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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우리 시대의 시인, 랑승만/내 삶의 역정 劇的인 삶의 파노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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如泉 浪丞萬 詩人 8旬 紀念 特輯
劇的인 삶의 파노라마
내 삶의 역정
내 생명에 환한 연꽃 향기를 품고, 삶이 시작 된 것은 75년 전, 1940년대 일제 말기 때 이야기라네. 경성부 큰洞 신당동 밑에 작은洞 西泉洞 162번지 막다른 골목에서 시작되었네. 그 西泉洞 골목 안에 작은 초가집에는 한양에서 이름나신 교육자이시며 화가이신, 키가 크신 아버지가 검은 임바넨스 망토를 입으시고 지팡이를 휘졌고 다니셨지. 영국 귀 신사 같으신 어르신 외출하시면 골목 안 사람들 뛰쳐나와 야단이었네. 그런데 그 대부인마님, 어머니 간난이는, 아버지와는 반대로 어찌나 몸집이 작으신 지 예쁜 골무만 하셨다네.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갈 나이가 되어 신당동 광희초등학교를 다니게 되었는데, 당시 아버지 랑심호 선생이 광희초등학교 번영회 회장이셔서 월사금도 내지 않고 학교를 다닐 수 있었다네. 아버지께서 신당동 언덕에 ‘신당학원’을 세우시어 조선의 어린이들에게 조선말을 가르쳐주시고 조선의 역사를 교육시키셨는데, 얼마 후 일본헌병놈들이 ‘신당학원’의 운영실태를 알고는 ‘신당학원’을 폐쇄시켰다네. ‘신당학원’이 문을 닫게 되자 아버지는 끔찍한 홧병이 생기신지 몇 달 후 어느 날 밤 ‘아이고 여보, 머리야’ 하시고는 그만 숨을 거두셨다네. 어머니 간난이는 이 때부터 찌든 가난이 시작되어 어린 자식들 키우시느라 골무만한 작은 몸이 더 쭈그러드셨다네.
1945년 마침내 일제가 태평양 전쟁에서 패망하고 조선이 해방이 되었지. 해방이 되던 그 날, 학교마다 깊숙이 세워져 있던 호안덴(봉안전)이란 게 있었는데, 그 호안덴(봉안전)에는 일본천황의 칙서를 간직해 두었지. 일본인들의 명절에는 그 천황의 칙서를 꺼내어 학교 교장이 교정에 모인 학생들 앞에서 낭독했는데, 뙤약볕 아래에서 칙서를 장시간 읽어나가면 어린 조선의 학생들이 픽픽 쓰러져갔다네.
그래서 해방 되던 날, 어린 내 마음에 품고 있던 일본에 대한 적개심은 학교 숙직실에서 도끼를 들고 나와 호안덴의 문을 때려부셨지. 문을 때려부수고 나서 그 호오안덴 문의 열쇠구멍을 막아놓던 쇠붙이가 있었는데 일본 황실의 상징인 ‘기꾸문쇼(국화 문장)’라네. 그것을 주워갖고와 사방치기 놀이를 했는데, 얼마나 오랫동안 갖고 놀았는지 그만 잃어버리고 말았지.
광희초등학교를 다닐 때 나는 공부시간에도 ‘이와나미문고’판 작은 문고판 시집을 갖고 가서 공부시간에도 읽곤 했지. 당시 담임선생 일본군 출신 ‘스기하라’ 선생이 시집을 읽던 내 앞에 와 ‘로오쇼망데데고이’(랑승만 이리 나와라) 하고는, 대륙침략의 구두로 만들어 신고 있던 쓰레빠로 내 머리를 갈겨댔지. 해방이 되자 담임선생이 바뀌었는데, 그 당시 담임선생이었던 ‘기노시다’ 선생은 일본으로 떠나면서, 내 동무들에게 안부를 물으면서 ‘랑승만 공부 잘 하라’ 일러주었더라네. 그 때 나는 학교엘 안가고 집에 있었지. 해방이 되자 다시 ‘조선어독본’으로 우리말을 배우기 시작했지. “책, 보자기, 면사무소가 있소” 하고 조선말을 배웠다네.
세월은 흘러 중학교엘 들어가게 되었네. 나는 광희초등학교 옆에 있던 일본학생놈들의 학교 일본상업전수학교가 6년제 성동공업중학교가 되자 들어가게 되었지. 6년제 성동공업중학교엘 다니던 어느 날, 그러니까 1950년 6․25가 발발하여 민족상잔의 전쟁이 터지고 말았네. 인민군 폭격기의 폭격을 받기 쉽다고 차량이란 차량은 모두 끊어져 버려 전차고 기차고 모두 올스톱을 하였네. 나는 가방을 등에 거꾸로 짊어지고 서울에서 인천집까지 걸어와야 했었네.
우리집이 인천에 와서 살게 된 것은 나의 친형 랑승태 선생이 인천상업학교(현재 인천고등학교) 음악선생으로 근무하게 되어 인천으로 내려와 살게 된 것이지. 왜정때 경성음악전문학교를 나온 덕분에 인천상업중학교 음악교사가 된 것인데, 당시 인천상업중학교엔 교가가 없었지. 당시 인천시장이었던 표량문 시장이 작사를 하고 친형인 랑승태 선생이 작곡을 하여 인천상업중학교 교가를 만들었는데, 현재 인천고등학교 교가가 바로 친형이 작곡한 인천상업중학교 교가이라네.
그런데, 당시 인천상업중학교 제자였던 홍아무개란 학생이 졸업을 하여 경기도 화성군 서신면 고향에 살고 있었는데, 서신면에는 중학교가 없어서 중학교를 세우고자 해서 그 홍아무개란 형님의 제자가 형님 랑승태선생을 서신면으로 모셔다가 중학교를 세우게 되었지. 친형은 그 서신중학교의 초대교장이 되었다네. 그래서 6․25가 발발하자 우리 가족은 그 서신면 어느 학부모집 방 한 칸을 빌려 피난생활을 하게 되었다네 그려.
그런데 사회유명인사는 인민군이 납치해 간다는 소문이 돌았지. 서신중학교 교장인 랑승태 선생은 당시 친교가 있던 서신면 정 아무개 면장과 피신해야 했지. 서신면 바닷가에서 배를 빌려 타고 서신면에서 바라다보이는 충청북도 서산으로 피신을 했다네. 나는 중학교 교장의 동생이므로 인민군에게 잡히면 역시 납치를 당할지 몰라서 매일 같이 논둑으로 나가 잠자리를 잡고 다녔다네. 마침내 맥아더 장군이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가 역전되어 수복이 되었지. 형님과 면장이 서신면으로 돌아오게 되고 우리 가족들도 서신면에서 배를 타고 인천으로 돌아왔다네.
서신중학교 교장직을 내놓고 인천으로 돌아온 우리 가족은 옛집으로 다시 들어가 살게 되었으나 먹고 살기 위해서는 어쩌랴. 중학교 교장직까지 지냈던 형님과 나는 부두 노무자가 될 수밖에 없었네. 부두 노무자 생활을 할 때의 웃지못할 에피소오드 하나 소개해 보네.
당시 ‘챠리피어’라는 이천축항(타이틀베이싱)에서 조금 떨어진 부둣가에서 부두노무자가 되어, LST로 미군 군수물자가 들어오게 되면 이 군수물자를 야적하는 것인데, 어느날 밤은 군용연료드럼통을 야적하게 되었지. 형님과 내가 밤일을 하면서 밤참으로 먹을 도시락 두 개를, 허리에 차고 일을 하다가 무겁기도 하고 일하기에도 불편하여 도시락 두 개를 LST(아구리배) 한 구석에 놓아두었지. 일이 다 끝나 타이틀베이싱 축항으로 돌아가, 그 축항에 입항해 있는 4천톤급 미군수물자화물선 따뜻한 기관실에서 밤참을 먹는 것이 순서인데, 이것은 화물선 기관실이 따뜻하기 때문에 우리 노무자들은 기관실로 모두 들어가 몸을 녹이며 밤참을 먹고는 했던 것이지. 형님께서 ‘야! 밤참 어쨌니…….’ 하시는 게 아닌가. ‘어이쿠 형님 깜빡 잊고 그 아구리배에 놓고 왔어요.’ 드럼통을 싣고 온 미군 LST는 이미 드럼통을 다 내려놓고 당시 미군군수물자기지였던 일본으로 되돌아갔다네. 도시락과 함께 돌아갔으니, 이렇게 해서 나는 도시락 2개를 일본으로 수출을 했구나. 웃지 못할 에피소오드라네. 그리하여 우리는 밤참을 굶고 말았구나.
이렇게 부두 노무자 생활을 하고 있던 중, 1951년을 맞이했지. 1951년 1월 4일 마침내 남한의 장성들을 파산시키기 위한 1․4후퇴가 감행된 것이네. 그리하여 형님이 제2국민병에 소집되었는데, 나도 형님을 따라가 형님을 지켜드려야 한다고 자진하여 제2국민병에 입대하였지. 이로부터 부산 김해까지 장장 수 천리를 걸어내려가는 ‘죽음의 행군’이 시작된 것이네. 그러나 소속부대가 달라 형님과는 떨어져 지냈네. 하루 1백리씩을 걸었네. 어느 고을 어느 마을에 이르면 집집마다 삼삼오오 배치가 되어 그 낯선 집에서 밥을 얻어먹고 잠을 자곤 했네. 그렇게 하룻밤을 쉬고 나면 다시 행군이 시작되곤 했지. 하루 1백리씩을 걸으니 발바닥에 물집이 잡히고 말았네. 나는 배치된 집으로 들어가 주인 아주머니에게 바늘과 실을 달래서 물집이 잡힌 부위에 바늘로 실을 꿰어 물이 빠져나오게 했네. 그렇게 ‘죽음의 행군’으로 걸음을 걷는 것이었네. 그런데 이번에는 그 실을 집어넣는 물집 잡힌 부위가 곪아터지고 만 것이었네. 이제는 또 어느 집으로 배치가 되어 들어가면 딱성냥을 달랬지. 성냥의 황을 긁어 곪아 있던 물집 잡힌 부위에 황을 얹어 놓고 성냥불을 당겨 물집 잡힌 데를 태우는 것이었네. 이런 끔찍한 ‘죽음의 행군’으로 걸어서 부산 영도다리에 이르렀지. 부산 영도다리에서는 길바닥에서 주먹밥을 나누어주면 그걸 한 개씩 얻어먹고 부산진역 구내에서 거적을 깔고 잠을 청하곤 했지. 그러다가 김해 쪽으로 다시 올라간 우리 학도병들은 ‘김해12교육대’로 배속되어 근무중대가 되어 보초병이 되어야 했네. 그러니 굶어 죽는 사람, 병들어 죽는 사람들이 속출하기에 이르렀지. 이렇듯 극악한 제2국민병 운영으로 당시 제2국민병 사령관이었던 ‘김윤근’ 소장이 대구에서 처형까지 당했구나.
나는 김해 12교육대 근무중대에 있다가 병이 들어서 귀향조치 되었다네. 어쩌랴. 홀홀 단신으로 김해에서 인천까지 걸어올라와야 했으니, 제2의 ‘죽음의 행군’이 시작된 것이네. 저녁이 되면 어느 시골집으로 들어가 밥을 얻어먹고,, 헛간에서 잠을 자고, 아침이 되면 또 ‘죽음의 행군’ 발길을 옮기는 것이었네. 이렇게 걸어서 한 달 만에 집으로 돌아왔지. 집으로 돌아오니 우리집에서 셋방을 살던 아주머니가 깜짝 놀라 나를 맞이하여 방을 치어주고 밥을 해주어서 한 달 가량인가 지냈지. 어머니와 누이가 피난처에서 돌아오고 얼마 후에 형님이 병이 들어 거지꼴이 되어 집으로 돌아왔네.
그러다가 형님 제자의 소개로 나는 인천부두 ‘21항만사령부’ 소속 삼한공사의‘체커(검수원)’ 생활을 하게 되었네. 이 때만 해도 피난길에서 돌아온 사람들이 일자리를 얻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지. 나는 다행히 ‘체커’ 생활을 하게 되어 군수요원으로 돈을 벌 수 있었네. ‘체커’ 생활 1년만에 근무성적이 좋다 하여 ‘수석 검수원(헤드체커)’가 되었지. 그때 만석동 ‘콜야드’란 곳으로 수석검수원(헤드체커)이 되어 근무하고 있으면서 간간히 시 공부를 했다네.
성동공업중학교를 졸업한 나는 형님과 친분이 있던 김창황 선생(전 문총 지부장)과 친분이 있었는데, 월남 난민이었던 김창황 선생이 황해도 고향이 그리워 ≪북한≫이라는 잡지를 발행하고 있어 나는 처음으로 ≪북한≫지에 시 한 편을 발표하게 되었네. 그로 인해 당시 조수일 선생이 회장으로 있던 인천문인협회에 가입하게 되었고, 또한 <경기매일신문> 편집국장으로 있던 조수일 선생의 권유로 나 역시 <경기매일신문사>에 입사하게 되어 편집부장이 되었지.
이 무렵 문화예술총연합회(현재 예총의 전신)의 사무국장이 작고한 화가인 문조 우문국 선생이었는데, 내가 사무국 차장이 되었으며 인천문인협회의 회장제도가 대표간사로 명칭이 바뀌면서 인천문협이 새로 탄생하게 되었지. 쇄신 차원에서 대표간사를 선출하게 되어 이 랑승만이 인천문인협회 대표간사가 되고 작고한 조한길 시인(동국대 동창)이 사무국 간사(사무국장)가 되었지. 이 때 동국대학교를 입학하게 된 나는 동국대 신문에 시를 발표하면서 자연히 시를 쓰는 선배들과 어울리게 되고 저 유명한 東國詩集을 발행하게 되자 내가 주도적 역할을 하며 해마다 동국시집을 발행했다네.
1950년대 당시 문화예술의 메카였던 명동에 살다시피하면서 기성문인들과도 어울리게 되고, 일찍 작고한 김관식 시인과도 두터운 친교를 가지게 되었지. 당시 명동의 서울음악궁전에서 살다시피했는데, 1956년 12월 어느 날 술이 잔뜩 취한 김관식이 서울음악궁전으로 들어오면서 ‘승만아, 이리 나와라, 너 됐단 말야. 문학예술에 시가 추천이 되었어…….’ 하는 게 아닌가. 나는 또 김관식이 술주정을 하는 게 아닌가 하고 서울음악궁전 깊숙한 곳에 숨어 있다가 김관식이 하는 소리에 지피는 데가 있어 뛰쳐나와 김관식이 멱살을 잡고 ‘이놈아, 지금 무슨 소리 하는 게야. 내가 문학예술에 추천이 되었다니…….’ ‘이놈아. 내가 지금 문학예술사엘 다녀오는 길인데, 네 놈이 시가 추천되었어.’ 그 당시 나는 김관식이와 친교가 있었지.
나는 그 길로 을지로 3가 조선민주당 건물 안에 있던 문학예술사로 달려갔네. 추천받기가 ≪현대문학≫지보다 까다롭고 어려웠던 ≪문학예술≫에 나는 오랫동안 시를 응모하고 있었지. 내가 문학예술사로 뛰어들어가자 당시 ≪문학예술≫의 주간이었던 박남수 선생이 ‘자네 누군가’ 하시어 ‘제가 랑승만입니다’ 했더니, 박남수 선생이 ‘축하하네. 자네 시가 추천되었네.’ 하시는 게 아닌가. 이렇게 하여 나는 1956년 ≪문학예술≫ 12月号에 詩 「숲」이 추천을 받게 되었다네. 당시 나의 시를 추천한 분은 이한직 선생이었는데 당시 ≪문학예술≫지 이한직 선생의 추천사를 여기에 옮겨 보네.
“浪丞萬君 過去 近一年을 두고 選者들에겐 낯익은 이름이다. 많은 詩人들이 脫落하고 말았는데 君은 黙黙히 努力하여 마침내 選者를 說服시키고야 말었다. 이메이지와 이메이지 사이의 連結이 充分치 못한 까닭으로 思考의 흐름이 때로 中斷되는 흠은 없지 않으나 「숲」은 째임새에도 흠할 바가 없고 말쑥이 맺은 아담한 作品이었다.”
1956년 12월에 ≪문학예술≫에 「숲」이 추천되고, 대서예가인 검여 유희강 선생의 조카인 시조시인 유성규 시인이 ≪자유문학≫지에 시조가 당선되자, 당시 인천시장이셨던 김정열 시장이 우리 두 사람의 문단 데뷔를 축하하는 축하연회를 율목동 인천 시립도서관 정원에서 열어주기도 했다네.
그런데 ≪문학예술≫이 운영난으로 폐간을 하게 되어 나는 그만 두 번째 완료 추천을 받지 못하고 있다가 군대에 입대하게 되고 말았다네. 내가 군대에 입대하게 된 에피소드가 있다네. 당시 나는 <경기매일신문사> 편집부장으로 근무하고 있으면서 ‘문총’ 사무국 차장으로 있는 등 문화활동을 하고 있어 영장을 받고도 입대를 미루고 있었지.
김정열 시장과 특별한 친분을 갖고 있던 나는 어느 날, 시장실로 찾아오라는 말씀을 듣고 시장실로 달려갔더니 하시는 말씀이 “랑 시인 군대에 안가고 있다”며, “병사구 사령부에서 연락이 왔어. 랑승만 가자, 군대에 나가게 해달라” 하시는 것이 아닌가. 그러면서 <경기매일신문사> 바로 건너편에 있던 경기도 병사구 사령부 사령관을 찾아가라고 하셨네. 나는 그 길로 경기도 병사구 사령부 사령관을 찾아가게 되었지. 사령관을 만났더니 2층 황소령을 찾아가라 해 다시 내려와 황소령을 만나게 되었네.
황소령을 만나니 대뜸 하는 소리가 “당신이 없으면 인천문화계가 망하느냐” 하면서 병역 기피자는 영장을 다시 발부하지 않는데 시장님의 간곡한 말씀들도 있고 해서 영장을 다시 발부하니 군대에 응집하여 나가야 한다 하였네. 그렇게 하겠다고 하여 나는 나이 26살에 나이 먹은 신병이 되어 인천공설운동장으로 가서 군대에 응집하여 군에 입대하게 되었지. 이로써 ≪문학예술≫의 폐간에다 군대에 입대하게 되어 문단에 데뷔를 마치지 못하고 군복무를 하게 되었지.
논산훈련소를 거쳐, 논산 훈련소 25중대에 배속되어 신병훈련을 받고 있던 어느 날, 인천 출신 장병들은 모두 연병장에 모이라는 것이었네. ‘시장님께서 오셨구나’ 생각하며 인천 출신 장병들은 모두 연병장에 집합했네. 아니나 다를까, 김정열 시장님께서 연병장 무대 한 가운데에 떡 앉아 계시는 게 아닌가. ‘용돈이 또 생기겠구나.’ 생각부터 했네. 내가 입대한다고 시장님을 찾아뵙고 인사를 드릴 때 당시오복근 비서실장을 불러 용돈을 주셨기 때문이었네. 그런데 잠시 후에 인천여고 합창단 학생들이 무대 위로 올라오는 것이었네. 그러더니 한 학생이 나와 이렇게 말하지 않는가.
‘여기 훈련소에 훈련 받고 계시는 랑승만 시인이 계실 것입니다. 그 랑승만 시인이 작사를 하신 인천시민의 노래를 합창해드리겠습니다. 랑승만 선생님 잠깐 나오시지요.’ 나는 장병들과 함께 있다가 무대로 뛰어 올라 갔지. 그리고는 시장님께 인사를 한다는 것이 거수경례가 익숙치 않아서 모자를 벗고 인사를 올리고 내려갔네.
잠시 후 인천여고 학생들이 내가 지은 인천 시민의 노래를 합창했네. 합창이 끝나고 시장님의 격려사가 있은 다음 역시 오복근 비서실장을 통해 용돈을 주시는 게 아닌가. 나는 이 용돈으로 이 날 25중대 전 대원들과 파티를 열었지. 나는 시장님 덕분에 삽시간에 유명 훈련병이 되었네. 이 인천시민의 노래는, 내가 군대에 입대하기 앞서 시장님을 찾아 뵙고 입대한다고 말씀드렸더니 ‘인천시민의 노래’를 작사해놓고 입대하라고 해 갖다드렸던 것이네. 그만큼 김정열 시장이 나를 인천의 보배라 생각하시며 사랑하시고 아껴주셨네. 이것이 내가 스물여섯 살 때의 일이네.
강원도 인제의 1사단 12연대 작전과에 복무하고 있던 어느 날. 연대장 중대장이 찾아와 군복을 새로 입혀주고 나오라는 것이 아닌가. 나는 연대장을 따라 위병소로 내려갔지. 얼마 후 저 멀리서 찦차 몇 대가 싸이렌 소리를 울리면서 달려오는 것이 아닌가.
찦차가 가까이 다가오느 것을 보니 사단장과 김정열 시장, 인천시의회 의장이었네. 나를 찾아 면회를 오신 것이었지. 쫄병인 나를 찾아오신 인천시장 때문에 나는 1사단 12연대에서 유명 사병이 되었네. 그리하여 군복무를 마치고 돌아와 다시 추천을 받아 문단에 데뷔해야 하는데 ≪문학예술≫은 운영난으로 폐간이 되고 그래서 하는 수 없이 ≪현대문학≫에 추천응모를 하게 되었네. 랑승만이란 이름이 아닌랑희란 가명으로 추천응모하면서 추천심사위원을 김현승 선생으로 해달라고 당시≪현대문학≫ 편집장으로 있던 박재삼 시인에게 부탁을 했네. 원고를 받아본 박재삼 시인이 랑희라는 이름을 보고서, 이는 랑승만이 틀림없다고 인천에 거주하던 평론가 김양수씨에게 당부하여 랑승만씨에게 연락하여 랑희라 하지 말고 랑승만이란 원래 이름대로 하면 ≪문학예술≫ 추천을 1회 추천으로 간주하고 ≪현대문학≫ 추천으로 완료추천을 해주겠다 했네. 그리하여 ≪현대문학≫ 1962년 3월호에 시 「高地에서」가 추천되고, 1962년 9월호에 시 「새」가 완료추천 되어 마침내 실로 6년만에 추천완료가 되어 문단에 데뷔하기에 이르렀네. 이리하여 서울로 이주하여 잡지․신문사 등에 종사하다가 1980년 1월 25일 한국잡지협회 이사회에 참석했는데 그만 귀로에 뇌졸중을 일으켜 길바닥에 쓰러졌지. 경희의료원에 입원하여 응급치료를 받았으나, 나는 오늘날까지 35년 동안 반신불구로 살아오는 것이네. 나는 문단에 데뷔하면서 학원사 ≪주부생활≫ 편집국장을 지냈으며, 삼성출판사 편집국장도 지내게 되었지.
그리하여 내가 뇌졸중으로 쓰러져 반신불구의 몸이 되었다는 소식이 삼성출판사에 전해지자 삼성출판사에서 연락이 오기를, 써놓은 작품원고가 있으면 보내라고 하여 원고 한 보따리를 보내게 되었네. 그리하여 1981년 8월 발병 이후 첫 시집인雨水祭가 세상에 나오게 된 것이네. 이로부터 나는 시를 쓰는 일만이 내가 살아갈 수 있는 일이란 의욕을 살려 시 한 편 쓰면 10년은 더 살고, 시 한 편 발표하면 20년은 더 살며, 시집을 발행하면 30년은 더 산다는 문학 정신적 부활의지로 1년에 한 권씩 시집을 내도 대단하다 할 것인데, 병든 몸으로 성한 사람 못지않게 작품 활동을 해왔네. 그런데 1년에 한 권 씩 시집을 내놓아도 한국문협에서는 이를 외면하고 아무 반응이 없었던 것이네.
나의 첫 시집 四季의 노래는 1970년 당시 한국시인협회 회장이었던 박목월 선생의 주선으로 박정희 대통령 영부인 육영수 여사의 은덕으로 나오게 되었네. 시집 발행의 역정은 다음과 같다네.
1. 四季의 노래(1970년 1월 25일 발행) -三愛社
2.北녘바람의 歸順(1978년 4월 10일 발행) -월간문학사
3.雨水祭(1981년 8월 30일 발행) -修文書館
4.恨․悲歌(1981년 12월 1일 발행) -美文출판사
5.어느 해 가을의 해일(1986년 12월 25일 발행) -청하출판사
6.안개꽃 戀歌(1987년 1월 10일 발행) -思社硏출판사
7.억새풀의 땅(1988년 8월 10일 발행) -文學思想社
8.겨울이여 流刑의 겨울이여(1989년 5월 25일 발행) -뿌리출판사
9.木蓮悲歌(1991년 7월 1일 발행) -대한출판사
10.이 따뜻한 슬픔의 시간에 목련꽃 한 송이(1992년 4월 30일 발행) -스포츠서울(서울신문사)
11.般苦의 山바람 물소리(1994년 11월 20일 발행) -뿌리출판사
12.淨土의 꽃(1998년 10월 15일 발행) -자료원
13.달빛 젖어 千江으로 흘러간 꽃에 관한 記憶(2002년 11월 5일 발행) -자료원
14.울음․山果(2003년 4월 30일 발행) - 들꽃출판사
15.꽃섬․독도의 울음(2006년 8월 15일 발행) -문학아카데미
16.뿌리와 恨- 생각씨로 환생하신 朝鮮의 옷고름(2007년 4월 10일 발행) -진원출판사
17.황폐한 집(2009년 6월 12일 발행) -진원출판사
18영산재․하늘 춤 추어(2011년 8월 15일 발행) -깊은 샘 출판사.
그러나 나는 한국문협에서 반응이 있건 말건 열심히 시를 썼고 왕성하게 작품활동을 하여 투병생활 기간 중 실로 18권의 시집을 세상에 내놓을 수 있었으니 이는 인간승리의 기적이라 자부하네. 이제 내 나이 82세, 8순이 되어 8순 기념 시집을 발행하고 싶으나 시집을 발행할 제작비가 없으니 안타까운 심정일 뿐이네. 이런 영욕의 생활 가운데 2009년 11月에는 내 인생에 있어 가장 뼈아픈 시련을 겪었다네. 그 당시 살고 있던 학익동 은하수빌라 반지하방이 극도의 경제난으로 강제 경매를 당했으니 말이네.
끝으로 내 인생에 있어 가장 보람차고 감격스러운 일 몇 가지를 기록하고 끝맺고자 하네.
1.
1970년 당시 시인협회 회장이었던 박목월 시인의 주선으로 문단에 나온 지 10년이 넘었는데도 시집을 내지 못한 사람을 선정하여, 박정희 대통령의 영부인 육영수 여사께서 시집을 내주셨는데, 나도 포함되어 감사하게도 나의 첫 시집 四季의 노래가 상재되었네.
2.
1984년의 너무나 감격스럽고 보람찬 드라마틱한 일의 하나네. 1984년 새해가 된 겨울의 일이지. 숭의연립주택에 살 당시인데 어느 날 갑자기 나와는 전혀 인연이 없던 육군사관학교로부터 전화가 걸려왔지. 전화를 건 사람은 육군사관학교 교장 황인수 장군의 부관 김 아무개 대위인데, 황인수 장군이 선생님을 찾아뵈라고 하여 전화를 했다고 하는 게 아닌가. 다음날 황인수 장군의 부관이 찾아왔지. 김 아무개 부관은 나에게 황인수 장군이 갖다드리라고 했다면서 금일봉을 내놓으며 다음 같이 말하는 것이었지.
내가 그 무렵 ≪世代≫誌에 ‘한국인의 恨’이란 테마 에세이를 연재했는데 이 에세이를 황인수 장군이 감명 깊게 읽었다는 것이었네. 내가 뇌졸중으로 반신불구가 된 지 4년, 일체 경제활동을 할 수 없는 몸으로 아이들의 학비라도 마련하고자 자택에서 병상시화전을 열었는데, 그 안내장을 각 언론에 보냈더니, 여러 신문에 기사가 나와 이 기사를 황인수 장군이 읽고 김 아무개 부관을 보낸 것이지. 나는 김아무개 대위를 통해 육군사관학교 교장 황인수 장군과 마침내 통화하게 되었네.
일주일 후에 황인수 장군의 부관 김 대위가 집으로 찾아와 쩔뚝거리는 나를 찦차에 태워 육군사관학교로 데리고 갔지. 나는 1978년 대한민국문학상을 받은 시집 北녘 바람의 귀순 원본을 들고갔어. 태릉의 육군사관학교엘 들어서니, 교장실로 올라가는 복도와 계단에 장성급 장군들이 양쪽으로 도열해서서 모두 나에게 경례를 하는 것이 아닌가. 접견실 앞에서 여군 상사가 나를 부축하여 접견실로 인도해주더니, 경례를 부치고 차 대접을 하고 나간 다음, 바로 황인수 장군이 들어왔지. 황장군은 나를 보더니 얼마나 고생을 하시냐면서 도와드리고 싶다는 것이었네.
나는 물질적인 것은 자존심이 허락지 않으니, 들고 간 시집 北녘 바람의 귀순을 내보이며, 이 시집을 재판하여 육군사관학교 부교재로 써주면 좋겠다고 제안했지. 황인수 장군은 대뜸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하며 이화여대 앞에 무슨 서점에 가면 그 서점이 육군사관학교 납본업체라며 이 서점에 연락해 놓을 테니 3백권 납본을 하면 책값을 드리겠다는 것이 아닌가.
나는 집으로 와 있다가 어느 날 이화여대 앞 그 서점을 찾아갔지. 그 서점 주인은 나를 반갑게 맞이하며 황인수 장군의 연락을 받았다며 시집을 두고 가라는 것이었네. 그리하여 시집 北녘 바람의 귀순 재판 3백부를 찍어 육군 사관학교에 납본하게 된 영광스럽고 감격스러운 이야기가 된 것이지.
3.
2006년 9월 경기도 광주군 퇴촌면 남한산성 깊숙한 곳에 있는 일본군 위안부 역사관 ‘나눔의 집’에 가서 할머니들을 찾아뵙고 위로 격려해드린 것은 참으로 보람찬 일이었네. 이 때 인천시 간석동 만월산의 청정도량 ‘약사사’의 주지스님 대휴스님과 약사사 보살님들과 같이 동행하여 할머님들께 큰절을 올렸음은 실로 보람찬 일이었네. 이 때 나는 할머님들께서 아리땁고 청순한 생각씨 때 일본군 군화발에 짓밟힌 쓰라린 경험을 기록한 뿌리와 한이란 자료집 한 권을 얻어 와서 시를 써서 할머님들이 ‘나눔의 집’에서 다시 생각씨로 환생하셨다는 시를 써서 뿌리와 恨 이란 시집을 만들어 냈으며, 이 날 할머님들을 위로 격려해 드리고 독도를 저희 땅이라고 억지를 부리는 일본놈들의 침략근성을 규탄하여 독도가 신라시대 때 신라의 땅으로서 ‘우산도’라는 것을 지적․역사적․지정학적으로 지적하여 쓴 시집 꽃섬․독도의 울음 1백권을 갖다 드렸네. ‘나눔의 집’을 방문하는 이들에게 서점에 꽂아두고 팔아서 쓰시라고 했음이니……. 할머니들의 恨이 우리 못난 역사의 아픔으로 영글어졌음이니, 이 세기의 악마들 일본인들이 지구상에 살아 있음은 통탄할 일 아닌가. 이제는 세계가 규탄하고 있으니 말씀일세…….
4.
1992년 여름, 비구니 스님들의 청정도량이며 승가대학인 운문사 승가대학으로부터 운문사 승가대학 法報紙 창간 40호 기념 축시를 써달라는 전화로 원고청탁을 받고 자료를 보내달래서 축시를 써서 보냈네. ‘아, 지극한 청정도량 꽃구름문의 맑은 法檡 소리여’
-雲門紙 창간 40호에 붙여-
1992년 봄의 일이라네. 나오는 인연이 없던 저 경상북도 청도에 소재하는 雲門寺 승가대학에서 전화가 갑자기 온 것이네. 운문사 승가대학의 學人스님인 종민이란 스님이 전화가 왔는데, 운문사 승가대학에서 學報紙를 발행하고 있는데 창간 40호를 맞이하게 되었는데 그 雲門紙 창간 40호 기념 축시를 써달라는 것이 아닌가. 세상에 이런 감격스러운 일이 어디 있는가. 그리하여 위의 이야기대로 축시를 써서 보냈는 바, 이 창간 축시가 雲門紙에 게재되었으며 비구니 學人스님들이 모두 시가 너무 좋고 아름답다고 하여 雲門紙 편집부장인 종민 스님이 雲門寺로 초청하여, 아무나 갈 수 없는, 더구나 남자로서는 발길도 들여놓을 수 없는, 운문사 승가대학을 1차로 방문하여 그 지극한 극락의 聖地엘 가서 ‘소요재’란 방을 내주시어 2박3일 묵으면서 운문사엘 다녀온 것은 실로 기쁘고 감격스러운 일이었네.
그런데 이런 일의 전화를 받기 바로 직전 서울 신문사 출판부에 근무하고 있던 극작가 유보상씨로부터 전화가 온 것이니, 시작품 1편에 해설 1편씩을 써서 보내면 시집을 만들어준다는 것이 아닌가. 그러니 운문사 승가대학의 비구니 스님들께로 시를 써서 보냈더니, 그 혹시가 雲門法報紙에 게재되어 운문사에서 종민스님이 나를 운문사에 오라고 초청을 해온 것이 아닌가.
그러니 극락 같은 운문사 승가대학을 방문하는 일도 감격스러운 일이요, 유보상씨의 원고청탁도 기꺼운 일이나, 운문사엘 방문하고 오는 일이 내 생에 있어 더 없이 감격스러운 일이라 느껴져 운문사 승가대학을 먼저 다녀와서, 서울신문사 유보상씨의 원고청탁을 쓰기로 마음먹고 운문사 승가대학으로 떠나 2박3일간의 극락을 마치고 돌아와서 유보상 씨가 청탁해준 시작품 1백편과 해설 1백편을 한 달 만에 완성하여 서울신문사 유보상씨에게 갖다주었네. 그 즉시 처음으로 적지 않은 원고료까지 받고 시집이 나왔으니 그 시집이 바로 이 따뜻한 슬픔의 시간에 목련꽃 한 송이였네. 이 시집은 그 때 상당한 베스트 셀러가 되었으며, 그 이후로도 꾸준한 스테디셀러가 되었다네. 이 당시에 똑같은 유형으로 나온 시집이 조병화, 황금찬, 이 탄, 랑승만 등 네 사람만의 시집 들이었다네.
5.
1993년 봄에 두 번째로, 운문사 승가대학에서 초청을 하여 또, 그 지극한 청정도량을 방문하게 되었다. 두 번째 방문했을 때는 ‘般苦의 방’에서 묵었는데 운문사 승가대학의 학장스님인 全明星 비구니 큰 스님께서 종민 스님을 시켜 랑승만 시인이 묵으면서 詩를 쓰라고 책상까지 갖다주어 ‘般苦의 방’에서 시를 썼네. 그리하여 1994년에 11月에는 12번째 시집 般苦의 山바람 물소리가 나오게 되었네라.
6.
1990년 7월 30일에는, 충청북도 보은군 회북면에 사는 근육디스트로피 전신마비 장애자 정인순 양이 전화로 여러 번 꼭 좀 와달라고 하여, ‘관세음보살님’을 매일 같이 부르고 있으라고 하여 인연이 되면 만날 것이라고 했네. 그리하여 1990년 5월 18일, 서울 종로구 관훈동 경인 미술관에서 인연이 되어 나의 집에 와 있던 몇 명의 장애자들을 데리고 가 전시장 근처 여관에 동숙하면서 ‘제1차 장애자 및 재소자 돕기’ ‘信友堂․浪丞萬 바라밀 展’을 열었다네. 유명화가, 유명서예가 및 스님들로부터 서예작품과 그림 등을 기증 받아 이를 전시하여 팔게 되면 이 장애자들을 도와주려 했으나, 그 때만 해도 장애자들에 대한 인식과 관심이 적어 식품 하나 팔지 못하고 빚만 지고 말았으니 동참했던 장애인들이 집으로 돌아갈 때 간신히 교통비를 해주어 보낸 참담한 일을 겪기도 했다네.
이 전시회를 끝내고 집에 돌아와 전시회 실패로 인한 신경성 위장병이 생겨 앓고 있는데, 장애자 돕기 전시장에 오셔서 후원을 해 주셨던, 서울 돈암동에 있는 방생선원의 주지스님이시며 불교자원봉사연합회 이사장 스님이셨던 비구니 주지스님이신 성덕 스님께서 위로 방문해주시어 약값을 주고 가셨다네. 이리하여 이 약값을 들고 충청북도 보은군 회북면에 살고 있는 근육 디스트로피 전신마비 장애자 정인순 양(36세)을 찾아갔지. 이 때 내 나이 58세 반신불구의 몸이었네. 정인순 양의 방에 불상을 모셔놓고, 작은 병풍을 치고 그 즉시 法堂을 차려주었다네. 그 법당 이름은 정인순 양의 아명이 은경恩慶이었으며 나의 아호가 如泉 임으로 ‘恩’字와 ‘泉’字를 묶어 은천암恩泉菴이라는 당호를 지었다네. 정인순 양을 찾아간 이 날, 불교신문인 법보法宝신문사의 김금희 기자와 취재차 동행을 하여 법보신문에 정인순 양 방문기사가 나왔으니, 그 기사의 큰 제목들을 여기 적어보면 다음과 같도다.
浪丞萬시인 ․산골 장애인에 法堂차려줘.
근육질 환자 정인순씨 집에 恩泉菴 차려 격려.
장애인 돕기 불자 외면으로 실패했지만, 시화전 부처님과의 약속 지켜.
그 기사의 한토막을 여기 적노라.
“병든 시인 浪丞萬 씨(57)가 장애자들을 돞기 위해 개최한 ‘랑승만 바라밀 시화전(5/18~24)’이 불자들의 외면으로 오히려 빚만 떠안았지만, 장애자를 돕겠다는 부처님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浪시인은 22일 지팡이를 짚고 충북 보은군 회북면 쌍암리 산골짜기를 향했다. 이 산골에 사는 금년 36세인 근육질환자 鄭仁順 씨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기 위해 30만원의 격려금과 불상 불단 촛대 향초 일속과 보약 불교서적 불경테이프 등을 잔뜩 싸들고 찾아간 것이다. 23세때 갑자기 찾아온 근육마비 병마는 원인도 모른 채 12년째를 앓고 있다. 병세가 점점 심해져 벽에 기댄 채 앉아 있는 것이 고작인 그녀는 浪시인이 선물로 준 염주에 들어 있는 부처님 상호를 보고 싶지만 손을 들 수도 고개를 숙일 수도 없을 정도다. 88년 겨울 KBS ‘내일로 푸른 하늘’ 프로에서 랑시인을 보고 편지해서 인연을 맺은 그녀는 랑시인의 격려 편지와 전화도 암담했던 삶의 늪에서 의욕을 되찾았다고. ‘전화로만 들었을 때는 선생님의 목소리가 힘차서 이렇게까지 몸이 불편하신 줄은 정말 몰랐다’고 울음을 터뜨렸다. 랑시인이 가져온 불상과 불단으로 그녀가 부모님과 함께 기거하는 방엔 금세 법당(‘恩泉菴’으로 지었다)이 꾸며졌다.
이래서 나는 정인순 씨 집에 1년에 봄과 가을 두 차례씩 다녀왔다. 이리하여 내가 이 마을에 승복을 입고 나타나면 온 마을 사람들이 정인순양 집에 모여들어 잔치를 벌이기도 했었으니……. 이 정인순 양 집에 법당을 차려주고 이 날 밤 정인순양의 아버지와 잠을 자는데 꿈에서 백의동자 두 분이 나투시어 빙그레 웃으시어 깜짝 놀라 깨었네. 아침에 서울 형님으로 모시고 지낸 조령암 큰스님께 전화로 말씀드렸더니, 하시는 말씀이 ‘네가 장애인을 위해 불상을 모시고 가서 법당을 차려주는 좋은 일을 하여서 부처님께서 꿈속에 나투신 것’이라고 꿈풀이를 하여 주셨구나. 이 꿈 이야기를 정인순 양에게 해주었더니, 정인순 양이 3년 전에 어느 날 밤잠을 자다가 꿈을 꾸었는데 꿈속에 신령님이 나타나시어 나 좀 살려달라고 했더니 그 신령님께서 말씀하시기를 ‘3년 후에 어느 보살이 나를 모시고 올 것이니 열심히 불공 드리고 살아라’ 하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꿈속의 신령님은 신령님이 아니라 부처님이라고 일러주고 열심히 기도하며 살라고 일러주고 ‘광명진언光明眞言’을 염불해주고 불경을 주고 왔었네. 몇 년 전 TV 인간극장 프로에 정인순 양이 혼인을 하여 사는 장면이 나오는 것을 보았으니 정인순 양은 부처님께서 구제해주신 모양이다. 이 얼마나 감격스러운 일인가. 내가 장애자 돕기를 할 당시 인천시 연수동 임대주공아파트 104동 618호에 권순철이란 전신마비 장애인이 휠체어에 묶여서 간병인의 도움으로 살아가고 있어 내가 매달 찾아가 도움을 주었는데, 내가 지금 바로 그 서민아파트인 연수동 임대주공아파트 106동 1020호에 이주하여 살고 있으면서 나는 이제 걷지도 못하는 몸이 되어 아들을 시켜 먹거리 등을 갖다주고 있으니 이는 또 무슨 인연인 것인가. 한 아파트 동네에 와서 살게 되었으니 부처님께서 맺어주신 인연일 것인가. 아, 랑승만의 기구한 운명이여, 반신불구에다 이제 걷지도 못하는 나 자신 완전 장애인이 되고 말았음이여! 내 인생에 있어 가장 행복한 시절이요, 부처님 심부름을 했다는, 가장 행복한 일이었다고 생각하며 1996년도 4월에도 두 번째 장애자 돕기 ‘信友堂․浪丞萬 바라밀展’을 열어 내 삶을 승화시킨 것은 참으로 기꺼운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7.
2012년 7월 신병으로 119를 불러 나사렛 병원에 입원한 일이 있었네. 그 때 혹시나 필요할까 해서 묵은 시집을 몇 권을 갖고 입원을 했지. 입원하여 치료를 받으면서 간호사들의 간병을 받게 되었다네. 그래서 친절한 어느 간호사에게 시집 몇 권을 주었더니, ‘어머. 시인이시네요.’ 하면서 대뜸 들고 있던 스마트폰을 검색하는 것이 아닌가. 잠시 있더니 ‘랑승만 선생님, 여기 검색에 나오네요.’ 하였네. 그러더니 스마트폰에 검색된 내용을 프린트 해다 주는 것이 아닌가. 그 스마트폰에서 검색된 내용은 내 문학생활에 감격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 스마트폰에 검색된 랑승만의 항목에는 동국대 출신 시인으로 여러 권의 시집이 사진과 함께 소개되고 있었으며, 나의 인물 사진과 함께 ‘한국시단의 목련존자木蓮尊者’라고 검색되어 있으니 이 얼마나 감격스러운 일인가. 독자들도 이렇듯 나를 賞譛하고 있는데 한국 문단에서는 병든 시인이라고 외면하고 능멸하고 있으니 기가 찰 노릇이로다. 이 스마트폰 검색으로 인해 병원 내에 간호사들을 비롯하여 의사들, 입원환자들에 이르기까지, 화제의 인물이 되어 간호사들이 더욱 나에게 관심을 갖고 신경을 써주게 되었다네. ‘한국 시단의 목련존자’가 나사렛 병원의 입원환자라니……. 졸지에 VIP환자가 된 감격스러운 일이었네. 목련존자가 누구신가. 부처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 거룩하신 수제자가 목련존자 아닌가. 나의 시집 목련비가를 어느 독자가 보고 나를 ‘목련존자’라 일컬으신 것이네. 어디 이 뿐이랴. 내가 만나본 장애자들이며 재소자, 고아원 등,
1.“산골소녀 옥진이 시집”을 내준, 전라북도 고창에 살던 김옥진 양.
2. 공주교도소 재소자 김충호 군. 가족들도 찾아가지 않는 김 군의 만나달라는 편지를 몇 번 받고, 공주 교도소로 쩔뚝 거리고 찾아가 옥바라지를 했으며, 그가 부탁한, 동두천에 사는 노모를 만나보기도 했으며, 그가 출소하는 날 내가 데리고 나와서 집에 데리고 있다가 취직까지 시켜주었다.
3. 경상북도 포항에 살던 이상열 씨.
4. 강원도 동해시에 사는 시각장애자 김진탁 군.
5. 서울 동작구 상도동에 살던, 전신마비 장애자 한미순 양.
6. 경북 안동, 깊은 드메산골에 사는, 전신마비 장애자 권오윤 형제.
7. 전북 이리에 살던, 결핵성 관절염 환자 채혜주 양.
8. 강원도 강릉에 있는 고아원인자비 복지원.
9. 서울 마포구에 살던, 근육 디스트로피 전신마비 장애자 최영자 씨.
10. 서울 대방동에 살던, 이현준 군.
11. 서울 대치동에 살던, 뇌성마비 장애자 한인서 씨.
12. 서울 도봉동에 살던, 전신마비 장애자 허남식 군.
내 삶의 역정을 끝내면서 내 8순의 가슴에 두 개의 명시가 서려 있어서 나를 달래주나니 이를 이 글의 끝에 적어본다네. 첫째는 나의 동국대학교 은사이셨던 미당․서정주 선생의 명시 「귀촉도」이고,
눈물 아롱 아롱
피리 불고 가신 님의 밟으신 길은
진달래 꽃비 오는 西域 三萬里.
흰 옷깃 염여 염여 가옵신 님의
다시 오진 못하는 巴蜀 三萬里.
신이나 삼어줄 걸 슬픈 사연의
올올이 아로새긴 육날메투리.
은장도 푸른 날로 이량 베혀서
부질없은 이 머리털 엮어 드릴 걸.
초롱에 불빛, 지친 밤 하늘
구비 구비 은하물 목이 젖은 새.
차마 아니 솟는 가락 눈이 감겨서
제 피에 취한 새가 귀촉도 운다.
그대 하늘 끝 홀로 가신 님아.
두 번째 詩로는, 요절한 일본 시인 ‘이시까와 다꾸보꾸’石川 啄木의 名詩 한 편 이라네. 우선, 일본말을 한글로 표기해보네.
“기미오 오모히시
하루와 하야스기데
마찌노 스메다끼
고가라시노 후꾸
야마와 게와시게레도
아노야마 고에루바
후로사도노 도모시비와
미에즈
다비비도와 나미다 구미쓰쓰
고노미찌오 노보리누”
이를 의역하면 다음과 같다.
“그대 그리운 봄은
일찍 떠나고
마을엔
쓸쓸한 가랑잎만 흩날린다.
산은 험준하지만
저 산을 넘으면
고향의 등불이 보이는데……
나그네는 눈물 없이는 이 언덕을 넘지 못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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