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작품(전체)
신작시/김효선, 박영석, 최명진, 김수자, 고우란, 박혜연, 안성덕, 우동식
페이지 정보

본문
신작시
김효선
모든 것이 개밥에 밀렸다 외 1편
줄줄 산을 타고 내려오는
붉어서 더 이상 나무가 아닌 것들,
먼 데 있는 자식이 그리워
머리가 하얘지는데도
다
개밥에 밀렸다.
자식이 개밥에 밀리고,
단풍구경이 개밥에 밀리고,
손녀가 사준다는 돈가스도 밀렸다.
아버지가 골목에 들어서기 무섭게
두 발로 담벼락을 짚고 컹컹 짖어대는,
아버지가 집에 돌아오지 않을 땐 종일
밥도 굶는다는,
반 사람이라서 사람 말을
귀신 같이 알아듣는다는
저 혼자 해피한 해피.
아버지 키만한 해피가
붉어서 더 이상 붉을 것 없는
찬란한 가을조차 개밥에 밀렸다.
유전자도 알 수 없는 개밥에
모든 것이 밀렸다.
네 눈썹을 밀어줘
인내하라 고뇌하라 거룩한 숭고한 절제미 예술적 승화로 무념무상하라 목표의식 변화와 도전 이노베이션 분노 혁명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기호가 없는 삶이다. 초승달이 뜰 때까지 버벅 벅벅 남의 다리를 긁어대며 비굴하도록 달콤하게 내버려둘 테다.
막걸리에 파전만 있으면 고래고래 세상이 뭐 이러냐고 사랑 같은 건 되져버리라고. 실눈 같은 초승달이 다 없어져 새벽이면 또 다른 생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창문으로 뛰어내리는 고양이야. 흰머리 나는 속도는 빨라지고, 껌 씹는 하루만큼 지루한 여자를 알고 있니.
어떤 계절, 흔들리는 것들은 모두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그렇게 재미있는 놀이를 너만 할 수는 없잖아. 어둠이 비문이듯 비문이 상처이듯 투명한 것은 외로운 법이다. 네가 떠났을 때 나는 이미 네 눈썹을 밀었다. 초승달 안에서 그 긴 침묵의 살들이 투두둑 떨어져 내리는 것은, 박복하고 박복한 어디에도 없는 불면.
김효선∙2004년 ≪리토피아≫로 등단. 시집 서른다섯 개의 삐걱거.
박영석
나는 왜 그때 그 사거리에 외 1편
마흔다섯 개의 야쿠르트와 청양고추 한 근 도토리묵 두 개를 들고
서 있었을까 그 사거리에
그때 건너편 은행나무 가로수는 미동도 없고
그 그늘에서 선글라스 낀 여자가 양파를 팔고 있을 때
한 여자아이가 제 키만한 강아지풀을 들고 깡충거릴 때
젊은 아버지가 아이의 손목을 잡고 왜 그곳을 지나갔을까
오늘 공부할 내용은 보르헤스 2권이라는 문자를 받고 시계를 보았을 때
시간은 왜 오전 11시 23분이었을까
해는 중천에 있고 구름은 해를 둘러싸고
나는 허겁지겁 마을버스를 타려고 11시 24분 쪽으로 걸어가는데
하늘은 빙글빙글 돌고 나는 왜 속이 메스꺼웠을까
흰나비 한 마리 버스 안으로 들어와
유리창에 수도 없이 머리를 쥐어박고 있을 때
마을버스는 다음 정거장이 금빛공원이라고 멘트 하는데
은행잎이 노랗게 물든 금빛공원
내리는 사람 아무도 없는 금빛공원
그런데 나는 어디서 내려야 하는 것일까
광시곡
추운 날 우리는 강의실에서 수업을 받으며
핏줄과 모성과 난자를 파는 여자들에 대해 얘기를 나누었다
주소가 없는 간난쟁이 버리는 곳에 대하여도 이야기했다
아무리 생년월일과 이름 따위를 손에 꼭 쥐어준다 해도
아이를 버리는 것은 또 한 번 죽이는 일이라고 성토했다
그때 누가 소리쳤다
(야! 첫 눈이다)
십 오층 강의실의 눈들이 한꺼번에 창밖으로 날아갔다
허공 가득 눈이 내린다
광풍에 떠밀려 좌로 우로 미친 듯이 흩날린다
누가 몽롱하게 중얼 거린다
(아! 멋있다 춤추는 것 같아)
문득 잊고 있던 음악이 흘렀으리라
저마다 첫눈의 불을 지피는지 강의실이 따뜻해졌다
덕수궁 돌담길과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한 소절의 추억처럼 첫눈은 금세 멈추었다
허공은 다시 허공으로
강의실은 다시 강의실로
눈이 피운 모닥불은 안개처럼 사라졌다
핏줄이 질긴지 뜨거운지
사는 일이 지난한지 그저 그런지의 논쟁도 식었다
멀리 빌딩 사이로 장난감만한 전철이 지나간다
모든 것이 길 위의 춤사위라 해도
첫눈처럼 금세 사라지는 꽃이 또 있을까
우리는 갑자기 허기 진 사람들처럼
한사람씩 조용히 강의실을 빠져나갔다
박영석∙2004년 <동양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공이 오고 있다.
최명진
나는 쌀벌레가 되었다 외 1편
주섬주섬 벌레로 변태한 나는 아랫목에 오래 묵혀져 쌀을 갉아먹었다 그게 나의 사명인 것처럼 어느 날 벽지의 같은 무늬를 다시 또 기어오르거나 설거지통 무지개물방울 위에 죽은 듯이 떠있거나 종이의 낱장 사이에서 잠이 들었다 나는 그래 뒤집혀도 버둥대진 말아야지 때로는 동굴처럼도 살아야지 꼭, 그렇게만 생각한 건 아니지만 너무 깊숙이 코를 처박고 보면 내가 쌀인지 쌀이 나인지 아리송하긴 하였다 세상이 그토록 밝아서 나는 눈이 부셨다 한데 나의 동굴 속 이 아늑함을 누가 알까, 라는 생각은 꼬리를 물어 이런 게 누군가에게는 조금이나마 위안거리가 될까, 라고 다시 생각이 들면 나와는 다른 종자인 쥐며느리는 뻣뻣할 법한 자기 몸을 둥글게 말 줄도 알고 찬 새벽의 곱등이네는 떨어져나간 뒷다리의 슬픔쯤은 아무렇지 않게 흘린 과자부스러기며 살비듬 주위에 모여 행복을 느끼는 것이다 나는 그토록 게으름을 지향하는 곤충이지만 이 게으름도 이제 하루하루 복제되어 온 집안에 꽉 차버린 것도 같다 어쩌다 폴리에틸렌 같은 검은 막이 걷히기라도 하면 나는 바구미바구미 느리게 흩어질 것이었다
엄마의 애인
엄마가 잔다
새근새근 잘도 잔다
둥글게 뭉쳐진 곰 같다
누워진 항아리 같기도 하다
청춘을 다 하혈하고 난 뒤에
더 이상 연애도 시시해져서
배를 벅벅 긁어대는 게으른 심보 같다
그렇게 오래 곤히 숙녀가 앓고 있다
사진 속 엄마가 웃는다
건강한 이십대의 치아로
젊은 그녀의 애인을 부끄럽게 응시하며
때론 윙크도 서슴지 않을 것처럼
변심과 버림이 있었고
시련이 있었고
그 속에서 외떡잎처럼 내가 자랐다
엄마가 잔다
엄마는 많이 늙어있다
엄마가 부끄러워졌다
습관적으로 악착같은 나날이다
누군가를 서슴없이 험담하고
나와 매번 싸운다
우리는 한동안 따로국밥처럼 남남이다
엄마가 잔다
어쩌면, 자는 척한다
여전히 토라져 있다
자식은 자식의 어둔 방에서
엄마는 엄마의 어둔 방에서
하지만 내가 먼저 사과하지 않겠다
내가 먼저 사랑한다고 하지 않겠다
엄마가 휙 등을 돌려 잔다
귀여운 면도 있다
그녀도 나처럼 고집이 무척 세다
지금은 서로 밀고 당기는 중
최명진∙2006년 ≪리토피아≫로 등단.
김수자
억새꽃, 나 외 1편
길과 닿아있는 건물 외벽 작은 틈으로
억새풀 한포기가 뿌리를 내렸다
상추밭 오갈 때마다 종아리 스쳐
가끔 상처가 나기도 해
가위로 몇 번 베어내도
어느새 훌쩍 키를 세우곤 해
나중엔 그냥 모른 척 지나치다
해질 무렵 상추밭으로 가는데
아, 거기에 억새꽃 두 송이
막 지는 해를 업고 있었다
보란 듯이 은빛을 피운 억새
도대체 내가 무슨 짓을 한 건가
모질게 가위질 한 나는,
가위질 당한 너는,
지나온 길목마다 억새로 자라던 나를
가끔 모른 척 지나쳐온 것은 아닐까
길은 안으로 닿아 있었던 걸 몰랐다
너도 나도 꽃으로 하늘거린 하루
기러기 우체국
‘뱀처럼 아가리를 벌리고 달려드는
시간의 모가지를 비틀어 껍질을 벗겨라!’
사월의 문을 열면
그대에게 가는 길이 있을 거라 믿었습니다
봄날의 바다는 잔잔했습니다
포구가 보이는 우체국
야생화가 피어있는 계단에 앉아 편지를 씁니다
붉게 익은 보리수 열매 한 알을 입에 넣고
햇살을 받아 빛이 나는 잎새들 같은
새콤달콤한 그리움에 관하여 말하고 싶었습니다
뚝뚝 떨어져 뒹구는 붉은 동백꽃길에서는
문득 오래된 그날이 생각났습니다
생목숨 뚝뚝 떨어지던 선착장,
꽃송이가 모두 짓이겨질 때까지 이어졌던 군화발소리,
아직도 산발을 날리며 튀어 오르는 물소리들과 더불어
이야포 해변의 몽돌이야기는
남아있는 사람들의 슬픔으로 뒹굴고 있었습니다
피비린, 그날을 바다에 묻고 사는 기러기섬에도
어김없이 봄이 옵니다
안도 산길에서 이사 온 하얀 민들레도 꽃을 피웠습니다
스무이레만입니다
뿌리 잘린 아픔에 다시는 피어나지 못할까 걱정했는데
밤사이 꽃봉오리가 맺고
아침 햇살 아래 기어코 피어났군요
당신의 꽃잎들도 깃털처럼 가벼워졌으면 좋겠습니다
지나 온 시간만큼 당신의 고통이 줄어들기를 고대합니다
기러기 우체국에 다녀오는 길,
오늘도 여전히 수취인 거부로 돌아올 꽃소식 한 아름 거기에 놓고
수평선 팽팽한 바다 위로 봄의 페달을 힘껏 밟아 봅니다
김수자∙2006년 ≪문학시대≫로 등단. 갈무리문학동인.
고우란
묵란黙蘭 외 1편
평소에 말이 없는 어떤 분이 난 한 촉을 보내 오셨습니다
난은 이파리도 여린 것이라 거친 내 손끝이 살짝 스쳐만 가도 시린 비명이 쏟아질 것 같은데 수십 년 째 법화경을 모시고 사경하듯 산다는 난 같은 고운 뜻을 감히 내칠 수가 없어 내 마음의 꽃 하나 피워보마고 한 것이 화근禍根이었습니다
콩새의 눈알 같이 작은 꽃씨를 마음의 꽃밭에다 심고 뿌리를 내릴 때까지 매순간 살핀다는 선한 바람 잘 들게 잡초를 뽑고 햇살 같이 지켜본다는 그제서야 가녀린 잎사귀를 길다랗게 내리고 꽃대를 아슬 아슬 세우고 콩새 한 마리 불러와 조요조요 듣는다는 조바심치는 나날이었습니다
난에다 처음 눈 맞추일 때는 연분처럼 가슴이 설레더니 하루 이틀 사흘이 지나면서 내 기다림에는 뽀드락지가 여기 저기 돋아나고 벌레가 스멀스멀 함부로 기어 다니고 상사충에 물려 내 몸까지 온통 열꽃으로 뒤덮히다 덜컥 앓아 누워 버렸습니다
해서 내 난에 대한 이야기가 시름시름 시들어가고 난을 밖에 내놨다 안에 들였다 들었다 놨다 들다 놓다하던 중에 난이 안 보여 내겐 눈이 없어 창가에 스며든 바람결에 이파리 떨리는 소리도 아니 들려오고 내겐 귀가 없다 차마 내겐 그 은근히 다가오는 몸살나게 다가오는 난의 향기를 맡을 코, 그것까지 잃어 버렸다네
그렇게 꽃 그림자가 사람 애간장을 썩이고 뼈 속까지 다 녹이고도 모자라 물처럼 흐물거리다 조요만 남겨 두고 떠나버렸다
떠나버렸다 물 같은 조요 속에 나를 담가 놓고 슬픈 나를 바라보느니
언뜻, 긴 조요 속에 누가 쭈뼛쭈뼛 다가오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누가 긴 잎사귀를 스르르 내리고 길쭉하게 모가지를 세우고 아주 작은 꽃입술로 노래하는 것 같아
가만 귀 모으는데
어디선가 휙, 바람 불어와 기가 막힌 꽃향내가 콧구멍을 뚫고 들어 와 콕, 쏘는 것이
아프다 난 한 촉 일어나신다 이 몸에 맺힌 꽃씨들이 눈을 뜬다 어떤 분의 말씀이신지 내 몸 가득 촉촉이 뿌리 내린다
화근花根이었습니다
내 늦은 생에 꽃冠
그대와 나 사이에 어느덧 봄이 달아나버렸다
틈을 메우려는데 꽃이 꺼져버렸다 낙장불퇴의 시간은 참담하다
내가 노랑꽃을 그려 은행들이 줄줄이 문을 열고 내가 빨강꽃을 그려 펀드 광고카피들이 뱅글뱅글 춤을 추고 내가 파랑꽃에 연두이파리를 그려 부동산 서류뭉치가 팔딱팔딱 뛰어오르던 꽃아 꽃아
님 부르는 꽃아 고개를 쳐들라
(가던 그대가 멈칫 돌아본다)
꽃아 꽃아 예쁜 아기 꽃아 거품 물고 따라 오너라
(가던 그대가 주춤거리다 흑싸리 가지 끝에 홍띠 하나 겨우 매달았다)
그래 색으로 봄을 잡던 네 이년 고운 꽃이 내 피를 빨아 먹고 내 손톱을 뽑아 먹고 내 무르팍 관절뼈 힘줄까지 다 갉아 먹어 버렸어 이번에는 내 차례야 꽃의 뼈다귀를 가마솥에 마구마구 집어넣어 푸욱 푹 끓여 고아 먹어 버릴 테야 꽃
그래 그래서 꽃光패를 집어 던져 내 뒷심이 굵어지고 그대 가는 발밑에는 쌓였다 똥
그대는 똥을 줍다 등골이 휘고 똥을 줍다 옆구리 결려 똥을 줍다 무릎걸음 오래 걷다 똥을 줍다 짓물러 부르터진 손바닥으로 지렁이가 썰렁썰렁 길을 내며 지나가도 모르는 채 똥을 줍다 빈틈에 돌아와 기어이 내 무릎 베고 누워
벽오동 봉황의 冠을 돌려주고 있다네
고우란∙2007년 ≪리토피아≫로 등단. 시집 호랑이 발톱에 관한 제언
박혜연
비밀번호 외 1편
1.
현금인출기에서 출금버튼을 누른다.
기계가 비밀번호를 묻는다.
전화번호를 자신 있게 누르고 기다린다.
비밀번호가 틀렸습니다.
주민등록번호였나, 다시 누르고 기다린다.
비밀번호가 틀렸습니다.
숫자 하나를 빠뜨렸나, 그 번호 다시 꾹꾹 누른다.
비밀번호가 틀렸습니다.
삼진아웃에 걸린 현금인출기 앞에서
나는 내가 아니다.
나를 증명하는 숫자가 사라졌다.
나도 사라졌다.
2.
나를 이 별에 불러들인 이는
내 몸 어느 곳에 비밀번호를 숨겨 놓았다.
그 번호를 찾아내어 조심스레 누르면
첫사랑, 이별, 그리움, 눈물, 순결,
숨겨놓은 비밀들이 차곡차곡 예금 되어 있다.
비밀번호가 일치하여 내가 열리면
현금처럼 바로바로 사용되는 진짜 내가 거기에 있다.
3.
내 몸에 꾹꾹 눌러 쓴 별의 기호를 당신이 기억한다면,
딸깍, 몸이 열리고, 생생히 소통되는 내가
그 속에서 원하는 만큼 인출될 것이다.
물속의 집
물속의 집은 느리게 흐른다.
싱크대를 치우고 쇼파의 이불을 정리하고
커튼을 올려 햇살을 들이고
텅 빈 시간이 부유하듯 떠오른다.
물결이 이는 창문을 열어
아침나절 지저귀던 새를 날게 한다.
몸이 일렁인다. 여기저기서 뽀글거리는 공기,
투명한 세상은 더 투명해지기 위해
공기방울 안으로 들어오고
나는 높고 깊은 책장에 올라앉아
세상 너머 세상을 읽는다.
어떤 세상도 가볍게 들어 올리는
얇고 투명한 집,
나도, 시간도, 떠다닌다.
박혜연∙승주 출생. 2007년 ≪열린시학≫으로 등단. 전남대학교평생교육원 강사
안성덕
발자국 외 1편
웬 눈을 이리 퍼붓는담 툭툭 신발을 털며 하늘을 본다 향나무에 쌓인 눈이 제삿날 먹던 고봉 메밥 같다 포장마차에 마주앉은 두 그림자 형제처럼 닮았다
버스가 오지 않는다 걷기로 한다 장갑 없는 맨손이 시리다 가로등 불빛에 눈발이 유년의 개울가 송사리 떼처럼 몰린다 기쁘다 구주 오셨네 어디선가 찬송가가 들려온다
푹푹 발목이 빠진다 교회당에서 쥐고 와 입속에 넣어주던 형의 손때 묻은 알사탕이 혀끝에 고인다 언 손 녹여주던 입김이 아른거린다 발 시릴라 발자국을 딛어라 눈길에 앞장서줬는데
골목을 꺾어들다 말고 뒤를 돌아본다 군말 없이 발자국이 따라온다 제 몸뚱이로 꾹꾹 눌러 찍던 인감도장 같은 발자국 뚝, 영영 멈춰버린 몹쓸 형은 지금 어디쯤 가고 있을까
컹컹 개가 짖는다 눈길에 허방이나 디딜세라 누가 바짝 뒤를 밟아주나, 따라오는 발자국이 오늘따라 무겁게 찍힌다
신발
생목이 오르도록 생고구마를 깎아먹었다 방학 때면 내려오던 대학생 형, 뒤춤에 서울서 챙겨 온 선데이서울을 꽂고 기와집 머슴방에 갔다 홀아비 냄새 절며 두부 추렴 화투를 쳤다 호롱불에 콧구멍 그슬리며 메주처럼 떴다 쫄래쫄래 따라붙던 코흘리개 한사코 떼어냈다 나는 파르르 문풍지마냥 떨며 문틈으로 새어나오는 파란대문 집 정례 누님 얘기를 토막토막 주워들었다 끊겼다 이어졌다 감질나면 뒤축 꺾인 형의 구두 한 짝을 개집 앞에 던져버렸다 카악 퉤, 애먼 똥개를 걷어찼다 한 짝은 돌돌 말린 멍석 틈에 숨겨놓았었다
꽁꽁 숨겨 둔 구두도 용케 찾아 신고 오던 형
삼년 전 잃어버린 신발을 여태 못 찾았는지 돌아오지 않는다
삼천에 왜가리 한 마리
지난여름 장마통에 신발 한 짝이 떠내려갔나, 외발로 서있다
어둑어둑 돌아갈 줄 모른다
안성덕∙전북 정읍 출생. 2008년 ≪시와정신≫으로 등단. 2009년〈전북일보〉신춘문예 당선.
우동식
유리꽃 외 1편
깨져야만 피는 꽃이 있다
들이박거나 내동댕이칠 때
비로소 제 몸에 무늬를 새긴다
깨지기 전에는 몰랐다
어마어마한 꽃들이 그 안에 있었다는 것을
다이아몬드 같은 빛나는 꽃들이 꼭꼭 숨겨져 있었다는 것을
매끈매끈하고 단단한 삶이 전부라고 믿었다
늘 속을 다 들어 내놓고 싱겁게 살거나
다른 쪽은 닫아놓고 한쪽만 바라보고 산다고 생각했다
속 시원하게 한 번 드러내고 보니
송이송이 제 속의 꽃을 피워내는 것이다
부딪혀 깨어지면서 무늬 하나씩 만들고
한 송이 꽃을 피운다
자동차 유리 전문점 소파에 앉아
깨어져 꽃이 되는 나를 생각한다
얼마나 더 깨어져야 한 송이 꽃을 피울까
전심으로 부딪쳐 볼 일이다
염화미소
그 노승의 염불소리
들끓는 한 세상 잠 재울만 했다
빽빽이 둘러친 적송들도
앞 다투어 허물을 벗는 듯
불자들은 연신 한 몸이 되어
무릎을 꿇는다
부처님은 아랑곳 하지 않고
듣는 둥 마는 둥 세상 편한 자세로 누워
열반에 들기 전 인데
다솔사多率寺 적멸보궁
부처님도 쉬고 싶은 모양이다
실눈을 뜬 것인지 감은 것인지
세상을 구한 듯 조롱한 듯
야릇한 미소만 짓는다
법문을 돌아서는 찰나 면벽 하였는데,
허한 마음 눈치 채셨는지
“차茶 한 잔 들고 가시라”한다
속세의 말씀이 이곳에선 말이 될 수 있을까
그 미소와 음성이 산문을 열고 나와
차 농원 기행 내내 따라 다녔다
‘이 땅을 만났을 때 가슴이 꿍꽝꿍꽝 뛰었다’는
농장 주인께서 팽주가 되어
천天 지地 인人
마음心 세 개가 하나 되면
그게 무심이라고 차 한 잔 따른다
운주사 와불은 산등성 바위에 누워
별을 헤아리고 있을 테고
다솔사 부처님은 아직도 열반 중이신데
찻잔 안에서 나는 빛깔 곱게 웃는다
우동식∙경남 함양 출생. 2009년 ≪정신과표현≫으로 등단. 갈무리문학 동인.
- 이전글신작시/심명수, 고은산, 김인숙, 태일, 조경숙 14.08.08
- 다음글신작시/김유석, 설태수, 박병두, 장경기, 박해미, 손현숙, 이정 14.08.08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