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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읽기/김보숙/비껴갈 수 없는 그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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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보숙
비껴갈 수 없는 그 자리
모퉁이집 사내
정선희
동네 모퉁이집 사내 어디로 갔을까 키가 훌쩍 크고 병약한 그 사내 어디로 갔을까 하루에도 몇 번씩 동네 한 바퀴, 땅을 줍던 사내 어디로 갔을까 눈이 크고 팔다리가 길어서 구름을 닮은 사내, 걸을 때마다 땅이 휘청, 팔다리를 심던 사내 어디로 갔을까 눈이 마주쳐 몇 번인가 인사를 할 뻔했지 그러나 그와 나는 모르는 사이, 우리는 알아도 모르는 사이, 혼자 있는 그 눈은 고양이의 눈 같아서 아는 척 하면 안 되는 사이, 대문도 닫지 않고 그는 어디로 갔을까 입춘대길 건양다경 아직 붙어있는데 그는 며칠 째 소식이 없다 걸을 때마다 빈 깡통소리가 나는 다리로 어디로 갔을까 오른 손 오른 발이 둥둥 떠다니는 어설픈 동작으로 그는 지금 어디를 헤매고 있을까? 20년도 더 된 봄날이었다.
그 남자의 집은 아직 거기 그대로 있었다. 그 남자의 집을 기대어 바라보던 전봇대도 그 여름 돋보이던 동네의 그늘도, 아직 그대로 있었다. 어른이 되면 집을 떠날 거야, 남자의 집에는 아이처럼 순한 두 노인만이 남아 있었다. 어디로 갔을까, 이제는 알아도 모르는 그 남자는. 그 남자의 집을 지나쳐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나는 버스 안에서 모퉁이집 사내와 마주쳤다. ‘우리는 알아도 모르는 사이, 혼자 있는 그 눈은 고양이의 눈 같아서 아는 척 하면 안 되는 사이, 대문도 닫지 않고 그는 어디로 갔을까’ 시인은 추억을 통해 인생이 지나가는 것을 보여준다. 모퉁이집 사내가 살던 동네의 구석진 그곳은 우리가 비껴갈 수 없는 자리이다. 그러하기에 구석진 그곳은 더욱 비껴가고 싶은 자리이기도 하다. 그 남자의 집을 지나칠 때면 가슴 한쪽으로 느껴지던 묵지근한 통증, 아마도 그것은 모퉁이집에서부터 뭉클뭉클 번져 나왔으리라. 시인은 되돌아온 시간을 순응하며 비껴갈 수 없는 그 자리에 오롯이 섰다. 그 자리에서 나를 노래하지 않고 너를 노래하며 지극한 연민을 담아낸 시인의 마음이 각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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