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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작조명/이외현/달, 실연하다 외 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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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2
댓글 0건 조회 2,128회 작성일 15-07-07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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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작조명

이외현

, 실연하다 외 6

 

 

오밤중, 탱자 울타리 넘어 꽃 따러 갔지.

, 따기도 전에 가시에 찔려 아팠지.

해가 없는 밤이면 꽃은 잠을 자지.

달은 오므린 꽃잎에게 속삭였지.

열어 봐

제발, 좀 열어 봐.

꽃은 못 들은 체 고요하기만 하지.

서성이던 달은 눈이 퉁퉁 붓도록 울지.

꽃이 뿌옇게 보일 때까지 혼자 울지.

별들이 슬픈 달을 감싸며 위로하지.

해를 향해 꽃잎 열어 활짝 웃는 꽃 바라보며

낮달은 구름 속에서 또 숨죽여 울지.

칠흑의 밤, 달은 흐린 빛을 내려놓고

산꼭대기에서 꺽, , 목 놓아 울지.

천년 동안, 폭포 같이 울었지.

 

 

 

 

정동진에 가면 있다, 없다

 

 

빌딩숲이 자정에 도시를 떠나는 기차를 따라 정동진에 간다.

어둠을 벗어나 철커덕철커덕 철길을 밟으며 해를 보러간다.

도시의 달은 알코올에 취해 눈빛이 흔들리고 초점이 흐리다.

스멀스멀 밤안개가 홑이불 덮어주며 기침하는 달을 가린다.

 

새벽의 정동진역, 메뉴판의 안주 같은 사람들이 몰려나온다.

그 사이에 달은 벌써 서울행 기차에 올랐다.

달 대신 촉촉한 이슬에 바다는 소주가 된다.

메뉴판의 글자들이 첨벙첨벙 바다에 뛰어든다.

 

새벽기차는 철길이 없는 바다로 길을 낸다.

안주가 이슬을 마신다. 이슬이 안주를 먹는다.

기차와 이슬과 안주가 서로를 먹고 마신다.

파도가 갈지자로 출렁이며 모래 위를 뒹군다.

 

부침개가 먹고 싶은 날, 기차를 타고 정동진에 가면,

바다가 보이는 갈매기횟집 통유리창 너머로,

프라이팬에 쟁반같이 둥근 해를 부쳐내는

아주머니가 있다. 없다.

 

 

 

 

어디가신다요

 

 

비 저리 내리는데 이른 새벽부터 어디 가신다요.

파도가 뒤집은 놀음판 화투장같은 비 들이치는데,

조반도 안자시고 어딜 급히 가신다요.

술 마시면 개 되는 아랫방 주씨 밤새 고래 고래잡고,

지 마누라 패는 매 타작 소리, 정적을 찢는 신 새벽,

빗금으로 치는 회초리, 꽃잎 덩달아 하릴없이 지고,

퉁퉁 불은 개울물, 두리둥실 꽃배타고 떠내려가는데,

근데, 아부지는 어딜 그리 말도 없이 간다요.

아부지 가신 길에 밥알 같은 꽃잎들 떨어져,

지게지고 다시 오실 길을 환히 밝혀주는데.

 

집 나가신 울 아부지,

장맛비에 꽃잎 씻겨나가 길을 잃었나.

같이 갔던 꽃비만 되돌아와

팔랑팔랑 저리도 환하게 내리누나.

 

 

 

 

누가 왔다

 

 

세렝게티 아침 햇살아래 소의 뿔, 염소의 수염,

말의 꼬리를 가진 동물이 풀을 뜯고 있다. 누다.

누 안 에는 누가 살까.

 

건기가 되면 누 떼는 지축을 흔들고

먼지바람 일으키며 세렝케티 초원을

떠나서 마사이마라를 향해간다.

수백만 마리의 누 떼가 마라강을 건너 갈 때,

세렝게티 먹이사슬 강자들도 덩달아 바빠진다.

 

억센 이빨을 가진 악어

돌기 갑옷으로 무장하고,

잡풀에 숨어서 눈을 감았다 떴다 하며

대열에서 이탈한 누를 응시한다.

낌새를 차린 누, 꼬리 철썩이며 무리로 뛰어간다.

, 뛰는 말이다.

 

마라강의 거센 물살이 발목을 잡아챈다.

미끄러져 일어나려고 애쓸수록 물살이,

발목을 휘감아 수 십 마리의 누를 자빠뜨린다.

대머리 독수리들, 숨이 끊어진 누 몸통에 내려앉는다.

물살을 이불삼아 흰 수염 출렁이며 누 길게 누워있다.

, 늙은 염소다.

 

어렵사리 강을 건넌 누 앞에 막아선 바위 절벽,

가파른 절벽을 후들거리며 한발 한발 내딛는다.

사자는 인내심을 갖고 올라오는 누를 기다린다.

겁에 질린 누, 이판사판 뿔로 사자를 공격한다.

, 성난 소다.

 

먼 길, 소의 뿔, 염소의 수염, 말의 꼬리 다 내어주고,

꿈결에도 어른대는 너를 찾아 목숨 걸고 누가 왔다.

 

 

 

 

마트, 그녀

 

 

마트 주변에서 그녀와 가끔 마주친다.

떡이 진 머리에 피부가 온통 구릿빛인 그녀,

제 발보다 한참 큰 슬리퍼를 질질 끌고 다닌다.

배시시한 입술에는 늘 담배꽁초가 물려있다.

냄새가 눈과 코를 마비시켜 시야가 아리다.

헐렁한 조끼 안으로 가슴보다 더 나온 똥배,

오랜만에 봤더니 어디다 부렸는지 홀쭉하다.

마트 화장실에서 딸을 낳았다는 소문이 돈다.

여름이 우스워 우스꽝스럽게 웃는 그녀,

 

주르르 빠진 앞니 사이로 담배를 빠는 볼따구니가, 장죽 뻐끔거리다가 양은재떨이에 탕탕 태질하며, , 그까짓 것들 멋에 쓴다냐. 손주 머리 쓰다듬으며 우물거리던 영락없는 쭈그렁바가지 우리 할매다.

 

 

 

 

티티카카, 태양의 섬에 누워

 

 

티티카카 호수*, 어딘가에 바람의 유배지가 있다

호수에 배를 띄우고 갈대의 흔들림을 따라간다.

 

은행나무의 말매미, 감전된 듯 부르르 떨며 자지러진다.

욕조를 나와 뱅뱅 돌며 바람의 뒤를 캐다가,

작은방과 주방 사이의 문턱에 길게 눕는다.

몰딩을 경계로 다리를 오므렸다 폈다 하며,

방에서 거실로, 거실에서 방으로 발이 들락날락한다.

방에 있는 다리를 티티카카 호수로 길게 뻗었을 때,

설산을 흐르는 차가운 바람 입술이 살갗을 스친다.

발가락을 간질이며 가랑이 사이로 파고든다.

박하향내 나는 유두를 가볍게 깨물고,

콧등을 토도독 더듬다가 눈두덩을 핥고는,

머리카락에 두어 번 입 맞추더니 이내 사라진다.

아쉬움에 눈을 감고 바람의 혀끝을 되짚어간다.

혀가 터치하는 감각들이 정전기처럼 일어나며,

부풀어 오르다가 푹 꺼지며 이내 말랑해진다.

 

플라타너스 잔등에 목 쉰 매미 울음소리 여전하다.

태양의 섬에 누워 입술허물을 잘근잘근 씹다가,

소문 늦은 귀를 데우는 바람난 유령의 후끈한 속말에

걸친 허물 훌렁 벗고 티티카카 호수의 인공 섬이 된다.

 

* 티티카카 호수: 페루와 볼리비아의 국경에 있으며, 해발 3812m로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호수이다. 호수에는 많은 섬들이 있으며 태양의 섬은 태양과 달이 태어난 섬으로 잉카인에게는 신성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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