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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소설/김서련/고요의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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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소설/김서련/고요의 순간
찻집 남자가 홍차를 가져올 때까지 그는 담배 연기를 뿜으면서 가끔 내 얼굴을 바라보았고 나는 바닥에 깔려 있는 카페트 위로 떨어지는 햇살을 바라보았다. 투명한 유리로 만든 찻잔에 가득 담겨 있는 홍차를 잠깐 바라보다가 막 마시려는 순간, 그가 내 손을 제지했다.
터키 홍차는 말이야. 슈거를 넣어야 제 맛이 나.
그는 찻잔 받침대 옆에 놓인 슈거를 홍차에 넣고는 유리막대기로 휘휘, 저었다. 홍차 속으로 하얀색 슈거가 스르르 풀어지기 시작했다. 고요한 침묵이 둘 사이에 맴돌았다.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지만 이미 많은 말을 주고받은 것만 같았다. 그를 만나러 카파도키아로 오면서 내내 생각했던 말들이 입안에서 맴돌았다. 어찌된 일인지 말들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지금까지 일어난 모든 일들을 그가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찻잔을 입술에 대고 아주 조금씩 홍차를 마셨다. 달짝지근한 맛이 혓바닥에 감돌았다.
맛이 괜찮네. 달달한 게.
마침내 나는 입을 열었다.
여긴 사람들은 다 이렇게 마셔.
그가 말했다. 다시 말이 뚝 끊어졌다. 다음엔 어떤 말을 해야 할까 고심했다. 말문을 어떻게 열어야 길고 긴 시간을 함축하는 말들을 주고받을 수 있을 것인가. 부드러운 바람이 내 얼굴을 스치며 지나갔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오래 된 나무들이 무성한 나뭇가지를 늘어뜨리고 있는 찻집 마당에는 서너 개의 테이블과 원두막, 칸칸이 만들어 놓은 방갈로가 분위기 있게 꾸며져 있었다. 그리고 화려한 색상의 카페트가 소품으로 이용되고 있었다. 의자 등받이와 햇빛 가리개, 벽걸이, 방석과 담요 등등. 원두막과 방갈로의 바닥에도 카페트가 깔려 있었다. 나뭇가지 사이로 스며 든 햇살이 카페트에 일렁거리자 기묘한 무늬가 생겼다. 그의 얼굴에도 빛과 그림자가 일렁거리면서 얼룩이 졌다. 그간의 일들이 얼룩의 틈바구니에서 머뭇거렸다.
광고 회사에 다닌다면서? 어때, 일은 할 만해?
그가 물었다. 나는 혓바닥에다 ‘아니’라는 단어를 굴렸다. 그 말을 시발점으로 그간의 일들을 며칠이고 늘어놓고 싶었다. 내가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지 구구절절 하소연하고 싶었다. 하지만 마음뿐이었다. 대신 나는 찻잔을 만지작거리면서 마당 한쪽의 테이블에 앉아 있는 주인 남자와 온 몸이 가린 검은 통치마를 입고 검은 색깔의 히잡을 머리카락이 살짝 나오게 머리에 두른 여자에게 눈길을 던졌다. 푸른 나무와 하얀색 파라솔과 투명한 햇살이 어우러져 그들은 그림 속의 인물처럼 보였다. 나는 홍차를 아주 조금 마셨다. 달달한 맛에 긴 여행에 지친 몸이 조금씩 풀리는 것 같았다. 야간 버스를 타고 오면서 한숨도 자지 못했다. 억지로라도 잠을 잘까 싶어 눈을 감고 몸을 이리저리 뒤척거렸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잠자는 것을 포기하고 창밖만 내다보았다. 눈앞에 가로놓여 있는 거대한 어둠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깊고 고요했다. 그때 어둠이 날 바라보는 눈빛으로 나는 홍차를 응시했다. 찻잔의 반 정도 남은 홍차는 투명한 붉은 빛이 감돌았다. 진하지도 연하지도 않은 빛이었다.
광고를 수주한 회사의 경쟁회사인 B회사 제품의 결점을 멘트로 넣어서 만든 광고가 대박을 터뜨렸다. 광고주의 주식은 크게 상승하고 승승장구한 반면 B회사의 주가는 곤두박질을 쳤다. B회사의 사장은 광고법 위반으로 광고주와 우리 회사를 고소했다. 재판이 진행 중에 B회사의 사장은 경영난을 극복하지 못하고 죽음을 선택했다. B회사의 한 직원이 그간에 일어난 일들을 인터넷에다 올렸고 네티즌들이 들고 일어났다. 비윤리적인 광고로 한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는 비난의 화살이 빗발치듯 쏟아졌고 여론에 떠밀려 조사를 받게 되자 사장은 그 모든 책임을 내게 떠넘겼다. 그 광고를 기획한 내가 이번 일을 책임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그 광고는 사장과 나와 팀원들이 머리를 맞대고 짜낸 기획이었다. 물론 B회사 제품의 결점을 거론한 것은 나였다. 하지만 그것을 주 멘트로 넣은 것은 사장이었다. 원래 광고라는 게 그런 것이라면서. 그러나 일이 터지자 사장은 발뺌을 했다. 애초부터 상대 약점을 잡아서 광고 기획을 한 것 자체부터가 잘못된 것이라면서 이번 일을 잘 처리하라고 말했다. 왜 내가 전부 뒤집어써야 하냐고 회사 차원에서 해결해야 하는 문제가 아니냐고 항변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사장은 일언지하에 내 말을 묵살했고 마치 내가 없는 것처럼 굴었다. 사장이 그렇게 나오자 직원들도 나를 피하기 시작했다. 수 년 동안 동고동락했던 팀들도 마찬가지였다. 친구들도 가족들도 이런저런 모임에서 나를 제외시켰고 업무적인 관계로 연락을 주고받던 사람들도 마치 그러자고 서로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일시에 내게서 등을 돌렸다. 서로 도와가면서 살아야지. 그런 말을 남발하면서 술자리에서 윈윈! 건배사를 외치던 자들이었다.
그래, 좋다. 한 번 해 보자. 나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그들이 어떻게 행동하든 말든 평소대로 회사에 출근하고 이런저런 일을 하고 퇴근했다. 어느 순간 사람들은 왜 내가 회사에 꾸역꾸역 나오는지 의아해하지도 수군거리지도 않았다. 그네들은 내가 무슨 행동을 하든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살아남기에 혈안이 되어 있는 그들의 눈엔 나는 이미 끝난 인물이었다. 바로 눈앞에 있어도 나를 보지 않았다. 아니, 그네들의 눈에 내가 보이지 않았다. 오로지 한 길만 바라보고 달려온 세월이었다. 이런 일로 회사를 그만두고 싶지 않았다. 아니, 그만 둘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이미 소문이 날 대로 나서 이직을 하고 싶어도 달리 갈 데가 없었다. 서너 군데 이력서를 내 봤지만 거절당했다. 무슨 연합 단체에서는 나를 경쟁 회사의 이미지를 훼손한 명목으로 고발까지 했고 네티즌의 비난은 쉽게 사그라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밤에는 거리를 걸었다. 걷고 또 걸었다. 딸그락딸그락, 7센티 높이의 구두 굽이 콘크리트 바닥에 부딪치는 소리가 경쾌하게 귓속으로 들려왔지만 예전과 느낌이 달랐다. 이전엔 그 소리가 듣기 좋았고 도시의 거리를 걷고 있는 내 자신이 자랑스러웠는데, 지금은 누가 들을세라 조심스럽게 걷고 일부러 컴컴한 골목길을 골라서 다니고 있었다. 갑자기 불빛들이 눈앞에서 질척거렸다. 큰 길이 나온 것이었다. 사람들이 내 곁을 지나갔다. 아무도 날 알아보지 못할 텐데도 나는 고개를 푹 숙이고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모든 사람들이 날 비난하는 것만 같았다. 마음은 점점 피폐해지고 만신창이가 됐다. 밑바닥까지 추락한 기분이었다. 심연의 밑바닥을 들여다본 것 같았다. 온몸이 아프기 시작했다. 어깨도 아프고 이도 아프고 배도 아프고 온몸이 근지러웠다. 하루는 정형외과, 하루는 치과, 그렇게 내과, 피부과도 갔다. 받아온 약이 한 뭉치였다. 꼬박꼬박 이십 분 정도 시간 간격을 둬서 약을 잘 챙겨 먹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무심코 약봉지들을 하나하나 뜯었다. 색색깔의 알약들이 소복하게 손바닥에 쌓였다. 한참 들여다보다가 한꺼번에 입안에 넣어 먹고는 출근했다. 약에 중독되었는지 온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리고 욱신거렸다. 회사 건물 근처의 약국에서 한약재로 만든 해독제를 먹고는 집으로 돌아왔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무기력증이 그동안 틈을 노리고 있던 것처럼 일시에 몰려왔다. 자다가 깨면 또 다시 잠을 청했다. 그리고 내내 생각했다. 험난하고 거대한 산처럼 내 앞에 가로놓여 있는 문제. 모든 것이 끝났음을 알 수 있었다. 다시 돌이킬 수 없고 다시 돌아갈 수도 없었다. 사람들은 서로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동시에 내 곁을 떠났다. 주위엔 아무도 없었다. 내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 어느 지점에 머물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아직 숨을 쉬고 있다는 것이었다. 아직은 몸을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이었다. 어찌됐든 당장 죽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한밤중 잠이 깬 나는 문득 최선규를 떠올렸다. 그가 터키의 카파도키아에서 열기구 조종사로 일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최근이었다. 급성심근경색으로 갑자기 죽은 대학 동창의 문상을 갔을 때였다. 누군가 카파도키아에서 열기구 조종사로 일하고 있는 그를 만났다는 거였다. 동창들은 그를 화제로 삼아 술을 마셨다. 대체 거기서 뭐하고 있는 거지. 대학 4년 내내 수석 자리를 차지했고 졸업 후 들어간 회사에서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면서 고속 승진을 하던 그가 왜 모든 것을 접었는지 모두들 의아해 했다. 그를 떠올리자 오랫동안 가슴 깊이 묻어 둔 의문이 불쑥 떠올랐다. 그는 왜 그렇게 떠났을까. 왜 내게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을까. 그날 왜 내게……. 지난날의 의문을 푸는 것이 내 일생의 숙제인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하여 무작정 달려왔다.
그런데 열기구 조종은 할 만해?
그의 근황에 대해서 물었다.
응.
언제 배웠어?
여기저기 돌아다니다가 유럽에서 일 년 정도 교육 받았어.
또 다시 침묵이 흘렀다. 직장은 왜 그만뒀는지. 가족들은 어떻게 됐는지. 이곳에 머물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 알고 싶었으나 말이 나오지 않았다. 날이 희붐하게 밝아오는 새벽 무렵, 카파도키아에 도착했을 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나도 모르게 드디어 도착했구나, 하고 중얼거렸다. 하루 낮과 밤이 걸렸을 뿐인데 며칠이나 된 듯 길게 느껴졌다. 얼마간 머물겠다는 둥 다른 데 돌아보겠다는 둥 별다른 계획도 없이 오로지 그를 만나야겠다는 일념으로 무작정 날아온 카파도키아. 공항에서 막간의 시간을 이용해서 휴대폰으로 검색한 카파도키아는 터키 중앙의 고원 지대이며 자연의 경이와 종교적 신념이 한데 어우러져 빚은 걸작이 숨겨져 있다고 했다.
호텔에 도착한 나는 짐을 풀고 길을 나섰다. 긴 여행에 몸은 피곤했지만 머릿속은 말짱했다. 집들이 대부분 돌이어서 그런지 전제척인 분위기가 차갑고 딱딱했다. 내가 떠나온 도시가 생각났다. 눈에 보이는 건 딱딱한 시멘트 건물과 도로와 차들과 무표정한 얼굴로 출퇴근하는 사람들뿐이었다. 서서히 떠오르는 태양이 토해내는 붉은빛이 조금씩 어둠을 밀어내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응회암이 풍화되어 만들어진 버섯 모양의 바위기둥들이 우후죽순 산재한 고원은 생각한 것보다 훨씬 장엄했지만 한편으로 황량했다. 그리고 누군가 만든 게 아니라 처음부터 그랬던 것처럼 조용하고 차분했다. 아무 것도 기대하지도 않는 것처럼 평온했다.
내 일생에 있어서 가장 평온한 때는 언제였을까.
돌이켜보면 한시도 편안하게 쉰 적이 없는 나날이었다. 늘 무슨 일인가를 바쁘게 하면서 살았다.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 불안했다. 광고회사에 들어가서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광고를 만드는 게 재미있었다. 내가 기획한 광고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매출을 올릴 때의 기분은 최상의 오르가슴이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한 것은 그런 성취감 때문이었다. 그랬는데, 그것이 되레 내 발목을 잡을 줄이야.
열기구 사무실에 도착했다. 의자에 앉아 있던 터키 남자가 나를 보더니 안녕하세요! 라고 비교적 발음이 정확한 한국말로 말을 걸어 왔다. 나는 버스에 같이 탄 여행객한테 배운 터키 말로 인사를 했다. 남자는 연신 싱글거리며 싸이, 강남스타일! 약간 높은 억양으로 말하고는 싸이의 춤 흉내를 냈다. 사무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도 싸이의 강남스타일이었다. 싸이가 톡톡히 국외선양을 하고 있었다. 나는 ‘최선규’라는 한국 남자가 일하고 있느냐고 서툰 영어로 물었다. 최서구! 그는 내 말을 따라하면서 엄지손가락을 치켜 올리며 예스, 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하늘을 날고 있는 열기구를 손으로 가리켰다. 남자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수십 개의 벌룬이 하늘에서 두둥실 떠다니고 있었다. 한 시간 정도 기다려야 한다는 남자의 말에 나는 넓게 펼쳐진 고원을 바라보았다. 대기소에서 준비된 음식을 먹고 있던 사람들이 막 출발하려는 미니버스를 타고 있었다. 이왕 여기까지 온 김에 열기구나 탈까, 하다가 발걸음을 돌렸다.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여기 온 것은 그를 만나러 온 것인지 놀러 온 것이 아니었다. 그를 만나기 전에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힐 필요도 있었다. 대기소에서 조금 벗어나자 여기저기 우뚝 서 있는 바위기둥 사이로 맨살을 드러낸 듯한 희고 가파른 언덕이 보였다. 그 쪽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바위에 숭숭 구멍이 뚫린 동굴집이 보였다. 기독 신자들이 마지막 휴식처로 삼은 집이라고 했던가. 산도 들판도 나무도 없는 황량한 고원의 바위에다 만든 집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오래 전, 내가 살았던 방을 떠올리게 했다.
내 나이 스무 살 때였다. 그때의 내 소원은 집을 떠나는 것이었다. 부모님은 성격차이로 밤낮으로 서로 욕설을 퍼부으면서 싸웠고 그 불똥이 걸핏하면 내게로 떨어졌다. 집이 아니면 어딜 가든 상관없었다. 하지만 이왕이면 조용한 바다가 있었으면 했다. 그리하여 지원한 대학이 바닷가를 낀 도시였다. 학교에서 약 삼십 분 걸리는 바닷가에다 방을 얻었다. 세대 수가 그리 많지 않은데다 대부분 노인들이 살고 있는 곳으로 내 방의 옆은 바로 바다였다. 창문을 열면 바다와 모래사장이 눈앞에 다가와 있었다. 여름을 빼고는 바람이 많이 불어서 문을 열어 놓으면 마른 흙과 모래가 방안으로 들어왔다. 그것 이외엔 아무런 불편함이 없었다. 처음엔 수업이 끝나면 집으로 달려오곤 하던 나는 친구들도 사귀고 시간도 보낼 겸 천문학 동아리에 들었다. 달리 흥미를 끄는 동아리가 없었지만 밤하늘의 별을 관측한다는 게 꽤 낭만적으로 보였다. 하지만 막상 들어가 보니 생각한 것과는 달랐다. 우주 전체에 관한 이론들을 공부하는 것은 지루했다. 별자리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서쪽으로 또 북극성을 중심으로 위치와 각도가 바뀌었고 계절이 바뀌면 하늘의 별자리는 완전히 새로운 것으로 바뀌었다. 시간마다 위치와 각도를 바꾸고 또 계절마다 바뀌는 별자리의 생김새와 이름들을 머릿속에서 익히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망원경으로 밤하늘의 별들을 보고 와와, 감탄사를 내뱉다가 그만 시들해졌다. 그리 재미있지가 않았다.
아무튼 천문학 동아리에서 하나 얻은 것이 있다면 최선규, 그를 만난 것이었다. 입회식 때 자기 자신을 소개하는 자리에서 어렸을 때 우주비행사가 꿈이었다고 당당하게 말하는 그가 왠지 친근하게 느껴졌지만 굳이 가까이 다가가서 말을 붙이거나 아는 척은 하지 않았다. 서너 번 동아리 모임에 참석했던 나는 언젠가부터 모임에 가는 대신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그날도 나는 동아리 모임에 참석하지 않고 학교 대문을 나서다가, 그와 정면으로 마주쳤다. 모임에 안 가고 어딜 가느냐는 그의 말에 나는 마땅한 핑계가 떠오르지 않아서 우물쭈물하다가 그냥 바람도 쐴 겸 한적한 바닷가에서 밤하늘의 별을 볼 생각이라고 말했다.
어디서나 별을 보면 되지. 안 그래?
내 말에 그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것도 참 좋은 생각이라고 말했다.
나도 같이 가고 싶은데…….
그가 약간 쑥쓰러운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뭐, 그러든지. 그런데 모임에 참석 안 해도 괜찮겠어?
나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별을 보러 간다며? 어찌하든 별을 보면 되는 거지 뭐.
그는 엄지와 검지손가락으로 원을 만들어 흔들었다.
좋아. 그럼 가자.
나는 어정쩡한 미소를 지으면서 그보다 한 발 앞서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어딜 갈 건데?
그가 허둥지둥 내 뒤를 따라오면서 말했다.
몰라. 지금부터 생각하려고.
나는 다소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럼, 동쪽 땅끝마을에 가자.
어, 거긴…….
나는 말끝을 어물거렸다. 바로 그 근처에 내 방이 있었다.
거기서 하늘을 보면 잘 보일 것 같아.
뭐. 그러자.
나는 순순하게 대답했다. 그와 마주쳤을 때부터 나는 이런 일이 일어날 거라는 걸 알고 있은 듯한 느낌이었다. 버스를 타고 가는 동안 그는 별자리에 얽힌 이야기나 성단의 종류에 대해 알기 쉽게 설명해 주었다. 그리고 가끔 가다가 농담도 곧잘 했다. 공부만 하는 샌님인 줄 알았더니 의외였다. 그의 그런 기운이 내게로 전해져 오는 것을 느꼈다. 멀리하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언젠가는 멀어질 게 뻔했지만 미리부터 겁을 내서 물리치고 싶지 않았다. 부쩍 친해진 느낌이었다. 그런데 뭐 하나 물어봐도 괜찮겠어? 그에게 말했다. 뭔데? 왜 그렇게 별에 집착해? 그가 입을 다물었다. 그럴 만한 일이라도 있어? 그냥 별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패턴이야. 그가 말했다. 그러니까 그게 뭐냐고? 잠시 망설이던 그가 입을 열었다. 한 살 터울의 형이 있었어. 나는 자주 아이들한테 놀림을 받거나 얻어맞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형이 나서서 그들을 때려줬어. 형은 동네에서도 알아주는 싸움꾼이었어. 하지만 나이가 들어가면서 나는 그런 형이 싫었어. 점점 살이 찌기 시작하더니 뚱뚱해졌어. 밤새도록 게임을 하고 아침에 자느라 학교에는 잘 가지 않았어. 제대로 집에다 돈 한 번 가져다준 적이 없는 아버지는 무슨 사업인가 한답시고 밖으로만 나돌았고 엄마는 회사에 다니느라 형한테 신경을 쓸 시간이 없었어. 어쩌면 형이 학교에 가는지 안 가는지도 몰랐을 거야. 암튼 형은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가 자연스럽게 학교를 그만두게 되었어. 그가 입을 다물었다. 그래서? 나는 뒷이야기가 궁금해서 물었지만 그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날 이후 우린 자주 만났다. 그는 아르바이트를 해서 모은 돈으로 천체 망원경을 샀다. 우리는 장비를 챙겨 불빛이 없는, 관측하기 좋은 장소를 찾으러 다녔다. 자연스럽게 별에 대한 관심도 늘었다. 제대로 알고 싶어서 관측할 때마다 스케치북에다 기록을 했다. 별자리를 다 외우고 성단과 성운 등 우주에 대해서 알면 어쩌면 우주의 일부인 내 자신에 대해서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매일 바뀌는 별자리의 위치를 스케치북에다 그렸다. 조금씩 위치를 바꾸어도 그들은 일정한 거리를 유지했다. 별들은 매일 이동했다. 따지고 보면 별뿐만 아니었다. 이 세상 모든 것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나 또한 변하고 있었다. 그 자리에 머무는 것처럼 보여도 미미하게 몸의 세포는 줄거나 늘어났고 생각들도 조금씩 달라지고 뇌의 정보량도 달라졌다.
따뜻한 홍차를 마셔서 여독이 풀렸는지 살짝 감기는 눈꺼풀을 떠서 주위를 보았다. 찻집 남자와 히잡을 쓴 여자는 여전히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달라진 풍경이 있다면 예닐곱 되어 보이는 남자애가 그들 주위를 빙빙 돌아다니고 있었다. 남자애를 바라보는 여자의 얼굴에는 엷은 미소가 번져 있었다.
한국이 그립지 않아?
가끔은…….
그가 말끝을 흐렸다.
가끔은 그립다는 거야. 뭐야.
나는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그리울 때도 있어. 하지만…….
하지만 뭐?
그의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대답 대신 의자에서 일어난 그는 찻집 남자한테로 가더니 뭐라고 말을 하면서 엷은 웃음을 얼굴에 머금었다. 잠깐 뒤 자리로 돌아온 그가 말했다. 난 이 곳이 좋아. 마음에 들어. 열기구를 타는 것도 좋고. 허공에서 내려다보는 고원도 좋고 바위들도 좋고. 난 그저 주변에 널려 있는 일 중에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잡아챈 것뿐이야. 자신의 일생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이 있다면 내겐 바로 이 순간이야.
가장 하고 싶은 일이 열기구를 조종하는 것이야?
꼭 그렇다기보다 그냥 이렇게 홍차를 마시면서 오후 시간을 보내고 싶었어. 한국에서 살 때는 제대로 차 한 잔 마실 시간도 없었거든.
나는 그를 바라보았다. 아무 말도 안하지만 그의 머릿속으로 손을 쑥 집어넣으면 뭔가가 나올 것만 같았다. 어떻게 살아왔을까. 나처럼 좌절한 것일까. 내 능력에 비해 과도하게 많았던 업무량, 하루는 동지였다가 하루는 적이 되는 동료들, 서로서로 견제하고 질투하는 사람들. 그네들이 뿜어내는 스트레스가 만연한 도시. 빌딩숲에서 들려오는 말들과 소리는 알아들을 수가 없었고. 가끔은 뭔가가 나를 옥죄어 왔다. 두려웠다. 불안했다. 그럴수록 나는 더욱더 일에만 매진했다. 일상에다 발을 붙였다. 가끔은 벗어나고 싶었지만 달리 방법을 찾지 못했다. 그것은 오히려 더욱더 일에 몰두하게 만들었다. 온몸의 신경을 예리하게 세웠다.
가끔 어떻게 지냈는지 궁금했어.
그에게 말했다.
나도.
그가 말했다. 그 순간 모든 것을 알았다. 내내 그를 생각해 왔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알 수 있었다. 그도 나를 생각해 왔다는 것을. 한순간 둘 사이에 고요한 침묵이 흘렀다. 그때 왜 그랬니. 속으로 그에게 말했다. 전력을 다해 나는 그가 무의식적으로 바라고 있을지도 모르는 말을 침묵 속으로 풀어놓았다. 내가 바라는 말이 주위에 떠다녔다.
앞으로 뭐할 생각이야?
그가 물었다. 나는 대답하지 않고 찻잔을 입에 갖다 대고 홍차를 조금씩 마시면서 바짝 마른 혓바닥을 적셨다.
당분간 여행이나 하면서 좀 쉴까 싶어.
그래, 그것도 좋은 생각이다. 가끔은 휴식이 필요한 것 같아.
그가 말했다.
그런데 궁금한 게 하나 있어.
나는 입안에 머금고 있던 말을 꺼낼 작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대로 돌아섰다간 나중에 두고두고 후회할 것만 같아서였다. 막상 말하고 보니 차곡차곡 쌓아놓은 시간의 틈에 끼어 있는 수많은 얘기 중에 무엇부터 먼저 꺼내야할지 막막했다. 나는 그의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차분하고 편안해 보였다. 지금의 나처럼, 그도 한때 나를 깊고도 질긴 눈빛으로 바라본 적이 있었다. 군대 가기 전날이었다.
우리는 바닷가에서 술을 마셨다. 하늘엔 별이 총총 박혀 있었고 칼날 같은 바람이 얼굴을 스쳐 지나갔다. 파도소리는 거칠게 밀려왔다. 술을 마시다가 말고 우리는 모래밭에 누워서 하늘을 올렸다 보았다. 그날따라 별들이 무수하게 돋아 있었다. 뭔가 뭉클한 게 가슴 깊은 곳에서 치밀어올랐지만 그것의 정체는 잘 알 수 없었다. 우리는 많은 얘기를 나누었다. 잘 기억나지 않지만 별 얘기도 했고 친구 얘기도 했고 가족 얘기도 했을 것이다. 지금에야 그리 심각한 문제가 아니지만 그 당시의 나에겐 매우 심각했던 그런 얘기들을 했을 것이다. 그즈음 나는 일생에서 매우 힘든 시기를 지나고 있는 중이었다. 부모님과 사이도 좋지 않았지만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데도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나는 부모와 극심하게 갈등하느라 주위를 돌아볼 정신적인 여유가 없었다. 서로 공감대를 느껴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데, 난 그러지 못했다.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게 어색하고 서먹해서 늘 혼자 놀았다. 아무튼 그때 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이, 하나하나의 상황들이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내 살갗에 박혀 내 몸의 일부가 되었다. 내 몸은 상처투성이었다. 그런 말을 하면 아마도 훌쩍거렸는지 모르겠다. 그가 손을 뻗어 내 어깨를 감싸 안았다. 따뜻한 기운이 전해져 왔다. 어색했다. 누군가와 피부접촉을 해 본 것은 처음이었다. 어릴 때부터 엄마의 손을 잡거나 포옹한 적도 없었다. 오래된 습관 때문이지 내 몸이 반사적으로 거부를 했다. 그는 나에게서 떨어졌다. 그날 밤, 버스를 놓쳤고 그는 내 방에서 잠을 자고 다음날 일찍 떠나기로 했다. 우리는 한 이불을 덮고 누웠으나 몸은 양 끝에다 눕혔다. 그는 내 곁에 다가오지 않았다. 내 몸은 따뜻한 느낌을 기억했고 그의 품에 안기고 싶다는 욕망에 시달렸다. 나는 밤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다. 혼미했고 모든 게 아득했다. 살풋 잠이 들었을까. 아침에 눈을 떴을 때 그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한 마디 메모도 없이. 한동안 나는 매일 일기를 썼다. 주로 그와 나에 관해서였다. 우리에게 일어난 일들의 차근차근 되새겼다. 내 안의 어떤 성향이 그를 밀어냈는지 알고 싶었다. 내 자신을 머리에서 발끝까지 분해했다. 대체 내가 누구인지 알고 싶었다. 어떤 물질들이 나를 구성하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그걸 다 하고 나면 정말 나에 대해서 잘 알 것만 같았다. 나를 잘 알게 되었다고 생각했을 때 갑자기 공허해졌다. 나에 대한 것들을 적어 놓은 노트를 보다가 그 위에 엎드려져 잠이 들었다. 한참 잠을 자다가 불쑥 눈을 떴다.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알고 있다고 생각한 것은 어쩌면 전부 허상일지도 모른다는. 대체 뭘 근거로 진짜로 본단 말인가. 한 번 그런 생각이 들자 의혹이 걷잡을 수 없이 밀려왔다.
그날 밤, 우리가 바닷가에서 본 별 말이야.
나는 문득 생각난 듯이 말을 꺼냈다.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궁금하다는 듯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푸른 낙오자라고 했던가. 별들이 많이 모여 있는데, 그 중에서 유난히 푸르게 빛나는 별 말이야. 그렇게 푸른 이유가 별이 서로 충돌하거나 두 개 별 사이에 물질이 이동함으로써 생긴 현상이라고 했잖아.
그래. 새로운 물질의 유입이 별을 가열시켜 이웃한 다른 별에 비해 더 푸르게 보이게 하는 거야. 그런데 왜?
별들의 세상이나 사람들이 살아가는 세상이나 어쩐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드네. 충돌하고 유입하고 가열하고.
그렇게 봐도 되겠지.
근데 난 충돌하는 과정에서 실패한 것 같아. 사실, 내가 기획한 광고 때문에 사람이 죽었어. 모두들 날 비난하고 성공을 위해선 어떤 짓도 마다하지 않는 인간으로 몰아세웠어. 내 주위엔 아무도 없어. 한치 앞이 보이지 않아. 무엇에 마음을 붙여서 살아야 할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 어떤 목적을 가져야할지 모르겠어. 앞으로 무슨 일을 하면서 살아야할지도. 무슨 일을 한들 그것이 내 삶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도 모르겠어.
말을 끝낼 무렵 찻집 남자가 홍차를 찻잔에다 가득 부었다. 둘 사이에 한참 동안 침묵이 감돌았다. 사위는 고요했다. 고요의 정점에 둘이 앉아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홍차 한 잔을 다 마시자 찻집 남자가 또다시 홍차를 찻잔에 부어 주었다. 홍차가 찻잔의 반 정도로 줄어들었을 때 그가 입을 열었다.
난 시간이 진실을 말해준다고 생각해.
그는 드문드문 지난 얘기들을 풀어냈다. 요약하자면 이랬다. 그는 젊은 나이에 중역이 되었고 주로 협상을 담당했다. 협상을 하다보면 때론 욕설과 폭행이 오갈 때 있고 결렬된 협상으로 막심한 피해를 입은 업체가 파산하기도 하고 그 중에 더러 자살하는 사람도 있다고 했다. 그날의 협상도 격렬했고 그 와중에 누군가 미리 준비해 온 칼을 휘두르는 바람에 중역 한 명이 중태에 빠졌다고 했다. 마무리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니 새벽 세 시였다. 그는 씻지도 않고 그대로 침대 속으로 들어가 창밖을 바라보았다. 네모난 하늘이 눈으로 들어왔다. 하늘은 검었고 빛이라곤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너무 검어서 마치 지구가 생성되기 전의 어둠 같았다. 아니, 태양도 별도 행성도 성단도 없었던 시절의 암흑 같았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깊고 깊은 암흑의 핵에서 뭔가 만들어지고 있는 것만 같았다. 무엇이 탄생할지 알 수 없던 시절의 어둠이 저러했을까. 주위는 고요했다. 너무 고요해서 점점 그의 몸이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몸의 형체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의식도 점점 사라지는 것 같았다. 없어지다. 사라지다. 보이지 않는다. 그런 단어들을 떠올렸다. 사라진 사람들, 보이지 않는 사람들, 사라진 별, 보이지 않는 별, 사라지다. 없어지다. 존재하지 않다. 그는 같은 말을 몇 번이나 반복했다. 그리고 생각했어. 언젠가는 모든 사물이 사라질 테고 조금 일찍 사라진다고 해서 뭐가 그리 미련이 남을까. 이미 사라진 것들을 떠올렸다. 결국 모든 것들은 사라지게 마련이지만 가슴 깊은 곳에서 뭔가 울컥 치밀어올랐다. 그것을 입 밖으로 내보내야할지 말아야할지 몰라서 꾹꾹 누르다가 자유롭게 흐르도록 내버려두었다. 활로를 터 주었는데도 울컥한 감정은 입안에서 머물렀다. 그는 감정조차 마음대로 발산하지 못했다.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전원 스위치를 눌렀다. 불이 켜지자 어둠이 한꺼번에 밀려갔다. 욕조에 물을 가득 받아 한 시간 동안 몸을 담그고 있다가 책상 앞에 앉았다. 그동안 일어난 일들을 생각했다.
내가 한 일들이 눈에 보였어. 중학교 때부터 경찰서를 들락거렸던 형은 나중에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키는 나쁜 짓을 했어. 그 때문에 친지들이 우리 가족을 멀리했고 부모님은 두 번 다시 형을 보지 않으려고 했어. 나 또만 마찬가지였어. 교도소를 출감한 형에게 돈을 보내준 게 다였어. 몇 번이나 만나자는 형의 전화를 받았지만 그때마다 일정이 빡빡하게 잡혀 있었어. 형이 기댈 사람은 나밖에 없었는데, 나는 제대로 돌아보지 못했어. 형의 시체가 발견된 것은 죽은 지 석 달 뒤였어. 그때까지 아무도 형을 찾지 않은 거지. 경찰의 전화를 받고 형의 집에 갔어. 재개발한다고 철거중인 동네의 지하방에서 살고 있더군. 형의 장례식을 치루고 난 뒤 한동안 그 집이 눈앞에서 사라지지 않았어. 왜 형을 멀리 했을까. 나는 두려웠던 거야. 형으로 인해 내가 구축한 세계가 무너질까봐 겁을 냈던 거야.
그는 말을 잠깐 멈추더니 담배를 꺼내 피우기 시작했다.
이렇게 사나 저렇게 사나 한 세상인데, 과연 내가 잘 살고 있는지 회의가 들었어. 내 자신을 찾고 싶었어. 모든 것을 정리했어. 때마침 아이 공부 때문에 미국에 건너간 아내도 그곳에서 세탁소를 운영하고 있는 언니의 일을 거들어주고 있었기 때문에 별 무리가 없었어. 여기저기 많이 돌아다니다가 이곳에 왔어. 열기구도 그렇지만 동굴집을 보는 순간 형의 집이 떠올랐어. 삭막하고 황페한 분위기가 어쩐지 비슷해서…….
그의 말을 듣는 동안 단 한 번도 말로 내뱉은 적이 없는 말들이 떠올랐다가 사라지곤 했다. 그와 함께 별을 관측하던 날들, 그동안 일어난 일들이 모두 아득하게 느껴졌다. 이렇게 그를 만나러 온 것도 회사에서 벌어진 일들도 아득하게 멀어져갔다. 윤곽도 희미하고 느낌도 희미했다. 어떻게 그동안 살아왔는지, 어떻게 시간들을 이동해 왔는지, 어떻게 여기까지 찾아올 생각을 했는지. 모든 것이 일순간에 사라질 수도 있다는 사실이…… 가슴이 미어질 것 같았다.
내 일생에 있어서 가장 평화로운 시절은 바로 그때인 것 같아. 너와 돌아다닐 때가 가장 행복했던 것 같아. 그런데 그때 왜 그랬어?
마침내 나는 내내 입안에 맴돌던 말을 꺼냈다.
그때 왜 말도 없이 떠났던 거야?
나는 그의 눈을 응시했다.
난 한 번도 널 떠난 적이 없어.
그가 말했다.
사랑하는 사람은 말이지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여도 사실은 바로 우리 곁에 있어. 사랑하는 사람들은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결코 멀다고 생각하지 않잖아. 바로 곁에서 밥 먹는 것, 잠자는 것, 친구 만나는 것, 고민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다고 생각해. 멀리 있어 볼 수 없어도 결코 보이지 않는 게 아니라는 것. 난 지금도 형이 내 곁에 있다고 생각해. 그처럼 나는, 너도 늘 내 곁에 있다고 생각했어. 까맣게 잊고 살 때도 말이지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했어.
<?xml:namespace prefix = v ns = "urn:schemas-microsoft-com:vml" /><?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그가 말했다. 나는 투명한 유리잔의 홍차에다 눈길을 던졌다. 그리고 다른 별에 비해 유난히 젊게 푸르게 빛나게 하는 힘에 대해서 생각했다. 다른 별과 충돌했을 때 그것을 받아들이고 가열시키는 힘은 무엇일까. 나는 과연 바닥까지 추락한 나를 끌어올릴 수 있을까. 내 앞에 놓인 거대한 산을 넘을 수 있을까. 그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문득 내 몸의 아주 깊은 곳에서 힘이 조금씩 차오르는 게 느껴졌다.
김서련∙1998년 ≪월간문학≫으로 등단. 제8회 부산소설문학상(2003), 제11회 김유정문학상(2005), 제12회 산악문학상(2006) 수상. 요산창작기금 받음(2012) 소설집 슬픈 바이러스 발간(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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