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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오
남한강에서 비상하는 여주
다음은 여주시 홈페이지 여주 시장의 인사말이다. “남한강에서 비상의 날개를 펼치고 힘차게 날아오르기 시작한 여주! 넘실대는 남한강 물결 따라 낭만과 추억 여행을 떠나고 싶은 곳. 네티즌이 선정한 가장 아름다운 이포보는 연인들의 프러포즈 장소로 제격이며, 세종대왕의 얼이 서린 여주보, 강촌보 전망대에 올라 광활한 강변을 바라보면 속이 뻥 뚫리는 기분을 느끼게 됩니다. 오랜 역사의 흔적 국보4호 고달사지승탑高達寺址僧塔을 품에 안고, 민족의 성군 세종대왕과 북벌의 칼을 갈던 효종대왕을 모시고 있으며, 남한강가 천년고찰 신륵사, 불후의 민족혼을 간직한 명성황후 생가 등 뛰어난 문화유적은 여주를 더욱 빛내고 있습니다. 풍부한 볼거리와 함께 천년 도자기의 고장인 여주가 영양과 맛으로 가득한 쌀, 고구마, 땅콩 등 농특산품 웰빙 먹거리로 찾아오시는 여러분들을 반갑게 맞이해 드릴 것입니다. 편안한 쉼터로 느낌이 좋고 생각이 맑아지는 휴양의 고장, 도시와 농촌이 공존하고, 문화와 관광이 활짝 피어나고 있는 행복 여주로 오세요!”
여주驪州를 다녀왔다. 여주는 가까이 있음에도 집중해서 다녀보기를 소홀히 했던 곳이다. 지난해 시로 승격된 경사와 함께 한강 3개보를 모두 여주에 보유하고 있는 4대강 사업의 최대 수혜자로서, 전통적 관광지는 더욱 잘 다듬어져 찾는 여행객을 맞이하고 있다. 이밖에 명품 아울렛 매장이 2007년에 개장되어 항상 쇼핑객들로 붐빈다.
여주는 명품쌀의 고장이다. 이천과 여주는 서로 자기 고장의 쌀이 더 맛있다고 자랑하면서 경쟁 중이다. 그래서 쌀의 브랜드도 ‘임금님표 이천쌀’과 ‘대왕님표 여주쌀’로 명품 이미지를 부각하고 있다. 여주, 이천 지역에서 쌀, 고구마, 땅콩 등의 농산물이 유명하게 된 것은 기본적으로 양질의 토양 덕이다. 편마암과 화강암은 물 빠짐이 유리하고, 곡식 뿌리에 통기성이 좋아 유기물 분해 촉진이 잘 되는데다가, 사질 양토가 풍부하여 농산물의 생육에 좋다고 한다. 이와 같은 곡식은 조선시대 한강수로를 통해 임금님께 진상되었다고 한다. 지금도 팔당수원으로 보호지정된 덕분에 청정지역을 유지하여, 땅과 물이 좋은 곳에서 수확되는 농산물은 최고의 대우를 받고 있다.
여주와 이천은 도자기의 명산지로도 이름을 떨치고 있다. 도자기를 만드는데 필요한 흙과, 그것을 굽기 위한 땔나무, 도자기 색을 내는 유약(보통 장석, 규석, 석회석 등의 광물)을 쉽게 구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가장 큰 시장인 한양과 가까와서 그렇게 되었다고 한다. 특히 전통도자기를 재현하고자 노력한 도공들의 장인정신이 무엇보다 중요한 요인이었다. 여주는 이천, 광주와 함께 세계도자비엔날레를 열어 우리 도자기를 세계에 알리고 있다.
전국 도자기 생산업체의 70% 정도가 여주, 이천, 광주에 집중되어 있다. 3개 지역 중 여주에 도자기 생산업체가 더 많다고 한다. 그러나 타 지역이 전통도자기를 계승하고 있는 반면 여주는 산업화되어 있는 생산업체들이 많다. 그래서 여주가 도자기에서 2등의 이미지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70년대 초까지 수려水麗선이란 협괘 철도가 있었다. 일제가 여주 이천의 좋은 농산물과 도자기를 수탈하려는 목적 하에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어서 4대강 사업의 실태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강천보를 비롯하여 여주가 전통 관광지로 자랑하는 신륵사, 영(英, 寧)릉, 명성황후 생가 등을 둘러 보았다. 이명박 정부가 한국형 녹색 뉴딜을 내세워 ‘4대강 살리기 사업’이라고 이름 붙인 4대강 사업은 2008년 12월 낙동강지구 착공식을 시작으로 하여, 2012년 4월까지 22조원의 예산을 투입해 추진한 대하천정비사업이다. 한반도 대운하 사업의 기초 공사라는 평가도 있었지만, 임기 내 치적을 위해 서두르다가 부실공사와 참여 업체들의 담합을 불러와 말도 많았던 사업이다. 현지 실체를 보고 주민의 목소리를 들어보니 이해가 되는 부분이 많았다.
이 사업은 4대강(한강, 낙동강, 금강, 영산강 )을 준설하고, 친환경 보洑를 설치해, 하천의 저수량을 대폭 늘려서 하천 생태계를 복원한다는 것이 주된 사업 명분이었다. 그 밖에 노후 제방 보강과 중소 규모의 댐 및 홍수 조절지의 건설, 하천 주변 자전거길 조성 등을 부수적 사업내용으로 하였다. 4대강 사업의 보는 총 16개가 있는데 낙동강에 8개, 금강, 한강에 각 3개, 영산강에 2개가 설치되어 있다. 그 중 한강에 있는 3개보(강천보, 여주보, 이포보)는 모두 여주에 있다. 강천보에 설치된 ‘한강문화관’은 한강을 기반으로 피어난 문화와 역사를 다양한 체험매체를 통해 보고 듣고 느낄 수 있도록 구성하였다. 희망나눔존, 새물결꿈존, 물길여행존, 사람사랑존, 감통소통존의 5개 테마존으로 구성되어 있다. 차세대 미디어 아티스트로 각광 받고 있는 독일의 ‘율리어스 포프’가 설계하였다.
보통 ‘절’ 하면 산과 계곡이 연상된다. 그러나 신륵사神勒寺는 봉미산鳳尾山을 뒤로 하고 있으나 그 산은 언덕에 불과하고, 남한강을 앞으로 하고 있어 우리나라에서는 강가에 있는 유일한 절이라 할 수 있다. 신라 진평왕 때 원효元曉가 창건하였다는 설이 있으며, 절 이름을 ‘신륵神勒’이라고 한데는 미륵彌勒, 또는 왕사 나옹懶翁이 신기한 굴레로 용마龍馬를 막았다는 전설에 의한 것이라 한다. 이 절이 대찰을 이루게 된 것은 나옹이 이곳에서 갖가지 이적을 보이며 입적하였기 때문이다. 나옹이 입적할 때 오색구름이 산마루를 덮고, 마른 하늘에서 비가 내렸으며, 수많은 사리가 나왔고, 용龍이 호상護喪(초상 치르는 모든 일을 주장하여 보살피는 것)을 했던 일들이 그것이다. 어린 시절을 용인에서 지낸 나는 동네 어르신들의 ‘여주벽절로 관광간다’ 라는 말을 들은 기억이 있다. 이는 신륵사의 명품 다층전탑 전체를 벽돌(塼)로 쌓아 올린 데서 유래한 것이다. 우리나라의 탑은 대부분 화강암을 재료로 하였으며 벽돌 탑은 중국탑, 일본은 목탑의 특징이 있단다.
왕릉은 도성으로부터 100리 안에 모신다는 원칙이 있지만 여주는 180리길이나 떨어져 있었다. 이곳의 명당을 놓치기 싫은 세조로서는 남한강 뱃길의 편리성이 있으니 육로의 2배까지는 괜찮다는 유권 해석을 하여 모시게 되었다고 한다. 세종대왕릉은 꽃부리 영(英)자, 효종대왕릉은 편안할 영(寧)자로 이름대로 해석하면 세종대왕릉은 꽃봉우리의 모양이요, 효종대왕릉은 편안한 자리이다
영릉英陵은 하나의 봉분 아래 조선 제4대 세종과 소헌왕후 심씨를 합장한 동봉이실의 합장릉이다. 1446년(세종 28) 세종의 비 소헌왕후가 죽자 당시 광주廣州(현재의 서울시 서초구 내곡동) 헌릉(태종과 원경왕후 민씨의 무덤)의 서쪽 산줄기에 쌍실을 갖춘 능이 조성되었다. 동쪽 방은 왕후의 무덤, 서쪽 방은 세종이 생시 미리 마련하여 1450년 세종이 승하하자 합장하였다. 세조 때 내곡동 터가 좋지 않다 하여 능을 옮기자는 주장이 나왔고, 예종1년 현 위치로 옮겼다. 옛 영릉英陵에 있던 상석·장명등·망주석·신도비들은 그 자리에 묻었으나 1973년 발굴하여 세종대왕기념관에 보존하였다. 영릉英陵에는 병풍석이 없고 난간석만 설치되었으며, 봉분 내부는 석실이 아니라 회격灰隔(관을 구덩이 속에 내려놓고 그 사이를 석회로 메워서 다짐) 형식으로 되어 있다. 혼유석 2좌를 마련하여 합장릉임을 표시하였으며, 난간석에 12지신상을 조각하는 대신 12지를 문자로 표현하여 방위를 표시하였다.
영릉寧陵은 조선 제17대 왕 효종과 부인 인선왕후仁宣王后 장씨의 능이다. 왕릉과 왕비릉을 좌우로 나란히 배치한 것이 아니라 아래위로 배치한 쌍릉 형식이다. 풍수지리에 의한 쌍릉 형식은 조선 왕릉 중 최초의 형태이다. 의릉懿陵(경종+선의왕후)도 이런 형태를 띠고 있다. 처음엔 동구릉東九陵의 태조 무덤인 건원릉健元陵 서쪽에 있었으나, 석물에 틈이 생겨 봉분 안으로 빗물이 샐 염려가 있다 하여 1673년(현종 14) 세종의 무덤인 영릉英陵 동쪽으로 능을 옮겼다.
여주驪州는 고려조 이래 9명의 왕비를 배출한 휼륭한 여인이 많은 지역이다. 그중 한 분이신 조선 제26대 고종의 비 명성황후 생가터는 6대조 할아버지를 모시던 묘막터였다. 여덟 살의 어린나이에 부모를 여의고 혈혈단신으로 자랐다. 소녀시절부터 집안일을 돌보며 틈틈이『춘추春秋』를 읽을 정도로 총명하였다. 흥선대원군의 부인 민씨의 천거로 왕비로 간택되어 고종 3년, 한 살 아래인 고종의 비로 입궁하였다. 민비가 왕비로 간택된 것은 외척의 득세를 싫어한 흥선대원군의 정치적 계산에 의해서였다.
그러나 수완이 능란한 황후는 입궁한지 몇 년이 지나자 왕실정치에 관여하기 시작해서 일생을 두고 시아버지와 정치적으로 대립하였다. 황후의 지원군 노론老論 세력과 새로 들어온 남인南人과 북인北人 중심 세력 간의 정치적 갈등이 있었다. 황후는 최익현의 대원군 규탄 상소를 계기로 대원군을 하야시켜 양주楊州 곧은골(直谷)에 은퇴시켰다.
1895년 8월, 일본 군대와 정치낭인政治浪人들이 일부 친일 정객과 짜고 왕궁을 습격해 황후를 시해한 뒤 정권을 탈취하는 을미사변의 만행을 저질렀다. 황후는 나이 45세로 살해되어 시체가 불살라지는 불행한 최후를 마쳤다. 세계사 어디에서도 국모가 다른 나라의 깡패들에게 시해 당하는 역사는 없었다. 우리는 일본인의 나쁜 근성을 잊어서는 안 되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일본의 만행은 반드시 단죄되어야 할 것이다.
명성황후는 시아버지 대원군과의 트러블, 다국적 외교로(러시아 중시정책) 문제의 여인이란 이미지가 있는데 이것은 일본사관에 의한 것이다. 실제로는 일본의 탐욕을 일찍부터 간파하고 조정을 확실히 장악한 정치력이 있었고, 외세의 균형을 잘 유지하려고 한 외교의 달인이자 여걸로 평가되고 있으며, 쓰러져가는 나라를 구하려 했던 신념이 매우 강한 여인이었다.
당일 여주 날씨는 천둥 번개를 동반한 소나기가 있었다. 소나기를 피해가면서 모두 탈 없이 만족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여행하게 되어서 다행이다. 옛것과 새것이 잘 어우러져 새롭게 도약하고 있는 여주는 큰 감동을 주었다.
조병오- 수필가. 산문집 『바쁜세상 숨고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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