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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호/아라인천/김영덕|아라뱃길 유감-시천동의 흥망성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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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백탄
댓글 0건 조회 4,832회 작성일 14-03-11 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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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덕|아라뱃길 유감-시천동의 흥망성쇄

 

 

아라뱃길은 운하다. 한강이 산란기 연어처럼, 그 지류 가운데 하나인 굴포천을 짐짓 거슬러 올라 계양산의 북쪽 기슭을 깊게 베어내고 서해로 질주하는 인공 수로다. 그런데 이 유장한 뱃길 덕분에 인천 서북부의 유서 깊은 마을 하나가 절단이 났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분이 많지 않은 것 같아 매우 안타깝다. 그 비운의 마을은 바로 시냇물이 시작되는 마을이라는 뜻의 시천동始川洞이다.

‘시시내’라는 몽환적 이름도 갖고 있는 이 마을은 진주 류씨 집성촌이었다. 시천동 류씨 집안에는 고려시대 이후 수백년에 걸쳐 벼슬길에 나가 입신양명한 분들도 많지만, 수준 높은 학자들이 다수 배출되어 조선후기와 일제강점시대를 거치면서 인천의 3대 명문가 중 하나로 손꼽히기도 했다. 추사 김정희 이후 한국 최고의 서예가로 평가받는 검여 류희강선생이 이 집안 출신이다.

시천동은 첩첩산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천동은 과거 교통의 요충지였다. 고려시대에는 지방 관리들과 보부상, 그리고 삼남지방의 선비들이 청운의 뜻을 품고 왕도인 개경을 오가던 지름길이었다. 천안, 수원, 안산, 시흥에서 걷거나 말을 타고 부평읍내(계산동)를 경유하여 김포, 통진, 개성으로 가는 첩경은 계양산의 ‘큰징매이’와 ‘작은징매이’고개를 넘어 시천동을 지나가는 것이었다. 옛날 이곳에는 정기적으로 큰 장이 섰고, 수십 필의 말을 보유한 대규모 ‘여각’도 있었다.

그러나 개성이 수도였던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왕조가 개국, 서울로 천도하면서 우리 국토의 인문지리적 남북 중심축이 급격하게 바뀐다. 아울러 사람과 물자의 이동로로서의 시천동의 역할도 사라졌다. 한반도 중남부 지방에서 개경에 가려고 험준한 한남정맥 왼쪽을 넘나들며 왕래할 일이 없어진 것이다. 사실 그때부터 시천동의 쇠퇴는 시작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

불행 중 다행이었다. 여말선초의 혼란기를 거쳤음에도 불구하고 시천동의 배후 도시로써 부평읍내의 번성은 구한말까지 줄곧 유지된 것이다. 조선시대에도 인천 최고의 번화가이자 중심지는 지금의 계산동인 부평이었다. 부평은 인천의 진산이라는 계양산을 아늑하게 등지고 바로 앞에는 굴포천으로 생성된 넓고 비옥한 평야를 가진 풍수 길지다. 지금도 부평초등학교 안에는 부평도호부 청사가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으며, 경인교대 근처에는 부평향교가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시천동은 사실 부평읍내와 걸어서 반나절 생활권이다. 옛날 기준으로는 도심과 아주 가까운 거리에 위치하고 있어서 문화생활을 영위하는데 큰 불편이 없었을 것이다. 아울러 부평의 일부로써 시천동이 그 지역의 지배층이었다고 할 수 있는 양반사회에서 일정한 영향력을 유지하는데도 어려움이 없었을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1929년 서구 연희동에 서곶공립보통학교가 개교하기 전까지 시천동과 인근 마을의 학령기 소년들이 험준한 고개를 넘어가며 계산동에 있는 부평공립보통학교에 다녔던 것도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1940년대까지도 시천동 류씨 집안의 젊은이들은 서울의 성균관에서 격식을 갖춘 구식 혼례를 했다. 결혼예식을 마친 신랑신부는 보통 인력거를 타고 서울역으로 달려가 경인선 기차를 타고 부평으로 돌아와 큰 고개 둘을 넘어 시천동 집으로 귀가했다고 한다. 이러한 사례로 보아 우리는 이 집안이 당시 서울의 파워엘리트그룹과 강한 유대관계를 갖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달도 차면 기울 듯이, 상서로운 시천동의 기운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지기 시작한다. 시천동이 경험한 첫 번째 시련은 조선의 붕괴와 함께 찾아온 구질서체계의 소멸이었다. 이 땅의 양반 집안에 주어졌던 독점적 혜택이었던 성리학(사서삼경) 공부를 통한 입신양명의 길이 막혀버린 것이다. 시천동이 고향인 내 초등학교 동창생의 증조부는 조선왕조가 시행한 마지막 과거시험에 소년급제했다. 그러나 그는 벼슬길에 나가지 못하고 평생을 진사로 불운(?)하게 보냈다. 말년에 부평향교의 전교를 지낸 것이 이력의 전부다. 그는 저물어가는 한 시대를 망연자실 바라보고만 있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시천동의 두 번째 시련은 국토분단과 6.25전쟁의 먹구름이 몰려오면서 시작되었다. 신교육에도 일찍 눈을 떠 서울 유학생이 많았던 시천동 젊은이들은 해방공간에서 자신의 이념에 따라 좌우로 갈라져 갈등을 빚었다. 전쟁통에는 인민군과 국군, 중공군과 유엔군, 그리고 다시 국군이 번갈아 마을에 들어오면서 친인척 간에도 서로 피의 보복이 횡행했던 골육상쟁의 아픈 세월을 겪었다.

시천동의 세 번째 시련은 1972년 마을 전체가 개발제한구역으로 묶이면서 찾아왔다. 당시에도 집중 취락지구는 제외하고 그 주변에 그린벨트가 설정되는 것이 상례였는데, 시천동은 분명 예외적이다. 그래서 음모론이 돌기도 했다. 그 직전년도에 실시된 대통령 선거 때 야당표가 많이 나온데 대한 당국의 보복이었다는 것이다. 지금 그 진위여부를 가리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개발제한으로 인하여 시천동 주민들은 재산권을 행사하는데 있어서 많은 제약이 따랐으며 지금까지도 인근 마을들에 비하여 현저하게 낙후된 것만큼은 사실이다.

그리고 시천동의 네 번째이자 마지막, 결정적 시련은 1990년대 초반 경인아라뱃길의 모태인 굴포천 방수로 공사가 시작되면서 찾아왔다. 옛말에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고 했는데, 뱃길이 산간 고지대 마을 시천동 한가운데를 지나가는 황당하고 믿기 어려운 일이 벌어진 것이다. 이번에는 아예 마을 대부분이 통째로 사라졌다.

세상에 영원히 존재하는 것은 없으며, 살아있는 모든 것은 끝을 향해 간다고 했다. 화무십일홍이라는 잠언도 있다. 그러나 국가적 사업이라고 할 수 있는 아라뱃길을 위하여 스스로를 온전히 내어주고 역사의 뒤안길로 말없이 사라져간 시천동을 위하여 우리가 작은 기념관이나 역사관 하나 정도는 세워 줄 수 있지 않을까?

마침 우리나라 서예계에 큰 발자취를 남긴 검여劍如 류희강柳熙綱 선생의 고향이 이곳인 만큼 그분의 작품 전시관도 함께 세우면 지역사회의 자부심 고양과 함께 문화욕구도 충족시킬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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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여름 개관한 인천 남동구의 ‘소래역사관’을 꼭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은 아니다. 북미대륙에서 수천 년 이상 평화롭게 살아오던 원주민들을 기병대를 앞세워 강제로 몰아내고 서구풍 식민지를 세웠던 유럽계 이민자들이 마침내 원주민들의 문화와 정신세계를 재평가하기 시작하면서 자신들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를 깨닫고 과거 잘못에 대한 참회와 속죄의 뜻으로, 큰 돈을 들여 수많은 지역에 아메리카 인디언 기념관이나 박물관을 설립한 사례도 있기 때문이다. 오늘도 기억과 욕망을 뒤섞으며 아라뱃길의 물결은 무심히 서해로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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