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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포럼/이경림/시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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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2
댓글 0건 조회 1,776회 작성일 15-07-07 10:04

본문

아라포럼

이경림

시란  무엇인가

 

 

근원적으로 시는 비논리적인 것입니다. 비논리에 의해 발생된 것이고 비논리를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논리는 시를 담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논리는 시를 담기에는 너무나 협소하기 때문입니다. 시가 이 협소한 인간논리의 넓은 하늘이라면 논리는 아주 언제나 한계를 포함하고 있는 인간의 작은 생각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시인은 기본적으로 논리를 잊어버려야합니다. 떨쳐버려야 합니다. 주관을 넘어가야 비로소 인간은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이해하게 됩니다. 그것이 시에 들린 자들이 감내하지 않으면 안 될 마음의 근본변화입니다. 논리로는 그 불가해한 근본 변화를 초래할 수 없습니다. 본연의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볼 수 있는 눈만이 시를 쓰게 합니다. 또한 시는 혹은 예술은 비철학적이며 반철학적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불교의 은 종교 행위로서의 기도는 일종의 시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도 기도도 과학적인 눈으로 보면 비논리적이고 터무니없습니다. 그것을 이성적으로 이해하려고 하면 당혹스러울 것입니다. 왜냐하면 시와 기도 모두 바탕은 깊은 공명과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경험편중적이고 과학적이고 형이상학적인 관념만 가지고는 좋은 시에 다가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시는 그것들 일체를 내려놓아야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시는 가슴적인 현상입니다. 생각하기 보다는 느껴야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그것이 되어야하는 것입니다. 되는 것이 가장 잘 아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밖에 다른 수단은 없습니다. 그런 까닭으로 시는 은유로 말합니다. 시는 우회적입니다. 다만 암시할 뿐 가르치지 않습니다. 속삭일 뿐 소리치지 않습니다. 그것은 깊은 일치감에서 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시는 여성적이고 산문은 남성적입니다. 산문은 논리적이고 시는 본래부터 비논리적입니다. 산문은 분명해야 하고 시는 불분명해야 합니다. 그것이 시의 아름다움이고 특질입니다. 산문은 말하려는 것을 단순하게 말하는 것이고 시는 복합적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산문은 일상적인 세계나 저잣거리에서 필요합니다. 하지만 뭔가 가슴적인 것을 말할 때는 산문으로는 불충분합니다. 그 때는 시로 물러나야 합니다. 이 말은 형식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정신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랑에 빠졌을 때 시가 필요한 것처럼.

인간의 마음은 항상 거지입니다. 끊임없이 뭔가를 더 얻어 보려고 기웃거리는 거지입니다. 마음은 하찮은 것을 통해서 삽니다. 그러나 가슴은 삶의 심연을 향해 존재의 깊이를 향해 우주의 신비를 향해 열려 있습니다.

 

언어에는 두 부류가 있습니다. 말하는 방법에도 두 부류가 있고 어법에도 두 차원이 있습니다. 언어에는 명백한 사실과 관념과 공식, 순수 논리가 필요합니다. 그것은 객관적인 정보와 정확한 과학적 정황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가슴의 언어가 아닙니다. 사랑의 언어가 아닙니다. 시의 언어가 아닙니다. 시와 과학은 정 반대입니다. 그것은 다른 차원의 존재에 속합니다. 그것은 서로의 땅, 서로의 영역에 존재하지 못합니다. 그것은 서로 교차되지 못합니다. 현대인의 마음은 과학으로 길들여져 있습니다. 그러나 인성은 오직 시를 통해서만, 은유적인 것을 통해서만 키워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성이 대부분의 삶을 이끌어가는 인간의 삶도 가슴을 통해서만 의미를 지닐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마음하나로만 살 수 없습니다. 수학도 과학도 천문학도 물리학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수학은 봉사는 할 수 있지만 주인은 될 수 없다. 머리는 하인이 될 수 있을 뿐입니다. 하인으로서 그것은 아주 유용합니다. 하지만 머리가 주인인 척 할 때는 아주 치명적인 위험이 따릅니다. 예를 들어 아주 머리가 명석한 천재가 있다고 칩시다. 계산기 보다 더 빠르게 셈할 수 있어 논리적 판단력 또한 뛰어난 사람이라고 칩시다. 그가 지구 전체를 파괴할 수 있는 무기를 만들어 냅니다 그가 어느날 심심해서 그야말로 그냥 심심해서 그 무기의 버튼 하나만 눌러버리면 우리가 가장 사랑하는 별인 이 지구는 사라지게 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인성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았을 때의 인간의 머리란 천재성이란 무서운 결과를 가져 올 시한 폭탄이 될 뿐입니다. 지킬박사와 하이드라는 영화에서 우리는 그런 가상의 현실을 보았습니다.

이렇게 가슴이 따뜻하지 않은, 인성이 결여된 아이를 만드는 일은 얼마나 위험하고 비참한 결과를 가져 오는지 위의 예가 아니더라도 각종 메스미디어를 통해 우리는 매일 실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객관적인 과학의 언어는 사실의 세계에 그대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물은 사실 그대로 가능한 한 정확하고 명료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어떻게 사실만을 말할 수 있겠습니까? 사실만 가지고 살 때 삶은 무의미해 집니다. 과학의 시대의 우리는 하나의 언어 즉 산문의 언어로만 살기로 정함으로써 무의미해 진 것입니다. 그래서 가슴에서 흘러나오는 것을 말하거나 진정 우리 안에 이름 붙일 수 없는 것을 말하려 할 때는 사실의 언어만으로 부족함을 느낍니다. 만일 인간이 보통의 언어를 쓰면서 부족함을 느끼지 못했다면 분명 정신이 빈곤한 사람입니다. 보통의 언어를 쓰면서도 결핍감을 느끼지 못 할 만큼 불행한 사람이 있다면 그는 한 번도 사랑을 느껴보지 못했다는 것을, 한 번도 명상의 순간을 느끼지 못했다는 것을, 엑스터시를 모르고 있다는 것을 보여줄 뿐입니다. 그런 사람의 심장은 더 이상 고동치지 않습니다. 좀 더 비약하면 그는 송장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는 살고 있지만 진정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움직이고 걸어다니지만 그의 모든 몸짓은 공허합니다. 그 행위 속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우스운 예 하나 들겠습니다

한국 남성들의 이야기입니다. 부부가 모처럼 여행을 갑니다. 몇 십 년을 같이 살면서도 이런 기회는 몇 번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부부들이 기분 좋게 떠났다가 싸우고 돌아왔다고 합니다. 다시는 같이 여행가지 않겠노라고 씩씩거리는 부인들을 종종 봅니다. 싸움의 이유는 대부분 남성과 여성의 감성의 차이에서 생기는 것입니다. 몇 시간을 운전해서 푸른 바다가 그림같이 펼쳐진 곳에 도착을 합니다. 순간 대부분의 여성은 그 아름다운 자연과 바람 거기 서 있는 자신이 혼연 일체가 되어 이 아름다운 풍경 속에 있는 자신이 너무도 신비롭고 행복하여 시간을 잊어버립니다. 실제로 이때의 시간은 그녀에게 스톱모션입니다. 불교적 용어로 時中입니다. 시간의 한 가운데입니다. 활짝 핀 꽃의 시간입니다. 그 때 남편이 다 봤으면 가자고 조릅니다. 뭘 볼게 있다고 우물쭈물 하느냐는 겁니다, 화장실 가고 바다 보고 했으니 볼 일 끝난 거 아니냐고. 이 때 남편의 시간은 그저 지나가는 시간입니다. 논리의 시간이요 과학의 시간입니다. 그러니 아까운 시간을 더 낭비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빨리 가서 뭘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문제는 그의 가슴에 시가 없는 것 입니다. 둘러보면 의 시간은 도처에 있습니다. 일분 일분이 時中입니다. 꽃의 시간입니다. 時中입니다. 그러나 한번 핀 꽃은 다시 오지 않습니다. 그 다음에 피는 꽃은 다른 꽃입니다. 우리의 한 걸음 한걸음도 돌이킬 수 없는 시간입니다. 꽃의 시간이요 시의 시간입니다. 이렇게 시는 도처에 있고 자기 안에도 있습니다. 아니 바로 자신이 시입니다. 시를 못 쓴다는 사람은 이런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겠지요. 그러면 아는 사람은 어떨까요? 시의 속도로 사는 사람이겠지요. 시의 속도는 자연(nature)의 속도입니다. 시는 인간과 신 사이에 놓인, 인간과 우주의 근원으로서의 신 사이에 놓여진 무지개 빛 다리입니다. 그것은 현실과 저 너머로, 사이에 놓인 문입니다. 문은 언제나 열려 있습니다. 자신이 들어가기만 하면 됩니다. 조건은 잡다한 것들은 몽땅 내려놓고 꽃처럼 나무처럼 nature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고대 경전에는 각 사원의 입구에는 반드시 연인의 조각상을 세워야한다고 써 있다고 합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설명이 없답니다. 각 사원의 입구 문 앞에는 오르가즘 상태에 있는, 서로의 팔다리가 엉켜있는 한 쌍의 연인을 세워 두게 했답니다. 최소한 그것을 모르고는 신과 인간 사이의 그 무지갯빛 다리를 알 수 없기 때문일 지도 모릅니다. 그다리는 마음의 세계와 무심의 세계 사이에 놓인 문지방 입니다. 그것을 지나며 우리는 삶의 결정적 신비를 알게 됩니다. 어저면 시를 쓰는

마음은 대상과 시인의 섹스이며 시는 오르가즘 같은 것인지도 모릅니다.

 

달밤

 

수천 그루 나무들이

산 하나를 떠메고 가는 장관을 보았습니다

그들의 정처(定處)를 알 길 없는 나는

그 소란이 그저 고요거니 하였습니다

 

그때, 우리는 언제 한 번 핀 적도 없는

벚꽃 길에서 길을 잃거나,

산수유들의 노란 허구렁에 눈을 주거나

그 밑에 잠시 똬리 틀고 잠든

초록비단뱀 같은 마음 하나에 끄달리느라

 

방금 전 그 산이 수만리 저 쪽으로

막 달아나는 것도 몰랐습니다

그 자리, 처음 보는 나무들이

처음 보는 산 하나를 떠메고 와서는

어딘가로 내달리는 것도 몰랐습니다.

 

아아, 그 미친 속도를 무어라 쓸 길이 없어

나는 속절없이 또

고요라 쓰고 말았습니다

- 이경림

 

위의 시는 달밤에 앞산을 보고 쓴 시입니다. 어느 날 시골 집 마루에서 맞은 편 산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자니 맞은 편 산이 어딘가로 떠밀려 가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생각해 보니 어딘가로 가고 있는 건 맞는 것 같았습니다 왜냐하면 지구는 끊임없이 돌고 시간은 쉬지 않고 흐르기 때문에 한 순간도 같은 상황은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 우리가 늘 거기 있다고 생각하는 산은 고정관념 속의 산입니다. 산은 늘 같은 모양으로 있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흙더미가 흘러내리고 다른 곳에 쌓이고 그 속의 나무들은 끊임없이 자라고 죽고 잎을 떨구고 거기 사는 벌레도 짐승들도 그 속에서 생노병사의 과정을 거치며 변화하고 있습니다. 소란입니다. 그들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지 우리는 알 길이 없습니다. 그저 그 모든 것을 포함한 저것이 산이거니 고요거니 하면서 제 속의 초록비단뱀 같은 마음 하나에 끄달려 다니는 것이 우리의 생입니다. 이 때의 산은 논리 속의 산은 아닙니다. 산과 내가 하나가 되어 거기 엎드리게 될 때 가슴이 하는 말입니다. 오르가즘입니다.

시에는 형식이 없습니다. 어떤 가르침도 없습니다. 그저 어떤 현상이

그 차체로 말로 읽힐 때 시가 되는 것 같기도 합니다. 좋은 시는 사람들이 완전히 벌거벗도록 알몸으로 돌아가도록 하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식은 마음이 걸치고 있는 아름다운 드레스입니다 그것이 사라지고 나면 마음은 남루 합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런 상태는 혐오스럽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시는 그런 마음을 버려야 합니다. 그것을 버릴 때 필연적으로 찾아오는 것이 시적 영감입니다.

요즈음은 대학마다 문예창작과라는 새로운 과가 생기고 시를 쓰는 법 소설을 쓰는 법을 가르칩니다. 저도 몇 년 째 시를 가르치고 있습니다만 변함없는 저의 생각은 시가 가르쳐서 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늘 학생들에게 이야기 합니다. 시 쓰는 방법을 배우려 하지 말라고. 기술을 배우려 하지 말라고. 왜냐하면 시는 방법도 기술도 필요 없는 분야이기 때문입니다. 그 대신 좋은 책을, 혹은 좋은 그림을 같이 보고 느낀 점을 말하고 거기서 본 인상적인 장면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하게 하는 수업을 합니다.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시의 문제점은 머릿속에 형성된 관념(생각)으로 시를 쓰려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써진 시는 출발부터 잘못되어 자신만이 아는 이상한 추상화가 되기 십상입니다. 아무리 기발한 생각이라 하더라도 자신의 머릿속을 다른 사람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시의 출발은 보는 일에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그것도 구체적으로. 왜냐하면 삼라만상은 모두 현상으로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서정춘 시인이 쓴 여행이라는 시를 한 편 보실까요?

 

죽편 竹篇 1 - 여행

- 서정춘

 

여기서부터, - 멀다

칸칸마다 밤이 깊은

푸른 기차를 타고

대꽃이 피는 마을까지

백년이 걸린다

 

불과 오행 밖에 안되는 이 短詩를 찬찬히 들여다 보면 대나무 한 줄기에 인생이 그대로 들어 있습니다. 시인은 대나무의 뿌리에서 꽃이 피는 우듬지까지의 대나무의 일생을 쓴 것 뿐인데 왜 독자는 거기서 인생을 읽을까요? 첫 행의 여기서부터의 여기는 뿌리인데 거기로부터 칸칸마다 밤이 깊은 푸른 기차를 타고 저 우듬지의 대꽃이 피는 마을 까지의 이미지 속에 인생이 그대로 겹쳐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모든 존재는 꼭 같은 생로병사의 길 위에 있고 그런 의미에서 대나무와 람도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현상이 하는 말입니다.

이렇게 시는 발견에서 시작됩니다. 대나무를 오백그루 봐도 이런 발견이 없으면 이런 시를 쓰지 못하겠지요. 이런 발견을 할 수 있는 마음자리가 위에서 말한 다 내려놓음의 자리입니다. 그것은 벌거벗고 대나무와 한 몸이 된 오르가즘의 상태에서 오는 것입니다.

이렇게 시와 삶은 다르지 않습니다. 아무리 지식이, 논리가, 지배하는 세상이지만 그것에 문제가 생겼을 때 해결하는 것은 지극한 마음입니다. 그 마음자리거 시 입니다. 세월호가 우리의 가슴에 깊은 손톱자국을 내며 지나갔습니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선장이 나쁜 사람이다. 사주가 더 나븐 사람이다. 그들은 인간도 아니다. 돈벌레다. 사기꾼이다. 책임회피에 급급한 대통령이 더 나쁘다. 관피아니 무슨 무슨 피아니 신조어가 생기고 촛불시위가 벌어지고..... 그러나 한 번 가슴에 손을 얹고 곰곰 생각해 봅시다. 나는 선장과 무엇이 다른가? 나는 그 조타수와 무엇이 다른가? 그 선박회사 사장과 무엇이 다른가?

아마도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우리 모두 그 모습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입니다. 돈을 벌기 위해서는 도둑질 빼곤 무슨 짓이든 합니다.

길가다 쓰러진 사람이 있어도 대부분은 힐끔거리며 누가 볼 세라 황급히 자리를 피하고는 휴- 하고 가슴을 쓸어내립니다. 특히 사업 좀 하는 사람치고 권력과 손을 잡지 않고는 안 되는 것이 이 나라의 전통이 되었다 합니다. 그걸 잘 하는 사람은 수완이 있다 똑똑하다 존경을 받고 대부분 정계로 진출도 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무얼 잘못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정당하게 관례대로 했을 뿐이니까요. 이 모두 시적 마인드의 결핍에서 생기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온 국민이 꼭 시를 쓰라는 것은 아닙니다. 이제 부터라도 잃어버린 순수, 본질에 가까이 가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가진 것에 만족하는 마음, 더 나아가서 이 신비로운 별에 잠깐 스쳐가는 한 존재로서의 고마움을 되찾자는 것입니다. 그것이 가장 훌륭한 시 일 것입니다. 개인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이 변화할 때 사회는 밝고 아름답고 신비로운 자연 본연의 모습을 되찾을 것입니다. 끝으로 아름다운 시 한편을 더 보겠습니다

 

추천사

서정주

 

향단(香丹), 그넷줄을 밀어라.

머언 바다로

배를 내어 밀듯이,

향단아.

 

이 다소곳이 흔들리는 수양버들나무와

벼갯모에 놓이듯한 풀꽃데미로부터,

자잘한 나비새끼 꾀꼬리들로부터

아주 내어 밀듯이, 향단아.

 

산호(珊瑚)도 섬도 없는 저 하늘로

나를 밀어 올려 다오.

채색(彩色)한 구름같이 나를 밀어 올려 다오.

이 울렁이는 가슴을 밀어 올려 다오!

 

(西)으로 가는 달 같이는

나는 아무래도 갈 수가 없다.

 

바람이 파도를 밀어 올리듯이

그렇게 나를 밀어 올려 다오.

 

향단아.

 

우리 모두 西으로 가는 달 같이 그렇게 아름답게, 그렇게 환하게 그렇게 순하게는 아무래도 갈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과 신 사이에 놓인 무지갯빛 다리인 시의 자리에 서 있는 한, 바람이 파도를 밀어 올리듯 서로의 힘이 되어주는 사랑의 관계가 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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