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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특선/정미소/자서전 외 6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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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특선/정미소
자서전 외 6편
나는 징이다. 바람이 와서 툭 툭 칠 때마다 펄 펄 끓던 불가마가 생각난다. 온몸이 쇳물로 녹여지며, 벌겋게 달아오르는 고열과 옹고집이 쇠망치로 펑 펑 매질을 당했다. 산다는 건, 바데기에 한 뜸 한 뜸 불 담금질을 견디는 거였다. 내 안의 울음 깨기였다. 더는 견딜 수 없었던 어느 날, 가슴 저 밑바닥에서 옹이로 박힌 울음주머니가 부종처럼 부어올라 징 징 징 쇠 울음소리를 내었다. 가슴이 돋움질치며 유장한 소리와 소리의 파장이 일었다. 사투리와 사투리로 뒤섞이는 사람들 틈에서 자주 모가 났던 내가,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큰 울림통이 되었다니. 산다는 건 불가마 속이어도 견디고 볼 일이다. 쓰레기 산에서도 꽃은 피고, 절망의 그늘에도 온기로 다가오는 햇살. 오늘, 녹청꽃 피어도 좋은 내 몸에게 고마워. 고맙다고 말했다.
그리운 것은 먼 하늘 끝에 닿아서
이중섭의 생가 담장 안을 기웃거리다가 황토 흙마당 겨울 나뭇가지가 그려놓은 선묘화를 보네. 선과 선이 어우러져 뒹구는 곡선의 끝자락에 가족이 수런거리네. 뽀얗게 젖살 오른 개구쟁이들이 흙마당을 달음박질치네. 물구나무 서네. 툇마루에 걸터앉아 담배연기 내뿜는 애비 함박웃음 터뜨리네. 만성결핍이 허공에 풀어놓은 구름 한 점이 무등을 태우네. 코뚜레에 힘줄 잔뜩 불거지네. 선묘화가 사라지는 저녁하늘의 먼 소실점이 빈혈처럼 아른거리네.
열정
피아니스트인 그녀가 암에 걸렸다. 유방암이다. 암과 함께 사십 년을 부유하던 그녀의 음표들이 건반을 잃고 마호가니의 숲속으로 사라졌다. 절망의 나락에서 핀셋의 위력은 메트로롬보다 정교했다. 다시 건반을 춤출 수 있게 된 그녀가 독주회를 열었다. 오랜 투약과 마취에서 깨어난 라흐마니노프와 슈만이 오선의 경계를 넘어 알레그로 비바체로 라르고로 봄의 날개를 달았다. 그녀가 어둠 속에서 ‘트로이메라이’를 연주할 때 청중은 울었다.
부채춤
투명한 화병에 꽃들이 비좁은 어깨를 맞대어 웃고 있다. 가운데 까치발을 든 사루비아 세 송이, 화병의 가장자리를 빙 둘러선 팬지와 부겐벨리아, 진달래꽃, 부채춤을 추는 아이들이다. 일곱 살 여자아이들이 한복에 당의를 차려입고 재롱을 부린다. 한강수타령을 따라 깃털이 달린 부채를 접었다가 편다. 버선발을 모아 치맛자락을 한껏 부풀린다. 부채와 부채의 끝을 이어 파도타기를 한다. 화병이 술렁거린다. 부채춤의 중심에서 박자를 놓쳐 꾸중을 듣는다. 방향이 어긋나 친구와 어깨를 부딪친다. 훌쩍거리는 아이를 달래며 추는 부채춤 ‘다문화 가족 큰 잔치’의 무대가 웃는다.
박하사탕
어머니의 손때가 묻은 옷장문을 연다. 보푸라기가 하얗게 피어난 스웨터주머니에서 박하사탕이 바스락거린다. 새벽잠 깨어 약수터에 가실 때 즐겨 입으셨던 스웨터다. 어머니의 삶만큼이나 가파른 약수터의 층계를 오르시며 입안이 마를 때마다 약으로 먹었을 박하사탕이다. 어머니의 유품인 박하사탕을 입속에 넣는다. 입안이 환하다.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린다. 고통과 궁핍은 몰려다닌다. 하늘이 큰 사람 만들려고 주는 선물이니 궁할수록 맛있어라. 박하사탕 한 알 오래도록 녹인다.
우도에서
검멀레 해안을 걷는다.
돌칸이밭에 노랗게 핀 유채
양은도시락 속에 피어난 좁쌀밥이다.
노랗게 핀 꽃밥 한 술 입 안 가득 떠 넣으면
물새의 발자국들이
바다로, 바다의 노래로 철썩인다.
꽃밥 한 술로 해종일 운동장을 끼룩거리며
수평선 너머의 흰 뭉게구름
돛대로 피워 올리던 점심시간
돌칸이밭에서 달그락 달그락
숟가락 소리가 난다.
꽃씨 여무는 소리가 난다.
그 울음소리 들리는 저녁
회화나무 둔덕을 오른다. 산비탈에 몸이 유난히도 휘어진 나무 한 그루가 뿌리를 허옇게 드러내었다. 등줄기에 애주름 버섯이 송아리송아리 맺혔다. 어머니의 등에 업힌 애기다. 손아귀에 힘을 모아 쥔다. 어머니 등에 부생하는 애주름 버섯을 덩어리채 떼어낸다. 홍역으로 열꽃을 피워 올리던 아기가 갓대를 늘어뜨린다. 종 모양이 된 콧잔등이 희디희다. 손아귀에 움켜 쥔 애주름버섯을 포대기채 구덩이에 묻는다. 회화나무 둔덕으로 어머니의 울음소리가 내려온다. 굽은 등줄기에 흥건한 저녁노을이 밀려온다. 애장터에 돋아난 산나리꽃빛이다.
시작메모
느리게, 혹은 빠르게
필립로스의 「울분」을 읽는다. 주인공인 마커스는 좀 더 열정적인 삶을 추구한다. 하지만 그의 주변에 놓인 상황은 그를 간섭한다. 자유롭게 놓아두지 않는다. 청춘의 격정과 분노가 끊임없이 갈등한다. 그는 세상이 마음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했을 때 담담하게 말한다. 최악의 선택마저 맞서 이겨낼 수 있는 긴 호흡을 갖자.
배신과 상처와 집착과 억압의 터널을 빠져나와 시를 만났다. 기회의 땅이다. 느리게, 혹은 빠르게. 시에게 상처받고 시로써 치유하는 즐거운 여정이다.
정미소∙2011년 ≪문학과창작≫으로 등단. 막비시동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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