게 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는 무덤 안에서 피는 꽃들이 있는데, 이 꽃은 ‘무덤꽃’이고 ‘철없는 꽃’이고 ‘망나니꽃이’라고 한다. 이 무덤꽃들은 ‘말을 휘둘러 야생의 꽃들을 찍어 내’몬다고 비판한다. ‘개는 개끼리 한 통속으로 골목에서 놀고, 새는 새끼리 한 통속으로 하늘에서 놀듯이’에서와 같이 학연, 지연, 지역 등 끼리끼리 한 통속이 되는 현 사회를 비판한다. 이런 상황에서 또 힘 있는 자에게 달라붙어 들러리 서는 현 세태를 꼬집는다. 요즘 정치에 관련된 뉴스들을 보면 그렇게 해서 발탁한 인사들이 올바르지 않은 역사관이나 비리, 또는 그밖에 정치인으로서 옳지 않은 일들에 연루되어 줄줄이 낙마하는 것을 보면서 그의 시에 공감을 표한다.
들뢰즈는 니체에게 있어서 ‘세계란 서로 연관성을 가지는 역동적인 힘의 양으로 구성된다고 주장한다. 힘들은 특정한 양을 가지지만, 다른 힘들로부터 고립된다면 힘의 양은 오해된다. 모든 힘들은 다른 힘들과 연관되며, 두 개의 관련성을 가지는 힘들은 똑같은 양을 가지지 않는다. 하나의 힘은 다른 힘보다 항상 더 크며, 서로 다른 양의 힘들로부터 각 힘의 특성들이 나온다. 그 양에 따라 지배하는 힘이 되든지 혹은 지배받는 힘이 되며, 질에 따라 능동적이거나 반응적인 힘으로 결정된다. 그러나 만약 관계를 생성한 힘 내부에 역동적인 요소들이 없다면, 힘들은 결코 상관관계를 형성하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이러한 상관관계에 얽혀 있다. 지역, 학연, 지연, 등의 인맥으로 얽혀 끼리끼리 맞물려 있다.
남태식 시인의 ‘무덤꽃’에서는 시인의 이런 힘의 지배에 대한 비판을 엿볼수 있다. 그리고 그의 다음시인 ‘꽃들에게 평화를’에서도 이런 힘의 지배와 한 동안 색깔론으로 시끄러웠던 우리 사회의 단면도 엿볼 수 있다.
(무덤가에 꽃들이 피어있다.
무덤 위에 꽃들이 피어 있다.)
무덤가에 핀 주황꽃은 주황꽃이냐 빨강꽃이냐
꽃대를 감아 오르며 뜬금없이 슬쩍 말을 흘리는
담쟁이 하나
무덤 위에 핀 노랑꽃은 노랑꽃이냐 빨강꽃이냐
꽃들의 목을 휘감으며 기다렸다는 듯이 목소리를 높이는
담쟁이 여럿
빨초록꽃 빨파랑꽃 빨남색꽃 빨보라꽃
온갖 꽃들에게 빨강물을 칠하는 담쟁이는
육갑이 넘은 메카시
꽃들은 왜 하필
무덤가에 피었느냐 무덤위에 피었느냐
주노초파남보
위장이다! 벗겨라!
다 빨강이다!
잠시 사라졌다가 이름만 바꿔 나타나 여전 꽃들을 옥죄는
육갑에 반육갑을 더해 가는 카멜레온
꽃들의 형화를 위하여 이제
뿌리를 뽑자!
바짝 말려서,
싹 다시 못 틔우도록
불태우자!
온 육갑하는
저 메카시, 카멜레온!
―「꽃에게 평화를」 전문
‘무덤꽃’에서는 무덤 안에서 피는 꽃을 철없는 망나니꽃이라고 하더니 이번에는 무덤가와 무덤 위에 피는 꽃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무덤가에 핀 주황색 꽃에게 ‘주황꽃이냐 빨강꽃이냐’고 물고 무덤 위에 핀 노랑꽃에게도 ‘노랑꽃이냐 빨강꽃이냐’고 질문을 던진다. 시인은 이 시에서 한 동안 우리 사회를 휩쓸었던 색깔론에 대한 비판을 가하고 있다. 각각의 꽃들은 제각각 자신의 색깔과 향기를 가지고 있기 마련인데, 주황꽃도, 노랑꽃도 다 빨강꽃이냐고 묻고 있는 것이다.
그는 온갖 꽃들에게 ‘빨강물을 칠하는 담쟁이’를 ‘육갑이 넘은 메카시’라고 칭한다. 그러면서 잠깐 동안 잠잠했다가는 다시 이름만 바꿔 나타나 사람들을 옥죄는 이들을 ‘육갑에 반육갑을 더해가는 카멜레온’으로 가져다 놓는다. 그리고 그는 ‘메카시’와 ‘카멜레온’을 ‘꽃들의 형화를 위하여’ 이제는 뿌리 뽑자고, 싹을 틔우지 못하도록 불태우자고 외친다.
들뢰즈는 니체의 비평에서 두 가지의 기본적인 활동을 구분한다. 의미sens, sense, meaning의 해석과 가치에 대한 평가이다. 이 양자의 활동은 힘에 대한 평가, 관계 속에서 힘의 특질을 포함하는 해석, 주어진 힘의 관계에서 명백하게 드러나는 권력에의 의지의 특징에 대한 평가를 포함한다.
대상이 가지는 의미는 “그 사물을 전유하고, 활용하며, 장악하거나, 그 안에서 스스로를 표현하는 힘”에서 파생된다. 모든 힘은 실재의 한 부분에 대한 전유이고, 사물의 역사는 그것을 소유했던 연속적인 힘의 역사이다. 단 하나의 사물이나 현상은 그것을 사용하는 힘에 따라 의미가 변화한다. 힘은 항상 복수적이므로 해석 또한 본질적으로 복수적이다. 힘은 또한 이전에 같은 대상을 전유했던 힘을 가장하여 스스로 가면을 쓴다. 그러한 이유로 “해석이라는 예술 역시 가면을 뚫는 예술임에 틀림없다. 그리하여 하나의 현상이라고 하는 것은 외양이나 심지어 환영 같은 것이 아니라, 현재적인 힘에서 의미를 찾는 하나의 기호나 징후인 것‘이라고 한다.
남태식 시인의 ‘무덤꽃’이나, ‘꽃들에게 평화를’ 에서의 ‘꽃’도 이와 같은 의미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무덤가에 안개가 짙다.
안개무덤이다.
안개에는 온갖 먼지들이 겹겹 껴있다.
과거의 논리로 따지자면 이 먼지는
한편 굳건하기도 하여서
쉬이 벗길 수 없을 만큼 단단하다.
무덤가에는 잠든 여러 무리의 아이들이 있다.
모두 오래된 아이들이다.
한때는 하루 이틀 사흘 함께 잠을 설치던
나흘 닷새 엿새 함께 속을 쓰리던 아이들이다.
이때껏 보려고 하면 보기는 했으나
이제는 안개 너무 두꺼워 보려 해도 볼 수가 없다고
무덤가에서 지레 봉사 벙어리 귀머거리가 되어
포기하고 한탄만 하다가 잠든 아이들이다.
잠의 강에 빠져 비몽사몽 하는 아이들을 향해
한때 함께 설치던 잠은 무엇이었나
한때 함께 쓰리던 속은 또 무엇이었나
대답 없는 물음을 묻고 또 묻는 사이
안개무덤을 감싸는 벽은 차곡차곡 견고하게 쌓이니
오래된 아이들을 향한 물음은 그만 멈추고
오래된 아이들을 향한 바라기도 그만 멈추고
이제 다시 촛불을 든다.
일어나자!
솟구치자!
벗기자!
무너뜨리자!
우우우 함께 외치니
앞에 보이는 건
갈라져 솟구치는 잠의 강
부서져 흩어지는 무덤의 먼지
벗겨져 물러서는 무덤의 안개
무너뜨리지 않으면 감옥이라고 불릴
벽, 막아서는, 무너지는, 벽!
―「다시 촛불」 전문
현실을 직시하며 나아가는 시인은 ‘다시 촛불’이라는 시에서 무덤가에 안개가 짙고, 안개에는 ‘온갖 먼지들이 겹겹이 껴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무덤가에서 잠든 여러 무리 아이들이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아이들은 ‘모두 오래된 아이들이다.’라고 한다. 이 오래된 아이들은 한때 세상의 부조리에 맞서 싸우기도 하고, 괴로워하기도 한 ‘함께 속을 쓰리던 아이들이’였지만 이제는 ‘무덤가에서 봉사 벙어리 귀머거리가 되어 포기하고 한탄만 하다가 잠든 아이들’ 즉, 세상의 부조리와 적당히 타협하고 그건 타협을 정당화 하면서 적당히 살아가는 현시대의 우리들의 모습인 것이다. 세상을 뒤바꿀 수 있는 힘과 젊음의 의지로 현시대를 자각하고 인지하는 사람들은 없고, 힘없는 어린아이들, 그것도 온갖 먼지가 겹겹이 껴있는 안개 속에서, 무덤가에서 잠든 아이들만 있는 것이다. 죽은 세상(즉 무덤)에서 깨어있지 못하고 먼지 낀 세상에서 잠들어 버린 오래된 아이들만 있는 것이다. 이렇게 남태식 시인은 현실을 외면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온갖 먼지들이 겹겹이 껴있는 안개 속에서 한탄만 하다가 잠든 아이들로 표현해 놓고 있다. 그리고는 다시 촛불을 들자고 외친다.
‘무너뜨리지 않으면 감옥이라고 불릴 벽’과 ‘막아서는’ 안개의 벽을 허물기 위해서 다시 촛불을 들고 나서자고 잠든 이들에게 외친다.
안개가 짙으면 짙을수록 맑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시인은 ‘집중’ 이라는 시에서 ‘안개가 짙으면 안개에만 집중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그는 이 시에서 곧 안개가 걷히고 맑은 날이 올 것을 기대하며 안개에 집중하면서 내일이 밝아오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안개가 짙다. 안개가 짙으면 안개에만 집중해야 한다.
안개의 몸피를 더듬어 가늠하고 손가락 발가락의 수를 세어보아야 한다. 안개의 표정은 맑은가 어두운가, 입술은 여태껏 앙다문 채인가 배시시 열리는 중인가, 안개의 속살은 두꺼운가 부드러운가 또 얼마나 깊은가 음습한가 헤아려보아야 한다. 안개의 속살 사이에 들어앉은 나무와 풀과 집과 그 안의 숨결들, 웃음들, 빈 들판의 눈물들, 쉼 없이 나뭇가지를 흔드는 한숨들을 코로 귀로 숨으로 느껴야 한다. 감전된 듯 감전된 듯 온몸을 떨어야 한다. 언젠가는 걷힐 안개에 뒤따르는 햇살, 뒤따라 날아오르는 새 떼들의 날갯짓 따위는 잠시, 어쩌면 오래도록 잊어야 한다.
바야흐로 때는 안개가 짙을 때, 어김없이 안개가 짙고, 지금 우리는 오직 이 안개에 집중해야만 한다.
―「집중」 전문
시인은 안개가 짙으면 안개에만 집중해서 안개의 표정과 모습을 살피며 헤아려 보아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언젠가 안개가 걷힐 날을 위해 그 안의 것들을 ‘코로 귀로 숨으로 느껴야 한다.’고 말하며 ‘감전된 듯’ 움직이고 있는 모든 것을 느끼며 온 몸을 떨면서 ‘지금 우리는 오직 안개에 집중해야만 한다.’고 속삭인다. 안개가 걷힌 세상에서 밝은 햇살과 새들의 자유로운 날개 짓을 기다리고 우리가 아름답게 공존하며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기다리는 것이다. 안개가 걷히고 맑은 날이 올 그날을 꿈꾸는 것이다. 자신이 흘린 땀만큼 거두고 서로서로를 인정하며 조화롭게 살 세상을 꾸꾸는 것이다. 다음 ‘협동이라는 말’이라는 시를 통해 시인이 이야기 하고자 하는 세상을 본다. 이 시에서는 그가 꿈꾸고 바라는 세상을 마주할 수 있다. 그는 그가 살아갈 사회는 공평하고 공정하며 조화로운 세상이기를 바란다.
협동이라는 말,
참 좋다.
하나에 하나를 더하여 온전한 둘이기만 하다면,
둘에 둘을 더하여 온전한 넷이기만 하다면,
모두 하나로 시작하는 동네에서 하나가 아닌
셋쯤에서 시작할 꿈같은 것 꾸지 않는다면,
셋에 셋을 더하여 여섯에 셋쯤을 더 남기려면
그 남기는 셋은 뻣뻣한 어깨임을 알고,
넷에 넷을 더하여 여덟에 넷쯤을 더 남기려면
그 남기는 넷은 거친 주먹임을 알아,
더하여 셋을 더하여 넷을
더 남길 궁리 같은 것 짓지 않는다면,
땀 흘리던 노동의 시절을 기억하고 노동으로
땀 흘린 만큼만 거둔다면 거두어 함께 산다면,
협동이라는 말, 조합해도 좋을 거다.
참 좋을 거다, 협동에 협동을 조합한 협동+조합.
―「협동이라는 말- 어떤셈법 2」 전문
시인은 ‘하나에 하나를 더하여 온전한 둘이기’를 꿈꾸며 ‘땀 흘리던 노동의 시절을 기억하고 노동으로 땀 흘린 만큼만 거둔다면 거두어 함께 산다면, 참 좋은 세상일거라 여긴다.’ 그리고 ‘모두가 하나로 시작하는 동네에서 하나가 아닌 셋쯤에서 시작할 꿈같은 것 꾸지 않는다면’ 협동에 협동을 조합한 협동+조합’이라는 말을 조합해도 좋을 거다.’ 라고 생각한다.
남태식 시인은 힘 있는 자들에 대한 비판을 확연하게 들어나는 언어로 나타내지 않는다. 다만 슬쩍 내비치는, 그래서 더욱 궁금해지는 시스루 옷 속에 숨겨두고 있다. 여기에는 현실을 바라보는 예리한 시선과 따뜻한 시선으로 모두를 감싸 안는 따뜻한 시선이 함께 한다. 섬세하고 날쌔고 신들린 듯한 몸짓과 투박한 경상도 사나이의 사투리가 담긴 그의 소리가 정겹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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