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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시/고창수, 정승열, 윤승천, 장종권, 신현수, 최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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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시
고창수
매미 외 1편
―禪詩 연습․1
내가 라면을 끓여먹는 아침
창문 밖 덩치 큰 매미 한 마리
우주의 내막을 한 움큼 쏟아놓고 가는구나.
이렇게 쉬운 이치라니!
시간
―禪詩 연습․2
칼집 안에 칼이 있듯 시간은 있다.
칼집 안에 칼이 없듯 시간은 없다.
우리의 애간장을 태우는 시간과
한 여름 나뭇잎을 황홀하게 흔드는 시간은
같지만 다르다.
있는 것과 없는 것을 이어주는 시간을
모두 내려놓으면
한 겨울 따오기 운다.
고창수∙1966년 ≪시문학≫으로 등단. 시집 파편 줍는 노래, 산보로, 몇 가지 풍경, 원효를 찾아, 소리와 고요 사이.
정승열
고드름 외 1편
사랑을 잃은 얼굴들끼리
기억의 처마 밑에 주르륵 매달려
뒤집어 세상을 들여다보는 눈망울
세상 사람들이
아무렇게나
쓰다버린 사랑을
켜켜이 모아둔
추억의 도서관
간혹 찬바람이 살갗을 깎으며
사연들을 거두어 가면
거두어 가는대로 기꺼이 허공으로 사라져 버리는,
아무리 헤집고 들여다보려 해도
흔적을 보여주지 않고 사라지는
눈망울들
동체同體 되기
몸 밖으로 새어나가는 살의殺意를
최대한 줄여야 한다.
매화나무를 찾은 박새 부부가 의심 없이
다가서게 하려면
나무처럼 서서 바람에 살랑살랑
옷자락이 흔들리게 두어야 한다.
몸속에 맴도는 사냥이란 본능이
완전히 사그러들 때까지
애증愛憎도
호흡도
가다듬고.
정승열∙1947년 인천 출생. 1979년 ≪시문학≫으로 등단. 시집 새가 날개를 퍼덕여도 숲은 공간을 주지 않았다, 단풍, 단풍2. 인천시문화상 수상. 삼산중학교 교장 역임. 현재 인천문인협회 회장.
윤승천
내 청춘의 어느 하루 외 1편
―석주石柱
“잊을거라 했고
잊을 수 있겠다 했다”
잊을만하면 기억의 문을 열고
아닌 듯 지나가고
애써 괜찮다싶으면
충성을 확인하듯
밟고 가는구나
그렇다고 머물 것도 아니면서
놓아주지도 않는다
멀고 먼 이별이 아니라
시간은 레일처럼 이어져 있고
언제라도 번개처럼 올 수 있다고
잊을만하면
여전히 발 아래 무릎을 꿇도록
물어뜯다만 하늘 한쪽의 이빨자국을
슬쩍 스치게 하는구나.
내 청춘의 어느 하루
―카페 Question
천 일쯤은
단 하루도
육신이 편한 날이 없구나
울지도 못하고
울 수조차 없었다
어디에도 출구는 없었고
으, 불치의 통음慟音만
어쩌겠니
이제 너에게 줄 수 있는 것이라곤
그나마 온전치도 못한
목숨뿐이구나
그것이라도 원한다면
거두어가라고 하고 싶지만
용기는커녕
그런 허세조차도 없다.
윤승천∙ 경북 예천 출생. 1984년 ≪문예중앙≫으로 등단. 시집 안 읽히는 시를 위하여, 탱자나무 울타리, 김과장과 이대리, 한어동閑漁洞.
장종권
그믐달과 발톱 외 1편
그가 카톡에 그믐달을 그려보냈다.
나는 그에게 자른 발톱을 찍어 보냈다.
시골길
어두운 시골길이다.
인적도 없는 외길이다.
앞서 가는 버스를 따라간다.
도무지 앞서갈 수 없는,
속도도 마음대로 낼 수 없는,
한밤, 멀고 먼,
외줄기 시골길
터덜터덜 그냥 따라간다.
아무런 꿈도 꿀 수 없다.
어떤 혁명도 도모할 수 없다.
느림보 걸음으로 뒤뚱거리며 가고 있는
저 거대한 낡은 버스.
장종권∙ 1985년 ≪현대시학≫ 추천완료. 시집 꽃이 그냥 꽃인 날에, 호박꽃나라 외. 인천문학상, 성균문학상 수상. 계간 리토피아 주간.
신현수
인천에 살기 위하여 외 1편
플레이 캠퍼스 장한섬의 안내를 받아
중구 동구 투어를
인천역에서 시작하는데
동인천역은 인천의 서쪽에 있고,
제물포역은 항구와 아무런 관련이 없고,
도원역은 일제강점기
근처에 있던 일본인 농장의 이름이고,
새로 생긴 수인선 송도역에 내리면
그곳은 송도가 아니니,
참 바꿀 일 많은 인천이다.
신포시장으로 들어가니
2대째 떡 장사를 하고 있는
이종복 아우가 보고 싶은데
갑자기 떡집을 아들에게 물려줄려나 궁금하고,
까까머리 고등학교 시절
시골 부평에서
도시 인천까지
화려한 외출을 감행하여
손바닥보다 더 큰 튀김을 먹던 생각이 나고,
목구멍으로 후루룩 넘어가던 우무 생각이 나고,
눈물 나게 맵던 쫄면이 생각나고,
신포시장 안의 칼국수 골목은
한때 인천의 학생들이 모두 몰려들던 골목이었지만
이제 딱 두 집 남아 있고,
차이나타운으로 가서
짜장면 박물관에 들렀다가
옛날에 배를 대던 골목으로 내려가니,
아, 차이나타운이 옛날에는 배를 대던 바닷가였지,
그래서 차이나타운에 밴댕이 횟집이 많은 거지.
김구 선생이 옥살이를 하던 곳
인천감리서 터로 가니
감리서 터는 말할 것도 없고
곽낙원 여사가 머물며 아들 밥 해주던 집도
아무런 흔적도 없이 싹 밀어버린 일이 못내 아쉽고,
답동 성당에 올라갔다가
답동의 답은 ‘논답자’일 텐데
왜 언덕 꼭대기 동네이름을 답동이라고 했을까 궁금하고,
경동목욕탕을 지나갔는데
요금이 3천원이라.
아니 목욕탕 요금이 3천원이라니
인천에 아직도 이런 착한 곳이 남아 있다니 고맙고,
내리는 비도 피할 겸
애관극장에 들어가 오줌을 싸다 생각하니
맞다, 40년 전에 엑소시스트 보다가
너무 역겨워
나와서 그만 먹은 것 다 토했던 바로 그 화장실이다.
아, 벌써 40년 전 일이다.
그런데 그 시절 그 극장이
아직도 이름도 안 바뀐 채로
남아 있을 수 있다니,
참으로 고맙고 고마운 애관극장을 관통해
신신예식장으로 올라가니
아니 효인요양병원으로
언제 바뀌었지?
신신예식장은
제고 그룹사운드 레인보우 형들이 공연했던 곳,
이제 예식장 이름은
주차장 이름에만 남아 있고
요즘 젊은이들은 결혼을 안 하거나 못하는데
노인들의 수명은 날로 길어지니
예식장이 요양원으로 바뀐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고
혹시 지금 요양원 계신 분 중에
신신예식장에서 결혼한 분은 없나?
다소 엉뚱한 궁금증이 들고,
용우물로 내려가니
용우물 주변이 작은 공원으로 바뀌었는데
우현 고유섭 선생을 기리는 비석을 세워 놓았고
동인천역 앞 도로 이름도 우현로이니
관에서 잘하는 일도 더러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고,
대학시절 다니던
호프집 마음과 마음, 하이델베르크는 아직도 정정하고,
친구와 다니던 음악감상실 자리는
어디인지 잘 모르겠고,
동인천역은 도대체 언제 해결되려는지
볼 때마다 열통 터지고
내년이 아시안게임이라는데
그때까지라도 해결의 실마리가 풀렸으면 좋겠지만
아마도 어려울 것 같고,
대한서림 1, 2층은
결국 프랜차이즈 제과점에 밀려
3층으로 쫓겨 올려갔고,
동인천 학생문화회관이
왜 이곳에 세워지게 됐는지를 알리는
추모비와 안내판은
꼭 그렇게 후미진 곳에 숨겨놓아야 했는지 모르겠고,
인현동 화재참사로
꽃다운 청소년 무려 52명이
불에 타거나 연기에 질식해 숨졌던 게
1999년 10월이니
벌써 14년 전 일이고,
아직도 그날의 참사를 잊지 못하는
친구들이 갖다놓은 꽃다발만
추적추적 내리는 비에 젖고 있었고,
참 멋대가리 없이 만들어 놓은 동인천 북부역사를 빠져나와
중앙시장으로 가니
그렇구나, 아 옛날에 결혼반지를 맞췄던 시장이구나,
중앙시장 옆 양키시장에는
물건을 팔려고 나왔는지
사람 구경을 하려고 나왔는지 모를
할머니들이 석고처럼 앉아 있는데
양키시장은 다시 살아날 수 있을까
여전히 방치된 오성극장 자리를 지나
미림극장으로 가니
최근 실버전용극장으로 다시 태어나 다행인데
좌석안내도를 보니 좌석이 이층이다.
그래 맞아, 옛날에는 극장이 이층이었지?
자이언트, 로마의 휴일, 아, 다시 보고 싶은 영화
‘나비 날다’ 책방을 지나
배다리사진관으로 올라가니
사진가 이영욱 선생이 이상봉 관장과 인사를 시켜줬고
배다리 터줏대감
아벨서점의 곽현숙 선생은
무슨 일이 됐든
일 안 하고 있는 모습을 본 적이 없고
스페이스 빔은
원래는 소성주를 만들던 양조장 자리
민운기 아우가 구월동에서 짐을 싸들고
이곳으로 이사 왔는데
민운기 아우의 스페이스 빔이 있어
이제 배다리는 더 이상 빈공간이 아닌데
빔은 비운다는 뜻이니
비움으로 채운다?
뭔가 심오한 역설이 있는 듯하고
비도 오는데 너무 한꺼번에 많은 곳을 다녔지만
알아야 사랑하는 거지,
계속, 인천에 살기 위하여
희미한 옛 세월의 그림자․8
―신촌성결교회
우리가 초등학생이었던
크리스마스이브에
친구들은 동방박사 세 사람이 나오는 연극을 했고,
난 나보다 더 큰
기타를 메고
장막을 거둬라 너의 좁은 눈으로
빠빠빠빠 사랑의 진실을 노래했고
고등학교 누나들은 내 노래에 환호했고
내 얼굴을 막 만졌고
공연이 끝난 후
함께 노래한 교회 형의 오버자락 속에 들어가
새벽길을 걸어
집집마다 새벽송을 돌았고
교회에서 돌아온 새벽
그토록 갖고 싶었던 세이버 스케이트가
방안에 놓여 있었고
우리가 중고생이 되었을 때
우리는 교회 지하 베다니실에 모여
찬송가를 불렀고
가을이면 ‘갈꽃의 속삭임’ 문화제에 쓸 시화를
산에서 주워온 낙엽 위에 그렸고
누가 누구를 좋아한다는 소문이 떠돌기 시작했고.
신현수∙1959년 충북 청원 출생. ≪시와 의식≫으로 등단. 시집 서산가는 길, 처음처럼, 이미혜, 군자산의 약속, 시간은 사랑이 지나가게 한다더니, 신현수 시집(1989-2004), 나는 좌파가 아니다 등. 저서 선생님과 함께 읽는 한용운, 시로 만나는 한국현대사, 시로 쓰는 한국근대사 1, 2 등. 현재 인천 부광고 교사.
최일화
시간의 빛깔 외 1편
나무마다 제 빛깔로 물들고 있다
밤나무는 밤나무의 빛깔로
떡갈나무는 떡갈나무의 빛깔로
젊어선 나의 빛깔도 온통 푸른빛이었을까
목련꽃 같던 첫사랑도
삼십여 년 몸 담아온 일터도
온통 꽃과 매미와 누룽지만 같던 고향마을도
모두 제 빛깔로 물들고 있다
늙는다는 건 제 빛깔로 익어가는 것
장미꽃 같던 정열도 갈빛으로 물들고
농부는 흙의 빛깔로
시인은 시인의 빛깔로 익어가는 아침
사랑과 미움, 만남과 헤어짐
달콤한 유혹과 쓰디쓴 배반까지도
초등학교 친구들의 보리싹 같던 사투리도
입동 무렵의 빛깔로 물들어 가고 있다
최일화∙1986년 무크지 ≪現場文學≫으로 등단. 시집 시간의 빛깔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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