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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시/심명수, 고은산, 김인숙, 태일, 조경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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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시
심명수
밤을 주으며 외 1편
한방의 총성이 있었다
아니 두 방 세 방의 총성이 있었다
총성은 난사에 가까웠고
과녁을 벗어난 총성들이 허공에 가득하다
간혹 주인을 잃은 탄피들이
빈집으로 나뒹군다
그러나 누구 하나
과녁을 명중시키진 못하였다
따라서 거미집은 견고했고 평화로웠다
한 때
그러했듯 나도
총성을 남발한 적 있다
입 앙 다물고 침을 가시처럼 튕기며
가시를 입 밖으로 찔러대며
아집을 쌓던,
여기 집 한 채
공허한 문장으로 남아 있다
나는 다시 빈집을 줍는다
누가 빠져나간 집, 그리움이
뒤집혀 나를 꼼짝 못하게 하고 있다
그믐달
뚜껑은 열리고 밤은 아직 발효 중이다
밤의 항아리 속이 구리다고 속단하지 말자
지문을 찍어본 사람이면 알리라
판이하게 드러나는 음과 양
나는 그 음과 양의 어두운 항아리 속에 가라앉아 있다
한 여자가 침몰된 나를 한 바가지 떠 간다
먹먹하다
공숨에서 피어나는 별들
별은 항아리 속 숨구멍
나는 무엇인가에 자꾸 익숙해지는 걸까
다시 한 여자 얼굴이 떴다
여자는 주기적으로 나를 찾아오곤 한다
지상에서 아직도 여자는 그 구간을 흐른다
여자여, 그만 뚜껑을 닫아주오
아, 나는 항아리 속에서 발효 중이다
피안을 위한 응얼짐
밤은 다시 뚜껑을 닫고
밤물결 타고 침대가 떠간다
심명수∙충남 금산 출생. 2010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당선.
백목련향 외 1편
산사에서, 오래된 감나무의
마지막 이파리, 떨어지는 소리 두엇 노승 망막에 닿는다
산사 공양주 목소리가 사금파리처럼 다가와
그의 휜 허리 등성이에 머무를 즈음,
최초의, 묵언의 붉은 외침들
그의 미간 사이에 머물고
손바닥엔 지난 몇 년의 삶이 되새김질되어
굳은살로 박혀있다
산등성이 가장 높은 곳 쪽으로
풍경 소리 몇 개 애잔하게 스친다
몇 년 동안 병마에 시달린 들풀 같은 그의 등뼈를 타고
생각 몇 모금 굽이굽이 흘러내린다
그 풍경 소리 울림을 부식시키기
시작했던, 몇 해 전부턴, 시든 꽃 같은 그의 심장,
왼쪽으로 비릿한 숨결이
쌓여 갔다
하지만 그는 얼마 전,
벼린 수술 나이프에 베인 향기가 몸에 실금을 내고
실금 속엔 난분분한 꽃잎들이 들어앉았다
잠시, 그의 숨결들, 차근차근 산사, 연못 속 연꽃 잎 위에
백목련 향처럼 쌓인다
그의 눈에 닿는 붉은 소리들,
자취를 감춘다
은하수빛 문장들, 어둑어둑 두께를 한 장 한 장 포개며
은은한 밥의 향기를 담은
은수저 동선 따라
그의, 미각의 파고는
지금, 정점으로 치닫고 있다
자비慈悲
일몰의 호른빛 냄새가 축축하게 스미는 시간,
어느 화가의 방랑처럼 유연했던 한 농부의
집을 향한 발자국이
땅 위에 오래된 완행버스 같은
노고를, 각인시키며 항상 지향했던 방향으로 향한다
잠깐, 生의 지향하는 방향성을 사유한다, 그건, 가끔은
부패한 통조림으로
가도 가도 끝이 없는 국경선으로
혹은 혹한의 시베리아처럼
또는 ……처럼
누군가를 견인한다
그 견인의 한 방향을 닮은
그의 발자국엔 한 겨울 언 땅 삽질 같은 활기가 찍힌다
그 활기의 내부로
지난 잔상이 빼곡이 들어있다
그의
현재의
시공간 혈투들은
부식된 놋쇠잔이다
오랫동안 큰 아들의 동맥 혈류처럼 운영되던
상가의 매장 유리에
임대 문의라는 글자가 붙은 뒤로
그의 굵은 잔뼈 구부러지는 소리, 확장되어 갔다
그 소리의, 확대의, 팽배들은
선인장 가시의 합창이다
그의 보폭 전진 맞은편으로
작은 아들이 다가온다
작은 아들, 굵은 톤의
푸른 이온수 같은 소리,
“제가 돕겠습니다”
기실, 작은 아들의 혀는 자비慈悲가 가득해서
혀가 풀어놓는 문장들은
늘 잘 익은 포도송이 같았고
단단한 근육의 말들로 가득했다
오늘, 단단한 근육 하나를
입 밖으로 흘린 것이다
사위가 별빛 아래 어두워진다
눈 앞,
그의 집 굴뚝에선 연기가 달빛과 안단테로 혼합된다
고은산∙2010년 ≪리토피아≫로 등단. 시집 말이 은도금되다, 버팀목의 칸탄도.
김인숙
배설의 기억 외 1편
남자의 생각이 골똘하다
아내의 바가지 소리 귓등으로 흘리며
눈 감은 채 잠 깨
핸드폰 기록과 기억 몇 조각으로
간밤을 꿰맞추고 있다
어제의 출항은 풍랑이 깊어
아직도 머리 한 쪽은 지끈거리고 있다
때를 못 만났다는 울분 댓 잔
맥줏집 마담과 섞은 농 몇 병쯤
알아도 모른다 하리라
밤새 흔들리던 그림자는
골목 반대쪽으로 몰려간 바람에 쓸리며
절레절레 고개 젓고 있으리라
남자가 어제를 채 갈아입지 못한 채
다시 출항을 준비한다
겨우 간밤을 복기한 습관처럼
남자를 태우고 왔던 조각배 두 짝이
현관에 아무렇게나 정박해 있다
남자가 닻을 올린다 아내 눈을 피해
쏟아버린 기억을 기억하고 있는
조각배를 돌려 바다로 간다
어깨가 어제보다 가벼워 보인다
연등
미륵사 앞마당에 둥둥
연꽃이 피어 있다
고추 모 심다말고 오신다는 할머니,
초파일날 절에 안 오면
일 년 내내 마음에 걸린다며 들어오신다
아들 며느리 앞앞으로 연등을 켜려는데
그만 막내며느리 이름을 까먹었다고
버스 몇 번 갈아타다 잊어버렸다고
부처님처럼 웃는다
주소 좀 틀리게 적어도
영험허신 미륵불님이 다 아실 거라며
시집간 딸까지 챙기신다
당신 등은 끝내 달지 않았지만
우두둑 다리를 펴고 절마당을 나서는
할머니 머리 위로
괜찮다며 등 안 달아도 괜찮다며
연꽃이 환하게 흔들린다
김인숙∙전북 정읍 출생. 2011년 ≪문예연구≫로 등단.
김태일
오후 외 1편
저기쯤에서 아지랑이가 아른거린다.
태양이 대지에 꽃씨를 뿌리고 있다.
부신 눈들이 눈을 감고 더듬거리면
우거진 숲에서 오후가 꽃을 피운다.
휘파람 불어 날아간 새를 불러들인다.
숲의 향기에 머리감고 마음을 씻는다.
잠시 울던 새가 건너편으로 날아가면
오후가 땀 냄새를 풍기며 뒤따라간다.
거꾸로 보기
사과 속의 씨는 누구나 셀 수 있다.
씨 속의 사과는 하늘만 안다.
다리 사이로 사람들이 물구나무를 선다.
어둠이 형체와 색깔을 마신 후
밤새 거꾸로 보기가 익어간다.
빛이 한 뼘 자란 바로보기를 펼친다.
바로보기 거꾸로 보기가 반복되는 세상이다.
바로보기가 세상을 한곳으로 몰고 간다.
거꾸로 보기는 들숨날숨처럼 쉽지 않다.
보이지 않을 때마다 주저앉는다.
난생 처음으로 고개를 돌려본다.
빛이 멀뚱멀뚱 어둠을 쳐다본다.
김태일∙2013년 ≪리토피아≫로 등단. 편지문집 신라엽신. 시노래앨범 신라엽신.
조경숙
모서리 공포증 외 1편
모서리는 아프다
바라보는
그 느낌에 먼저 찔린다
날카로운 각
찔리지 않아도 찔린 듯 아리다
알듯 모를 듯 겉돌게 만드는
뾰족하고 묘한 긴장의 말,
작별을 말하지 않아도 곁에 붙어
갈 듯 말듯
마음을 더 외롭게 할 때
모서리를 바라보는 것처럼
눈에서 신음소리가 들린다
문을 뚫어져라 쳐다본다
차라리 문을 쾅 닫고 나가는 바람보다
모서리 삐걱거리는 불편은 불안하다
어디든 안으로 들어서기 전까지
두려움의 공포를 이기려면 어쨌든 찔려야 된다
치료과정이다
도대체 하늘은 어디서 저렇게 찔렸을까
비가 종일 내린다
압화壓花
한들거리던 움직임은 정지되고 바람은 이제 이곳에 없다.
하늘과 함께
납작하게 책갈피에 갇혀
핏기가 마른 얼굴
똑같은 평면의 壓花
그만의 무늬로 지난 시간을 읽는다.
목을 버린 순간
다른 이름으로 태어난 미라
한 줌의 생,
계절은 사라지고
그를 흔들던 바람은 이제 이곳에 없다.
손을 잡자 마른 비명을 지른다.
마지막 언어가 부서진다.
조경숙∙2013년 ≪시와정신≫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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