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작품(전체)
신작특선/안명옥/오래된 우물 외 6편
페이지 정보

본문
2014년 여름호 아라문학 신작특선 5편
안명옥
오래된 우물 외 6편
당신,
안데스의 눈물을 나르던 물장수여*
날 좀 제발 내버려둬
호기심은 고양이를 죽인다고요
나를 미워하며 살겠다고
썩은 물 더러운 물로 살겠다고
당신의 샘이 꿈을 꾸는군요
샘에서 절망이 솟아오를 거예요
어둠만이 자라나 출렁거리겠지요
모든 구멍으로 견고한 침묵을 기다리는군요
나는
연약한 새 한 마리 숨을 몰아쉬는 모래언덕이예요
목매달기 좋은 날들 지나가고
내가 견디는 건
별을 보며 잠드는 것
구름을 바라보며 한줌 햇살을 받는 것이죠
마치 버려진 11월 같군요
몰락을 즐기듯 몸 던지는 낙엽을 받아주며
자신도 하루빨리 말라버리고 싶다고
도망 갈 수 없는 식물들처럼 독을 품고 있네요
*파블로 네루다의 ‘맞추픽추 산정’의 한 구절.
水位에 대하여
파도가 어둠을 뜯어먹어
신새벽이 출렁이며 오고 있다
흔들리는 내 삶의 바닥에는
위험한 이야기가 해초처럼 자라고
많은 짐을 진 사람은 가라앉을 수밖에 없고
여행하는데 짐은 불편하고
올라가는 등록금에 저당 잡힌 청춘들처럼
불안의 수위 눈금을 밀어 올리는 하루
수위 조절에 들어갔다
아이는 학원을 그만두고
내 대학원자퇴확인서가 집으로 배달되고
위험수위를 낮춰가는 동안
바다에 검푸른 그늘을 만들며
관전만 하던 구름은 떠나고
여전히 잘 올라가지 않는 건
내 월급과 아이들 성적뿐
수압을 견디면
엔진 같은 추진력이 생겨
파도가 몰아쳐도 바닥은 잔잔하고
기상대는 다시 폭풍을 예보하고 있다
자귀나무
밤이면 잎새가 서로 꼭 껴안은
자귀나무 아래 서면
아직도 각방 쓰느냐고
자귀나무 꽃을 꺾어다가 방안에 꽂아두어라
할머니 목소리 바람에 달각달각 들려주는데
자귀나무 그늘에 앉으면
오래 아프던 가슴께
화기가 도는지 조금은 간질간질거리고
올봄에 다른 나무들은 잎이 다 돋아났는데도
자귀나무만 잎이 돋지 않는다
영 죽은 나무인 줄 알고 베어 버리려는데
꼭 껴안은 자귀나무 잎새와
웅웅거리는 바람소리가 서로 싸우고 있다
낡은 집
십팔 년간 끄떡없던 아벨라가 길에서 멈춰 섰다
카센터에서 워터펌프, 팬벨트, 모터교환, 부동액까지 갈고 오니
인터넷 강의로 공부하던 딸아이의 인터넷이 안 되고
세면대 수도배관이 철거 통지처럼 막히고
형광등도 재개발 전단지처럼 깜박거린다
도시의 생채기처럼 보일러를 틀 때마다 소리가 요란하다
언 몸 녹이려 찻물을 얹고 나니 차마저도 떨어졌다.
저녁빛 스며든 딸아이 눈빛이 나에게 묻고 있었다
엄마, 우리 집 괜찮은 건가요?
스님이 준 부적이 3군데나 부쳐진 벽을 가르키고
우리 집 화분 속 화초가 잘 자라고
달이 가까운 달동네서 살고
봄 같은 딸이 사는 우리 집은
아직 괜찮다 했다
겨울나무는 겨울나무처럼 살고 우리는 우리처럼 살면 돼
종점은 출발하는 곳 시작하는 점이야
저 산도 저 하늘도 집도 잠깐 빌려서 살고
고층빌딩에 조각난 하늘 없이 넓은 하늘을 가진 집이라고
틈 많아 바람 잘 통하니 건강에 더 좋은 집이라 해도
딸아이 눈빛은 여전히 거뭇한 형광등 같았다
세상 살기 참 만만치 않아
그래서 살만한 거라고
밤이 깊으면 새벽이 가까워지는 것처럼
집이 따개비처럼 붙어 있어 정겹고
골목이 아름다운 동네라고
신에게로 더욱 가까이 가 있고
하늘과 더욱 가까워진 집이라고
봄밤
겨우내 추위에 굳은 땅을 뚫고
가장 여린 것들이 밀고 나오는 봄밤
우울증이란 마음의 감기 같은 것이라지
남의 집에 얹혀산다는 것은
일찍이 부모 품을 떠난다는 것은
새싹이 어둠 속을 뚫고 나올 때
그 단단한 벽을 뚫고 세상에 나올 때
이백 번 힘주고 용트림하며 올라온다지
네게 온 환청도 눈물도 불면도
언젠가 푸른 독이 되리
네 눈동자가 파릇파릇 잎을 틔우는
한 우주를
한 세계를
한 소식을 얻는 밤
안명옥- 2002년 시와시학 신춘문예 시 등단. 서사시집『소서노』와 장편서사시집『나, 진성은 신라의 왕이다』, 『칼』이 있고, 창작동화로 『강감찬과 납작코 오빛나』, 동화『금방울전』등이 있음. 성균 문학상, 바움문학상 작품상, 만해 ‘님’ 시인상 우수상 수상.
- 이전글신작특선/유경희/유리로 만든 가족 외 6편 15.07.06
- 다음글근작조명/정치산/안개는 짙을수록 맑다 15.07.06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