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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특선/이정모/에스키스 외 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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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특선/이정모
에스키스 외 4편
목마르면 마디마디
뿌리를 뻗으라는
여백의 말씀 펼쳐든다
물감이 굳어도
하늘에 구름이 지나가도
가득 채워달라는 맨몸의 전언이 들린다
구시렁대는 소리 주워 담으니
입이 사라진 얼굴
안색에 대해서는 기다려야 한단다
마음의 물기는 눈만 밝히는지
팔랑개비로 도는 저 영토에는
어떤 용암이 지나간 길이 보인다
새순을 내어볼까 열매를 맺을까
오지랖이 화실을 들락거리다가
시간이 챙겨준 그늘을 얻어왔다
흉
아무도 귀담아 들을 수 없는
―저기요
꽃띠 시절 갈래머리 뒷모습에서
이미 따라붙었다
꽃모가지 뚝뚝 떨어져 쌓이는데
어긋난 칼금들이 모여서 할 말 다 하는 곳
가장 넓은 폐허는 가슴에 있다
천 날 만 날 바라만 보는 철길
눈길을 또 보태지만
만나지 않아도
한 번 진 자리는 흉이다
불 지르고 바람에 들키어가면서
처방전에 관한 이야기
제 몸의 가시인 줄 모르고
그렁그렁한 울음을 탓한다
꾸물거리다가 별이 된 정거장
이젠 테두리를 걸치고 있다
아득한 소리만 남았다
희망 콘서트
수많은 얼굴들 앞에서도 빛을 잃지 않지만
화려한 조명 뒤에서 들것을 준비하는 폭력
뿌리를 가슴에 내린 이후 아픔은 익숙해지고
삶을 붙잡고 조랑조랑 매달린 기막힌 습관
관계의 무게는
홀로 되었을 때 드러나고
고운 님은 더 이상 오지 않는다
저물녘 방에 날아와 춤추던 나방 한 마리
아침에 이부자리 옆에 숨져 있다
들려주지 않는 이야기가 사라졌다
실망이 친구로 왔다
가슴 뛰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나가는 문이 다른 피 묻은 입술
협연은 얼마나 수고로운 중독인가
꽃잎은 계속 떨어지고
나는 약속을 모르던 몽골의 옛사람을 불러내어
애매해지고 싶다
먼 곳
아무리 멀어도 가깝고
오래 되어도 어제 같은
끈끈함이 끝끝내 곁에 있을 것이다
숨소리가 깊이 빠진 이유다
눈빛이 달려 나가는 까닭이다
동해의 고도보다 머나먼
가슴까지의 거리
바람이 그러하듯
품을 줄 모르는 미인이 사는 곳
아무리 가까워도
그리운 건 먼 곳이다
이보다 더 오래된 슬픔은 없다
거들떠 보다
아무도 보지 않는 시에 밑줄을 긋고
바람의 살 속인 듯 시퍼런 말의 물결이
흘러가는 것을 본다
그림자가 웃고 있는 듯
목구멍 속에 햇볕이 가득하다
공중의 말을 빌리지만
울림을 나타내고 싶은 소리가 가득하다
아무리 구르고 부딪쳐도
요동이란 말,
물에 물탄 것이겠지만
꽃비늘로 튀고 싶은 때를
제 땀으로 말하고 싶은 것이다
잠시 얼굴을 잃어버리지만
다시 입을 찾는 한 때를
아름다운 소멸로 볼 것인가
속마음을 맞추는 주파수로 여길 것인가
안목이란 말,
물 속 바닥처럼
가라앉아야 더 잘 보인다
시작메모
오늘도 마음을 비운다
시작메모
5월에 태어나서 그런 걸까 이 세상은 언제나 꽃밭인 줄 알았는데 그 꽃은 연꽃이었고 허공을 품고 있었다. 그 시선이 너무 따가워 영축산 요사체에서 깨우침을 핑계로 시가 되는 순간을 기다린다.
1.
나는 오늘도 좋은 시를 써야 한다는 강박증을 버림으로 시작한다. 시적 만남을 확대하거나 왜곡시킬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단지 펼쳐놓은 감각의 거미줄에 걸린 비의를 자연스럽고 노련하게 잡기 위하여.
2.
내일은 숙명처럼 처절한 아름다움을 만나고 싶은 주체적 시선을 위해 혈육과 같이 깊어지고 싶겠지. 각자 자기 맛을 내면서 존재의미를 가지는 양념처럼 언어의 색깔을 내고 싶기도 할 거야.
3.
또한 삶의 작은 소리에 귀 기울이며 존재가치를 발견하는 경전 같은 의미의 시를 이끌어내고 싶을 것이다. 죽음이 작업을 중단시키기까지 이름만이 아닌 나만의 고유한 형식을 가지고 실험정신을 구현하며 몰입과 집중의 통찰력이 있다면 기꺼이 고독을 수용할 것이다.
4.
종교와 사상, 학문의 울타리를 과감히 뛰어넘어 저 하늘의 구름처럼 흐르고 볼 수 있는 날까지 인간과 자연을 이해하고 사랑하고파 오늘도 마음을 비운다. 좋은 시인이 되겠다는 욕망을 버린다.
5.
결국, 내가 이승에서 시를 쓰는 까닭은 깊어진 병을 극복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당당히 마주하고 싶은 까닭이다.
이정모∙2007년 ≪심상≫으로 등단. 시집 제 몸이 통로다. 부산작가회의 감사. 한국문협, 부산시인협회 회원. <젊은 시인들> 웹진 동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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