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작품(전체)
아라시조/김월준, 조종만, 정평림, 송유나, 유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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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시조
김월준
단풍 외 1편
눈부시게
물결치는
꽃바다를 보아라
사랑도
저와 같이
빛날 수가 있다면
모든 걸
다 내려놓고
그대만을 사랑하리
겨울, 봄 여름 가을
봄 여름
지나면서
가을을 생각하고
가을을
거두면서
겨울을 기다리며
눈꽃이
흐드러진 겨울
즐기면서 살다 가리
김월준∙1963년 <조선일보>, <동아일보> 신춘문예와, <자유문학>으로 등단. 시집 꽃과 바람과, 꽃도 말하네, 검은 땅 검은 꽃 등. 국제펜문학상, 현대불교문학상 수상. ≪월간문학≫ 주간 역임. 현재 국제펜 한국본부 고문.
조종만
자국 소리 외 1편
지난밤
머리맡에
사락사락 자국 소리
그 뉘가
오시는지
창문 살짝 밀쳐 보니
하이얀
화선지 깔고
별과 달이 놀더라.
신발들이 읽고 또 읽고, 지우고 또 지운다
청량산 등산길
청량산 솔밭자리 솔 그림자 깔고 앉아
눈앞에 망사 걸친 잠자리 곱게 뜨고
매미들 노랫소리가 귀 울음을 쫓는다.
중복 날 솔바람이 땀 닦아 시원스레
철따라 오가는 길 용하게 찾아 든다
감은 듯 저물도록 나도 따라 왔으니.
조종만∙경남 의령 출생 1960년 ≪영문≫, 1979년 ≪시문학≫으로 등단. 진주시조시인협회 창립 회장, 고문. ≪진주시조≫ 창간호 간행. 시집 회상의 무늬, 물이 빚은 노래, 나비와 꽃이야기.
정평림
등꽃 외 1편
제 몸뚱이
비비 틀고
등천하는 손이 있네
온종일 드높은 그늘,
세월 한쪽 꼬나쥐고
퍼렇게 꽃타래 따아
수만 꽃등 불 밝히네
흔들리는 5월 볕뉘
옛 판화만
되작이고
천야만야 벼랑 같은
이승 어느 난간에서
머흔 길 징검돌 놓고
흩어진 일화逸話를 줍네
백 원짜리 동전
한산섬
밝은 달이
동전만큼 둥글었나?
그 위에 새긴 초상
갑주조차 벗어놓고
지폐만
돈이라더냐
저금통 속에 빠진 장군!
정평림∙강원도 평창 출생, 미국 미시간대 대학원(이학박사), 2003년 ≪시조시학≫ 신인상 수상. 샘터시조상 수상(2003년), <전북중앙신문> 신춘문예 시조부문 당선(2004년), 제4회 열린시학상 수상(2012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문예창작기금 수혜(2004년), 경기문화재단 문예창작기금 수혜(2013년), 시조집 거기 산이 있었네 출간(동학사, 2005년), 시조집 메밀밭으로 오는 저녁(책만드는집, 2013년), 현재 인하대 의대 대우교수.
조성문
노르웨이고등어 외 1편
낮과 같은 북극의 밤 냉동고 녹고 있다
깍지 풀린 빙하 타고
어디로 가야 하는가
뜨겁다, 어쩌지 못해
거슬러 오른 고등어 떼
넘쳐나는 둥둥 바다
만년설 흘러들고
얼음산 주저앉아 아무래도 아수라다
시퍼런 등짐을 지던
호랑무늬 더 아리다
낮은 데 잠기고 마는
오로라 실루엣 너머
좌판에서 석쇠에서
소금 몇 알 꾹 깨물다
이역 땅 밥상머리엔 반골의 눈 치뜬다
노랑부리저어새를 저어하다
우둘투둘 바다거북의 마른 등 같은 갯골 섬이면서 섬도 아닌 섬에서 길 놓치고
환절기 밑그림에서 빠져나온 저어 저어새
릴낚시 드리우는 눈썹달 유수지에 미늘 꿀꺽 집어삼킨 쓰라린 속 어루만지다
한뎃잠 그물에 걸린 긴 외다리 아찔하다
끗발 선 개발 바람 썬 물살 우는 소리 구둣주걱 노랑부리 허리 굽혀 헤집다가
갈대밭 더벅머리 한 아재들이 그만 간다
조성문 전남 함평 출생. 2006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 21세기시조 동인
송유나
봉평, 하얀 꽃밭 외 1편
평창강가 산들머리 겨울잠은 깨어났다
솔수펑 제쳐내고 메밀들이 각질 터는
흙냄새 채 가시기 전
밀어 올리는 얼굴들
가만가만 다가서며 토담집 모퉁이 돌아
아직 의지하고 산다는 노부부를 만난다
메밀전 내놓으시며
어서 드시라, 건네는 오후
함께 살아온 지 쉰아홉 해가 되었지만
“여전히 둘뿐이여, 두 손 꼭 잡는 깊은 위로
떡가루 뿌려놓은 듯
하얀 꽃밭 걷고 싶다
동지 즈음
콧등 내놓자 바로 어는
쩍쩍 달라붙는 이른 아침
발자국 따라 쩡 울리고 거리는 찬바람 뿐
짧은 낮
서릿발 살 에는 시간,
너에게로 다가선다
송유나∙경기 화성 출생. 2008년 ≪월간문학≫으로 등단. 2003년 ≪문학저널≫ 신인상. 2004년 설록차문학상. 을지대학교 출강. 노인복지시설장.
유현주
아버지의 방 외 1편
어머니 대엿새 내 집에 계실 동안
아버지 물끄러미 빈방을 지키셨네
언제나 문이 열릴까 무료한 눈빛으로
더 있다 가시라고 소매 끝 붙들어도
아버지 외롭다고, 눈에 밟혀 안 된다고
끝끝내 잡아 빼시던 가여운 어머니여
여닫이 열자마자 사진을 쓸어보며
혼자만 댕겨와서 미안하다 되뇌는데
괜찮다, 말씀하시며 생전처럼 웃으시네
오늘 밤엔 도란도란 며칠 쌓인 이야기가
불 꺼진 방안에서 동화처럼 흐르겠네
대답이 달빛을 타고 두 가슴을 적시겠네
상족암을 지나다가
책들이 차곡차곡 가로로 쌓여있다
수억 년 바람이 적어놓은 연대기
함부로 열지 못하고 냄새만 맡아본다
빛과 어둠이 엇갈려 기록되고
여름과 겨울이 순서대로 꽂혀있다
바다의 깊이까지도 재 놓았을 서책들
사람이 보면 안 될 천기가 들었을까
한 장도 허락 않는 육중한 말씀들을
공룡이 읽고 갔는지 발자국 선명하다
유현주∙2010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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