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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이 시대의 시인, 신달자
대담
정남석
누가 뭐라든 나는 쓴다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시인, 그녀의 시는
화려한 명성 뒤에 숨겨져 있는 한 여자로서의 자전적 인생 에세이다.
신달자의 시는 스타일의 혁신을 과도하게 숭배하는 현대시의 기류에서 보면 대단히 소박한 서정시의 미덕과 기율에 충실하다. 하지만 그녀의 시 속에 담긴 정신과 감각의 열도는 ‘시혼詩魂’이라고 불러도 좋을 강렬한 열정을 감추고 있다. ‘나는 마흔에 생의 걸음마를 걸었다’ 라고 토로하는 시인은 삶의 고해성사와도 같은 진실한 목소리를 통해 시인과 독자를 가로막고 있는 완고한 벽을 일시에 허물어 버린다.
그녀의 시가 내보이는 다양한 삶의 표정들은 단지 수사적 의장으로서의 화자가 아니라 고통과 상처의 신열을 앓는 우리의 맨 얼굴을 닮아있다. 시인의 시적 자아는 상처 입고 소외된 존재들의 아픔을 꿰뚫어보고, 어둠에 감춰진 존재들을 밝은 빛 속으로 끌고 나온다. 이 같은 치유의 과정은 하나의 시적 제의祭儀이다.
시인의 열애는 자신과 주변의 신산한 삶에 대한 포용에서부터 우주 생명에 대한 경이와 재발견의 언어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나타난다. 그녀의 시편은 삶의 고통을 노래할 때에도 활달하고 생동적인 활력을 보여준다. 결코 비관주의나 허무주의로 떨어지지 않는다. 또한 시인은 관능 위주의 여타 페미니즘, 몸시와는 달리 감정이 절제된 묘사의 미학 위에서 살이 제거된 뼈의 슬픔에 집중하며 삶에 달관한 목소리를 설득력 있게 펼쳐 보인다.
정남석: ‘우리 시대의 시인’ 특집으로 선생님을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이 시대의 저명한 시인으로서, 또한 한국시인협회의 회장으로서 바쁜 일상을 보내고 계실 텐데, 시간을 내주시어 감사합니다. 선생님의 시세계를 궁금해 하는 독자들에게 요즘 근황을 전해드리고 싶습니다.
신달자:요즘은 가끔 지방에 강연이 있고, 글을 써야하는 숙제가 있고, 시인협회 일이 가득하고(곧 끝납니다만), 병원에 다니고, 그렇게 바쁘게 보냅니다.
정남석:많은 시인들이 처음 시를 만나게 될 때에는 어떤 특별한 계기가 주어지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선생님께서도 시를 만나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었을까요?
신달자:중학생 때까지는 무용을 했어요. 사춘기를 맞으면서 아득한 그리움을 전달하는 방법에서 편지를 생각했고, 편지는 글이라는 넓은 의미의 책을 읽게 되면서 시를 가까이 하게 되었어요. 그러다가 부산여고시절 경남백일장에서 1등을 하게 되고, 자연스럽게 국어선생님의 사랑을 받았고, 다시 자연스럽게 국문과를 가게 되었어요. 그땐 시는 국문과와 연결되어 있었어요. 국문과에서 김남조, 박목월, 서정주 선생님을 만나면서 시가 내 삶의 본질이 되었지요.
정남석:현대시 100년을 맞이하여 2009년 선생님의 정년기념 시선집 바람 멈추다가 활판공방에서 출간되었습니다. 그 의미와 또 시단이나 독자들의 반응은 어떠했는지요.
신달자:큰 의미는 없었어요. 그 당시 활판시집이 나오기 시작했고, 좋아보였고, 마침 정년도 되어 출간하게 되었어요. 시단이나 독자의 반응은 잘 모르겠는데요. 시집을 너무 습관적으로 받아들이는 것 같아요. 너무 많이 보니까 감동이 없어졌어요. 그 무감동 속에서 그래도 진실은 보이게 되겠죠.
정남석:선생님의 산문 중 ‘그렇게 시간을 바쳤어도 시가 약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다. 그런데 쓴 씨가 다시 내게로 돌아올 때 상처의 환부를 쓰다듬는 손길 혹은 진통제가 되었다’라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시가 약이 된 예가 있다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말씀이 가능할까요?
신달자:그런 말을 했던가요? 아마도 시는 쓸 때는 고통이지만 그것이 내게로 돌아오면 위로가 되는 경우가 있어요. 그리고 누군가가 그 시에 위로를 받았다고 하면 그 몇 배가 내게 환희가 돌아오지요 곧 시들어 버리는 환희이지만요. 시인은 다시 엎드려야 하는 거지요. 지금은 누가 뭐라든 그냥 나는 쓴다 라는 의지로 향하고 있습니다.
정남석: ‘내 시는 상처의 진열장이다. 심리적으로 나는 스무 번도 더 죽었다. 사계절 내 몸에서는 상처의 울음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나는 그 울음소리를 그치게 하는 전쟁에 돌입했다. 그 도구는 칼이 아니라 필기도구였다. 시를 쓴다는 것은 내 운명과 고통과 상처와 화해하는 길이었다. 나는 오랫동안 내 시에서 내 불행을 저울질 하느라 애를 썼다.’라는 말씀도 있습니다. 앞의 질문과도 관련이 있겠습니다만, 이 부분에 대해 추가 말씀이 가능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신달자:운명이라는 말, 고통이라는 말, 상처라는 말을 젊은 날에 많이 했습니다. 아니 지금도 하고 있지요. 그런 만큼 그런 것들이 나를 옥죄고 있는 시간들이 많았습니다. 시가 없었다면 아마도 그런 고통과 상처를 이겨내는 힘이 없었을 겁니다. 때론 나는 시에 구걸하는 여자라고 생각할 때가 많았어요. 사랑에도 마찬가지였지요. 뭐 좀 덜 외로워 보려고 안간힘을 썼겠지요. 그러나 시나 사랑은 더 외로워지게 만드는 것들이죠. 그런 고문 속에서 시나 사랑은 더 뜨거워지는 것이 아닐까요. 지금은 나이도 들어 많이 고요해졌어요. 그러나 시에 대해선 그 뜨거움을 간직하고, 그렇게 하고 싶은데, 나는 많이 초연해졌어요. 시집이나 산문집이 많은데, 그래서 더 부끄러운데, 그렇게라도 하지 않았으면 내 삶은 더 어려웠을 겁니다.
정남석:부군께서 뇌졸중으로 쓰러지시고, 이후 어려운 여건 변화로 자살기도를 하신 적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사나운 소 같은 운명을 이제껏 몰고 온 선생님은 세상에 진 빚이 없다고 하셨고, 세상에 절체절명의 불행한 일도 없다고 하셨습니다. 이런 지난한 삶을 헤치고 오늘까지 오셨습니다. 이 어려웠던 삶과 그 극복 과정에 대해 간단하게라도 말씀 들을 수 있을런지요?
신달자:재미없는 질문만 자꾸 계속되네요. 뭐 이런 이야기 산문에서 많이 한 것 같고요. 내가 35살 때 남편이 쓰러졌지요. 그때 나는 그를 살려야만 했어요. 막내가 두 살이었거든요. 그리고 나는 너무 젊었고요. 미친 듯 그를 살려 내는데 집중했어요. 그러나 3년쯤 지나면서 나는 그를 살려 낸 것을 후회했어요. 그의 병은 본인보다 보호자를 더 죽이는 병이었거든요. 그러나 사나운 소 한 마리를 끌고 가면서 온몸이 다 할퀸 자국으로 살았어요. 불행은 혼자 오지 않아요. 행운도 함께 옵니다. 행운을 바라볼 수 있는 눈을 가지는 것이 시인이 아닙니까. 어머니는 절 믿었어요. 전혀 희망이 보이지 않을 때마다 어머니는 저에게 말했어요. “니는 그래도 꼭 될 끼다” 내가 막 화를 냈지만 희망은 무슨 놈의 희망이야, 하고 소리쳐도 어머니는 꼭 그 말을 했어요. 그 어머니 말 때문에 나는 견뎠을 거에요. 자 이만하면 답이 되었나요.
정남석:선생님의 「등잔」이라는 시를 보면 성 에너지의 등불이 꺼지지 않았다는 느낌이 강렬합니다. ‘비록 상처투성이로 무릎을 꿇는 일이 생기더라도 온몸에 전율이 일고 생명을 나눌 수 있는 운명적 사랑을 해보고 싶은 것. 그렇다, 결국 헤어지더라도 그런 사랑 한 번 해보는 것을 여자들은 진심으로 갈망하는지 모른다. 그래야만 살았다’라고 하시면서 힘주어 생生을 말할 수 있는 것인지 모른다는 말씀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선생님께서는 어느 대담에서 ‘남자에 관해서는 왜 묻지 않느냐, 좋은 남자 하나 소개 부탁한다’고 하신 적도 있었습니다. 시에 있어서의 성의 문제에 대해 한 말씀 듣고 싶습니다.
신달자:「등잔」은 성적 묘사가 있긴 하지만 내가 여자라는 것을 강하게 말한 것은 아닙니다. 이 시는 아버지의 빛 시집에 실려 있는 시인데요. 오히려 다른 사람들이 많이 언급했어요.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거 아닙니까. 생명 속에는 그것이 끝날 때까지 여자가 있는 것이라고 들었어요. 좀 내용은 달라지겠지만요. 사랑이란 아름다운 것이지만 그것이 완만하게 이루어지는 것은 어려운 것 같아요. 성적인 문제는 전 잘 모르겠어요.
정남석:‘내 인생에 후회가 있다면 남발한 감정이다. 그것이 형체가 있다면 감옥에라도 처넣고 싶었다. 나는 이익에 둔하다. 감정을 최우선으로 살았기 때문이다’라는 말씀도 있었습니다. 감정이라는 유령의 덧은 어떤 것인지 궁금합니다.
신달자:감상적인 것이지요. 저는 제 이익에 서툽니다. 지금도 그래요 그러나 후회는 하지 않아요. 생각해 보면 너무 감상적이었다는 것 그것은 인정해요. 젊은 시절 11월이 되면 그냥 울고 다녔어요. 왜? 잘 모르면서요. 그래서 자신을 싫어하는 경우가 많았어요. 그래서 감옥에 쳐 넣고 싶다고 한 적이 있지요. 감정 남발의 정체는 똑똑하지 못한 자아라고 말했던 것 같아요. 제가 좀 그렇거든요. 그래서 그 감정 때문에 시를 쓴다고 하고 싶지는 않아요. 그것을 순수한 것이라고도 말하고 싶지 않아요. 그냥 똑똑하지 못한 자아에요. 그것은 나이가 들어도 잘 길들여지지 않아요. 그게 나이니까요.
정남석:산문에도 리듬이 있고, 산문이어도 시의 숨결이 있어야 한다고 배웠습니다. 요즘 젊은 시인들 중에 시의 율격이 배제된 산문화 경향이 두드러지고 있습니다. 이런 변화에 대한 선생님의 생각을 듣고 싶습니다.
신달자:물론 시도 시대성과 연관이 있지요 그러나 잘 읽히지 않는 난해한 산문시는 전 좋아하지 않아요. 그러나 전 아 이런 시도 있구나 하고 넘어가지요. 그 시인이 그것을 견디는 시간까지 가겠지요. 시에도 시인 나름의 변화를 겪어야 하니까요.
정남석:평생 시를 쓰시면서 절대로 잊혀지지 않는 일들이 있을 법도 한데요, 아니면 인천과의 인연이 있으면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신달자:아주 각별한 인연이 있습니다. 신혼여행을 인천으로 갔거든요. 가장 돈이 안 드는 곳이었던 것 같아요.
정남석:한국시인협회 회장으로서 체감한 한국시, 한국시단의 동향이나 문제점, 그리고 앞으로의 소망 등을 말씀 부탁드립니다.
신달자:한국시단은 자로 댄 듯이 너무 나뉘어져 있고 서로 이 쪽 저 쪽이 되어 있어요. 그룹이 너무 많고 질의 문제도 걱정스럽습니다만 그러나 그런 무늬 속에서 한국문학은 발전하고 있으니까요. 문제는 한국문학의 발전이 중요하지 않습니까. 저는 한국문학이 향상되고 있고 반드시 세계화 속으로 등불을 켜리라고 믿고 있습니다.
정남석:끝으로 선생님께서 남은 시 인생에 특별한 꿈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요?
신달자:좋은 시를 쓰고 싶은 거지요. 정말 좋은 시요. 내가 죽으면 누구나 사랑하는 시 한 편이라도 있으면 좋겠어요. 아까운 시인이 죽었다. 그런 대접을 받는다면 최고가 되는 거지요. 저는 진심을 다하고 최선의 대접을 받으면 되는 거지요. 그것이 꿈입니다.
정남석:가을이 깊어지고 있습니다. 긴 시간 선생님의 노고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끝으로 선생님께서는 계간 리토피아에 여러 차례 소중한 원고를 주셨습니다. 계간 아라문학은 계간 리토피아의 자매지로서, 인천 지역을 거점으로 새롭게 출발한 잡지입니다. 이 계간 아라문학이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할 것인지에 대한 좋은 말씀 들을 수 있을 까요?
신달자:문학잡지는 어려울 것입니다. 그런데 다시 시작하였으니 걱정입니다. 아라문학도 리토피아처럼 수명이 길었으면 해요. 다양한 필진과 특집들을 잘 살려 냈으면 해요. 문학잡지도 시대와 사회와 문단과 세계의 방향을 잘 읽어야 할 겁니다. 두 개 잡지의 건강을 빌고 많은 사랑 받기를 빕니다.
신달자 시인의 시는 평이한 어법으로 일상사를 이야기하거나 대상을 관찰하고 있지만, 결코 평이한 시가 아니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아무나 볼 수 없는 삶의 본질에 대한 순간적 깨달음을 시인 특유의 상상력으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선 대표시
소 외 11편
사나운 소 한 마리 몰고
여기까지 왔다
소몰이 끈이 너덜너덜 닳았다
골짝마다 난장쳤다
손목 휘어지도록 잡아끌고 왔다
뿔이 허공을 치받을 때마다
뼈가 패였다
마음의 뿌리가 잘린 채 다 드러났다
징그럽게 뒤틀리고 꼬였다
생을 패대기쳤다
세월이 소의 귀싸대기를 때려 부렸나
쭈그러진 살 늘어뜨린 채 주저앉았다 넝마 같다
핏발 가신 눈 꿈벅이며 이제사 졸리는가
쉿!
잠들라 운명.
침묵피정․1
영하 20도
오대산 입구에서 월정사까지는
소리가 없다
바람은 아예 성대를 잘랐다
계곡 옆 억새들 꼿꼿이 선 채
단호히 얼어 무겁다
들수록 좁아지는 길도
더 단단히 고체가 되어
입 다물다
천 년 넘은 수도원 같다
나는 오대산 국립공원 팻말 앞에
말과 소리를 벗어놓고 걸었다
한 걸음에 벗고
두 걸음에 다시 벗었을 때
드디어 자신보다 큰 결의 하나
시선 주는 쪽으로 스며 섞인다
무슨 저리도 지독한 맹세를 하는지
산도 물도 계곡도 절간도
꽝꽝 열 손가락 깍지를 끼고 있다
나도 이젠 저런 섬뜩한 고립에
손 얹을 때가 되었다
날 저물고 오대산의 고요가
섬광처럼 번뜩이며 깊어지고
깊을수록 스르르 안이 넓다
경배 드리고 싶다
강을 건너다
저 하늘의 별도 강 건넌 만큼
하늘에 걸렸겠다
하루를 건너는 사람들
세월을 감다가 풍덩 빠지는 곳이 있다
잠드는 일도 강 건너는 일이다
누구를 향해
정신 나게 한마디 하고 싶은데
꿀꺽 참으며 또 강 건넌다
무슨 강이든 제 등뼈를 눕혀야 건널 수 있다
등을 하늘에 두고 강 건너는 새들
하늘에도 강이 있다는 것을
새들이 엎드려 나는 것을 보면 안다
바람이 출렁 나뭇가지 위에 주저앉았다
저것도 강 건너오기 쉽지 않았다
해 떨어질 때
하늘의 목덜미를 잡고 견뎌보려고
당기는 만큼 하늘 붉었다
해라는 것도 강 건너는 데 저리 겁난다
강이 발 아래에만 있는 게 아니다
강 깊어
등짐 지고 끙끙거리는 것들
앞에 보이는 강이 더 많다
번쩍 불꽃 튄다.
曠野에게
오늘 나는 너의 벗으로 돌아왔다.
태풍에 휩쓸려 무너질 것 다 무너지고 서슬 푸르게 뻗어가던 욕망의 가지 다 꺾이고 부끄러울 곳도 가릴 것 없이 다 벗겨져 돌아왔다.
광야여 손잡아 다오.
오늘 나는 더 어두울 수 없는 어둠으로 더듬거리지 않고 돌아와 빈 들판으로 누운 너의 살이 되려 한다.
무너질 것 다 무너진 속살의 흐느낌 풀어 너의 발끝을 씻으며
너의 안에서 끝내 허물어지지 않는 집을 짓고 짓다 허문 나의 꿈을 바라보고자 한다.
내가 사모하던 꿈을 꿈의 먼 나라에서 바람에게 전해 들으며 광야의 큰 가슴으로 큰 귀로 땅에 엎디어 수 세기를 지나도록 전해 듣고자 한다.
나보다 먼저 돌아와
광야가 된 나의 영혼이여.
등잔
인사동 상가에서 싼값에 들였던
백자 등잔 하나
근 십 년 넘게 내 집 귀퉁이에
허옇게 잊혀져 있었다
어느 날 눈 마주쳐 고요히 들여다보니
아직은 살이 뽀얗게 도톰한 몸이
꺼멓게 죽은 심지를 물고 있는 것이
왠지 미안하고 안쓰러워
다시 보고 다시 보다가
기름 한 줌 흘리고 불을 켜 보니
처음엔 당혹한 듯 눈을 가리다가
이내
발끝까지 저린 황홀한 불빛
아 불을 당기면
불이 켜지는
아직은 여자인 그 몸
저 산의 녹음
무슨 저런 짐승이 있을까
초록의 몸이 무거워
뒤뚱거리며 누운 저 여름짐승
숨 쉴 때마다 온 산이 들썩들썩하다
몸의 깊은 곳에서 뿜어져 나오는
화끈거리는 기운
삼천 여자를 데리고 놀고 있는가
씩씩거리며 숨을 헐떡이는
발작 광기를
절정으로 뿜어내는
저 사내
알몸인데도 자꾸 벗고 싶어서
사내는 검푸른 근육을 출렁거리고 있다
이상하다
뜨겁게 달아오른 천지녹음
그런 광란의 현장을 바라보고 있을 뿐인데
나 갑자기 수태할 것 같다
그 푸른 동굴 속에서
나 알몸으로 누워 산을 받아들이면
산 하나 품어 나오리
바다와 강이 하늘이 땅이 산이 모여
초록의 물결로 넘실거리다가
불끈 일어서는 저 거인
누가 엉덩이를 치받는지 다시 꿈틀한다
바람 불 때마다 푸른 불이 번져 나간다
핸드백
나의 핸드백은
내 가슴속의 숨은 방과 같습니다
남들은 잘 열지 못하고
열지 못해서 남들이 조금은 궁금한 내 핸드백은
때때로 나도 궁금해 손을 넣어 뒤적거리곤 합니다
열쇠와 지갑만 잡히면 안심이지만
그 두 가지가 정확히 잡히는데도
무엇이 없어진 느낌으로 여기저기 마음의 주머니를
더듬다가 덜컹 가슴이 내려 앉곤 합니다
무엇인가 밀물져 왔다가
썰물처럼 밀려 갔는지
황토빛 뻘이 아프게 펼쳐져 있습니다
오늘은 찾아도 찾는 것이 없어서
속을 확 뒤집어 쏟아 버렸지만
알량한 내 품위가
남루한 알몸으로 햇살에 드러나
쑥밭 같은 마음들을 재빠르게 주워 담습니다
내 핸드백 속에서는
내 심장의 박동소리가 들리곤 합니다.
열애
손을 베었다
붉은 피가 오래 참았다는 듯
세상의 푸른 동맥 속으로 뚝뚝 흘러 내렸다
잘 되었다
며칠 그 상처와 놀겠다
일회용 밴드를 묶다 다시 풀고 상처를 혀로 쓰다듬고
딱지를 떼어 다시 덧나게 하고
군것질 하듯 야금야금 상처를 화나게 하겠다
그래 그렇게 사랑하면 열흘은 거뜬히 지나 가겠다
피 흘리는 사랑도 며칠은 잘 나가겠다
내 몸에 그런 흉터 많아
상처 가지고 노는 일로 늙어버려
고질병 류마치스 손가락 통증도 심해
오늘밤 그 통증과 엎치락뒤치락 뒹굴겠다
연인몫을 하겠다
내 사랑의 입 툭 터지고 허물어져
누가 봐도 나 열애에 빠졌다고 말하겠다
작살나겠다.
등 푸른 여자
바다를 건너왔지
바다에서 바다로 청람빛 갈매 속살에 짓이겨지면서
그 푸른 광야를 헤엄쳐 왔지
허연 이빨 앙다문 파도가 아주 내 등에서 살고 있었어
성깔 사나운 바다였다
내 이빨 손톱 발톱을 다 바다에 풀어 주었다
바다를 건너기 위해서는 단단한 것을 버리고
바다와 몸 섞지 않으면 안 된다
물길을 따르기만 했는데 팔뚝 굵어진 여자
망망대해의 질긴 심줄이 등으로 시퍼렇게 몰렸다
드디어
암벽화처럼 푸른 지도가 내 등 위에 그려지고 있었어
내 등에 세상의 바다가 다 올려져 있더군
몇 만 겹 줄을 벗겨내도 꼼짝 않는 바다
바다를 건너 와서도 내려지지 않았다
시퍼렇게 시퍼렇게 바다를 걷어 내어
지상의 돛으로나 우뚝 세우고 싶은
내 몸에 파고든 저 진초록 문신
저 거리의 암자
어둠 깊어 가는 수서역 부근에는
트럭 한 대분의 하루 노동을 벗기 위해
포장마차에 몸을 싣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주인과 손님이 함께
야간 여행을 떠납니다
밤에서 밤까지 주황색 마차는
잡다한 번뇌를 싣고 내리고
구슬픈 노래를 잔마다 채우고
빗된 농담도 잔으로 나누기도 합니다
속 풀이 국물이 짜글짜글 냄비에서 끓고 있습니다
거리의 어둠이 짙을수록
진탕으로 울화가 짙은 사내들이
해고된 직장을 마시고 단칸방의 갈증을 마십니다
젓가락으로 집던 산 낙지가 꿈틀 상 위에 떨어져
온몸으로 문자를 쓰지만 아무도 읽어 내지 못합니다
답답한 것이 산 낙지뿐입니까
어쩌다 생의 절반을 속임수에 팔아 버린 여자도
서울을 통째로 마시다가 속이 뒤집혀 욕을 게워 냅니다
비워진 소주병이 놓인 플라스틱 작은 상이 휘청거립니다
마음도 다리도 휘청거리는 밤거리에서
조금씩 비워지는
잘 익은 감빛 포장마차는 한 채의 묵묵한 암자입니다
새벽이 오면
포장마차 주인은 밤새 지은 암자를 거둬냅니다
손님이나 주인 모두 하룻밤의 수행이 끝났습니다
잠을 설치며 속을 졸이던 대모산의 조바심도
가라앉기 시작합니다
거리의 암자를 가슴으로 옮기는데
속을 쓸어내리는 하룻밤이 걸렸습니다
금강경 한 페이지가 겨우 넘어갑니다.
끈
내가 건너온 강이 손등 위에 다 모여 있다
무겁다는 말도 없이 손은 잘 받아 주었다
여기까지 오느라 꽤나 수척해 있다
툭툭 튀어나온 강줄기가 순조롭지 않았는지
억세게 고단하게 보인다
허겁지겁 건너오느라 강의 성도 이름도 몰라
우두커니 쳐다보기만 하는데
뭐 이름을 알아 무엇 하냐며 손사래를 치는 것인지
퍼런 심줄 줄기가 거칠게 겉늙어 보인다
그 강의 이름을 그냥 끈이라 하자
날 놓지 못하고 기어이 내 손등까지 따라와
소리 없이 내가 건넌 세월의 줄을 홀쳐매고 있으니
자잘한 잔물결이 손등 전체에 퍼져
내가 아무리 떨쳐 버리려 해도 세월의 주름은 더 깊게
내 손을 부여잡고 있다
그 세월 손아귀 힘이 장난 아니어서 아예
잠 못 드는 밤 팔베개를 하고 그 강줄기들과 함께 흐르려 한다.
가정백반
집 앞 상가에서 가정백반을 먹는다
가정백반은 내 집에 없고
상가건물 지하 남원집에 있는데
집밥 같은 가정백반은 집 아닌 남원집에 있는데
집에는 가정이 없나
밥이 없으니 가정이 없나?
혼자 먹는 가정백반
남원집 옆 24시간 편의점에서도 파나?
꾸역꾸역 가정백반을 넘기고
기웃기웃 가정으로 돌아가는데
대모산이 엄마처럼 콧물을 흘쩍이는 저녁.
자술년보
1943년(1세) 경남 거창읍에서 음력 4월 8일 태어났지만 태어난 집의 주소는 모르고 5세 때부터 거창읍 동동 780번지에서 부모님이 고향을 떠날 때까지 살았다.
1950년(8세) 초등학교 2학년에 62,5전쟁이 일어났다. 시체의 발을 밟으며 피난을 했고 우리 집 창고가 불타는 것을 언덕에서 바라보았다.
1955년(13세) 거창여중에 입학했다.
1958년(16세) 거창여고에 입학했다.
1959년(17세) 고향의 물과 바람과 작별을 하고 거창여고 2학년 봄, 부산 남성여고로 전학을 갔다. 처음으로 본 바다는 내게 많은 충격과 꿈을 키우게 했다. 그해 경남백일장에 「길」이라는 제목으로 1등을 했다.(이형기, 박재삼 선생님이 심사)
1961년(19세) 숙명여자대학교 국어국문과 입학했다.
1964년(22세) 대학 4학년 때 전봉건 선생님이 하시는 ≪여상≫에 신인 여류문학상을 받았다. 「환상의 방」이라는 작품은 대학 졸업반의 미래를 다짐하는 기회를 가지게 했다.
1965년(23세) 숙명여대 국어국문과를 졸업했다 국문과 조교로 들어갔다.
1968년(26세) 경영학을 전공하는 심현성과 결혼했다.
1969년(27세) 첫딸 태희를 출산했다.
1970년(28세) 둘째 아림이를 출산했다.
1972년(30세) ≪현대문학≫에 박목월 선생님의 추천으로 재등단을 하는 복잡한 과정을 거쳤다.
1973년(31세) 첫 시집 봉헌문자(현대문학)을 펴냈다.
1975년(33세) 셋째딸 지현이를 출산했다.
1976년(34세) 시집 겨울축제를 펴냈다.
1977년(35세) 가톨릭에 입교했다.
1978년(36세) 숙명여자대학 국문과 대학원에 입학했다
1979년(37세) 시집 고향의 물을 서문당에서 펴냈다.
1980년(38세) 숙명여자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했다.
1980년(38세) 숭실대학교 국어국문과 출강을 시작으로 숙명여대, 덕성여대, 경기대학, 수원대학 등, 10년 강사경력을 지냈다.
1983년(41세) 첫 수필집 다시 부는 바람을 여원사에서 펴냈다.
1985년(43세) 시집 모순의 방을 열음사에서 펴냈다.
1986년(44세) 전작시집 아가 1(행림출판사), 아가 2(문학사상)을 펴냈다.
1988년(46세) 시집 새를 보면서를 문학세계사에서 펴냈다.
1988년(46세) 수필집 백치 애인을 자유문학사에서 펴냈다.
1989년(47세) 시집 새를 보면서로 전 예술진흥원에서 주는 대한민국문학상을 받았다.
1990년(48세) 소설 물위를 걷는 여자를 펴냈다. 박철수 감독이 영화화 했으며 kbs에서 드라마가 되었다.
1992년(50세) 숙명여자대학교에서 문학박사를 취득했다.
1992년(50세) ebs(명강사, 명강의) 강의를 3개월 했다.
1992년(50세) 평택대학교 국어국문과 교수가 되었다.
1993년(51세) 시집 시간과의 동행을 펴냈다. sbs 중국에 사는 한족 중에 가장 성공한 사람을 만나는 프로그램 촬영을 위해 연변을 다녀 온 기행시와 평택을 주제로 한 시집이다.
1997년(55세) 평택대학교에서 명지전문대 문예창작과로 이동하였다.
1999년(57세) 시집 아버지의 빛을 펴냈다. 아버지가 88세로 돌아가시고 아버지에 대한 연작시를 썼다.
2000년(58세) 남편이 사망했다(10월 21일) 24년의 투병을 끝내다.
2001년(59세) 시집 어머니 그 삐뚤삐뚤한 글씨를 펴냈다.
2001년(59세) 어머니 삐뚤삐뚤한 글씨(문학수첩)로 시와시학상을 수상했다.
2003년(61세) 시선집 이제야 너희를 만났다(문학수첩)를 펴냈다.
2004년(62세) 시선집으로 36회 한국시인협회상을 수상하였다.
2004년(62세) 시집 오래 말하는 사이(민음사)를 펴냈다.
2004년(62세) 12회 현대불교문학상을 작품 「저 거리의 암자」로 수상했다.
2006년(64세) 숙명문학상을 수상했다.
2007년(65세) 시집 열애(민음사)를 펴냈다.
2008년(66세) 시집 열애로 제 6회 영랑문학상을 영랑의 출생지 강진군에서 수상했다.
2008년(66세) 자전적 에세이 나는 마흔에 생의 걸음마를 배웠다를 펴냈다.
2008년(66세) 한국 브라질 수교 50주년 기념으로 브라질 초청 세미나에 참석했고, 포르투갈어로 번역시집을 출간했다.
2008년(66세) 아르헨티나 한국문화원 초청 스페인 시인들과 시낭송회를 열었다.
2009년(66세) 학교정년기념 바람 멈추다 시선집 한지활판공방에서 출간했다.
2010년(68세) 이제는 문화다!(조선일보 사회통합위원회 공동주최) 사랑, 연애, 성, 가족 등에 대한 태도와 인식 변화 연구.
2010년(68세) 강연 모음집 미안해 고마워 사랑해를 문학의 문학에서 출간했다.
2011년(69세) 눈송이와 부딪쳐도 그대 상처 입으리 시가 있는 아침, 문학의 문학에서 펴냄.
2011년(69세) 에세이집 여성을 위한 인생10강(민음사) 펴냄
2011년(69세) 시선 우리시대의 시인을 찾아서 박경순 대담.
2011년(69세) 종이 시집이 민음사에서 나왔다.
2011년(69세) 종이 시집으로 21세기문학상 수상.
2011년(69세) 종이 시집으로 대산문학상 수상.
2011년(69세) 종이 시집 스페인어 번역 PAPEL 김은정 교수번역, 아르헨티나에서 시집번역 출판기념회가 있었다.
2012년(70세) 한국시인협회 회장 취임.
2012년(70세) 은관문화훈장을 받았다.
2012년(70세) 에세이집 엄마와 딸 펴냄(민음사)
2013년(71세) 10월 11일 문학번역원 시집 열애 독일본, 보쿰 행사에 김광규 시인, 이영하 작가와 함께 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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