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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소설/양진채/허니문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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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백탄
댓글 0건 조회 5,483회 작성일 14-08-08 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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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소설/양진채/허니문카

 

 

여기야. 어때, 명당이지?

L의 목소리가 과장되게 높았다. 주변을 둘러보던 남편이나 아이들은 아무도 대꾸하지 않았다. L만 들떠 있었다.

아참, 삼겹살을 구워야지. 뭐니뭐니 해도 이런 데선 삼겹살 냄새를 풍겨줘야 놀러 온 기분이 나지. 백숙도 해먹어야 하고. 들고 올 땐 힘들어도 해먹을 땐 기분 좋거든. 전국에서 취사를 할 수 있는 유원지는 여기밖에 없을 걸?

L이 자랑하듯 말하며 버너 점화 손잡이를 돌렸다. 딸칵딸칵, 마른 소리만 날 뿐 점화되지 않았다. 몇 년 동안 사용해본 적이 없는 버너였다. 점화기 부근에 녹이 슬어 있었다. 휴대용 가스통을 흔들어 다시 끼우고 점화버튼을 돌렸지만 소용없었다.

큰애가 가방 속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내 L이 점화스위치를 돌리고 있을 때 불을 켰다. 냉랭하던 버너 화구에 확, 불이 붙었다. 됐다! L은 박수라도 칠 듯이 기뻐했다. L은 버너에 불이 붙자 프라이팬을 올려놓고 바쁘게 삼겹살을 굽기 시작했다. 고기가 익는 사이 밥통을 꺼내고 반찬통의 뚜껑을 열었다. 남편과 아이들이 젓가락과 숟가락을 챙겨들었다. 바닷물을 인공으로 막아 물을 채운 수영장 때문인지 떠다니는 공기가 비릿했다. 삼겹살 익는 냄새와 무지근한 비린 냄새가 섞여 더웠다. 바람은 불지 않았다.

남편은 유원지 근처에서 산 수박을 들고 오느라 지쳐 구겨진 인상을 펼 생각을 안 했다. 수박을 살 때부터 화가 나 있었다. 무조건 골라서 한 통에 만 원만 내라는 주인의 말에 L은 산더미처럼 쌓인 수박 중에 제일 큰 수박을 찾느라 눈을 부라렸다. 다 먹지도 못 할 거 적당한 거 사자는 남편의 말은 들은 척도 안 했다. 다른 수박보다 눈에 띄게 큰 수박을 가리키며 의기양양 주인에게 만 원을 내밀었다.

삼겹살 익는 냄새가 났다. L은 김치와 멸치볶음, 가지무침을 꺼내고 상추와 깻잎과 마늘, 고추장을 꺼냈다. 작은애가 상추에 삼겹살을 두 점이나 올리면서 투덜댔다.

상추가 물렀어.

남편이 나무젓가락을 가르며 중얼거렸다. L이 군데군데 검게 짓무른 상추 몇 장을 돗자리 밖으로 던졌다. L은 가지무침을 집어먹다가 인상을 찌푸렸다. 가지무침이 잘 쉬긴 해도 아침에 무쳐서 괜찮을 줄 알았다. L은 가지무침을 제 앞에 놓고 먹었다. 남편은 프라이팬 한 쪽에 신 김치를 올려놓았다. 마늘도 몇 쪽 올려놓았다. 땀이 줄줄 흘렀다. 냄새를 맡은 파리들이 윙윙거렸다. 손으로 휘저었지만 소용없었다. 닭 주변에도 피 냄새를 맡고 파리들이 몰려들었다.

내가 한 근 더 사자고 했잖아.

남편이 빈 프라이팬을 바라보고 입맛을 다셨다. 어느새 소주 한 병을 다 비우고 다른 소주병 뚜껑을 돌리고 있었다. L이 소주를 한 병만 챙겼는데 남편이 한 병 더 봉투에 넣은 모양이었다. 퍽퍽하고 질긴 삼겹살 한 근을 금방 먹어치웠다. 프라이팬에는 졸아붙은 김치 한 쪼가리밖에 없었다. L은 겨우 세 점밖에 먹지 못했다. L도 한 근 더 살 걸 그랬다고 후회를 했지만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았다. 닭 삶을 준비를 했다.

무슨 이런 데 와서 닭을 삶아먹는다고 난리야. 간단하게 삼겹살이나 구워먹으면 되지. 놀러 다녀봤어야 뭘 알지?

그런 소리 말아요. 놀러 다니지는 않았어도 평생 놀러온 사람들만 보고 살았어요. 알아도 내가 더 잘 알아요. 우린 백숙을 먹어야 해요.

L이 결연하게 말했다.

L은 식수대에 가서 닭 두 마리를 씻어 배 안에 찹쌀과 마늘을 넣어 냄비에 넣고 물을 받았다. 닭다리 한쪽이 냄비 밖으로 비어져 나왔다. 닭다리를 엇갈려 겨우 냄비 안으로 밀어 넣었다.

수박을 쪼개려고 했지만 칼이 보이지 않았다. 싱크대 위에 과도를 올려놓고 그냥 나온 것 같았다. 잘 챙긴다고 과도와 버너연료 두 통을 싱크대 위에 얌전히 올려놓고 그냥 나왔다는데 생각이 미쳤다. 요즘은 잘 챙기려고 하면 더 잊었다. 작은애가 손날을 세워 내리쳤지만 수박은 깨지지 않았다. 손날을 감싸 쥐고 흔들었다. 남편이 주먹으로 수박을 내리쳤다. 퍽 소리와 함께 수박이 쪼개졌다. 남편이 모처럼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지만 다들 깨진 수박만 바라보았다. 수박은 너무 익었는지 가운데가 비어 있었고 색도 신선해 보이지 않았다.

수박이 곯았나봐. 좀 이상한 맛이 나는데?

먼저 한 입 베어 문 큰애가 입속엣 것을 뱉으며 말했다.

그러게 꼭지가 싱싱한지도 보고, 두드려도 봐야 한다니까 무조건 큰 거만 찾더니.

남편이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L이 수박 한쪽을 들고 냄새를 맡았다.

가운데 쪽만 그런 거니까 거기만 숟가락으로 걷어내고 먹으면 돼.

엄만 맨날 그런 식이야.

큰애가 투덜거렸다. L은 그런 식이 어떤 식을 말하는 지 궁금했다. 맛이나 신선도는 보지도 않고 무조건 큰 것만 고르는 걸 말하는 건지, 뭐든지 대충 먹으려는 걸 말하는 건지, 그도 아니면 또 다른 어떤 식이 있는 건지 L은 묻지 않았다. 그런 사소한 걸로 나들이를 망치고 싶지 않았다.

닭이 든 냄비를 버너 위에 올려놓고 점화 손잡이를 돌렸지만 또 불이 켜지지 않았다. L이 한숨을 내쉬며 큰애를 바라보았다. 큰애가 남편 눈치를 보면서 라이터를 꺼내 불을 켜 점화기에 가져다댔다. L이 다시 비어져 나온 허연 닭다리를 냄비 안으로 밀어 넣었다.

왜 네 주머니에서 라이터가 나와?

남편이 종이컵에 소주를 따르며 물었다.

길에서 주웠대요.

L이 머뭇거리는 큰애 대신 재빠르게 대답했다. L은 큰애가 담배 피우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모르는 척 했다. 줍는 거 좋아하시네. 남편이 투덜거렸지만 잘 들리지 않았다. L은 남편이 큰소리를 낼까봐 얼른 수박 한 쪽을 내밀었다.

됐어. 곯은 수박이나 사는 주제에.

남편은 L이 내민 수박은 쳐다보지도 않고 술잔을 비웠다.

L은 주제라는 말에 발끈했지만 두 눈을 가늘게 뜨고 째려보는 것으로 대신했다. 술 취하면 입이 거칠어지는 남편을 이해하기로 했다. 오늘은 이해해야 했다.

작은애가 큰애에게 물속에 들어가자고 했다. 큰애가 물속으로 들어가려는 작은애를 데리고 옷가방을 챙겨 탈의실로 갔다. 어차피 수영복은 없었다. 집을 나설 때 얇은 반바지와 민소매 티셔츠를 챙겨 들고 나왔다. 다행히 다른 사람들도 수영복을 입지 않았다. 이런 데서는 수영복을 입는 게 오히려 이상할 것 같았다. L은 그렇게 생각하는 자신에게 갸웃했다. 여긴 그런 곳이었다. 수영복은 유원지 오른쪽에 있는 물썰매장을 겸한 수영장에 가는 사람들이나 입는 것이었다.

술에 취한 남편이 돗자리 모서리 쪽에 ㄱ자로 누웠다. 남편의 얼굴빛이 햇빛 아래에서 보니 더 검게 보였다. 금세 입을 벌리고 코를 골았다. 남편이 잠결에 제 얼굴을 때렸다. 파리 몇 마리가 남편 주위를 날아다녔다. 돌출된 앞니에도 파리가 앉았다가 날아갔다. L은 삼겹살 구울 때 기름이 튈까봐 깔았던 신문지를 접어 남편 얼굴에 달라붙으려는 파리를 쫓고 부채질을 해주었다.

멀리 높게 서 있는 회전관람차가 하늘을 가르며 천천히 돌고 있었다. L은 회전관람차를 뒷목이 뻐근해지도록 바라보았다. 눈이 시려 눈물이 났다.

L은 수박을 들고 먹었다. 씨가 많은 수박이었다. 싼 수박일수록 씨가 많다는 걸 알고 있었다. L은 입 안에서 수박씨를 모아 입술을 오므린 다음 힘껏 멀리 뱉어보았다. 돗자리에서 두세 걸음 떨어진 자리에 수박씨들이 떨어졌다. L은 손을 바꿔가며 신문지로 부채질을 하고 수박을 먹고 씨를 멀리 뱉었다. 모래바닥에 검은 씨가 점점 많아졌다.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나온 아이들이 입었던 옷이 든 가방을 던져놓고 물속으로 들어갔다. 닭국물이 끓기 시작했다. L은 버너 불을 약하게 하고 국물이 넘치지 않도록 뚜껑을 비스듬히 덮었다. 아이들이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 물속에서 나왔다.

완전 똥물이야.

큰애가 티셔츠를 벗어 쥐어짜면서 말했다.

샤워장에 다녀온 아이들이 뭐 먹을 게 없나 봉투를 뒤적거렸다. 감자칩 과자를 한 봉지씩 챙겨 들고 먹기 시작했다. L이 끓어오른 거품을 걷어냈지만 닭은 아직 익지 않았다. 버너의 불꽃이 간당간당했다. L이 다른 버너에서 가스통을 꺼내 흔들어보았다. 가스가 절반도 남아 있지 않았다. 가스를 갈아 끼우자 다시 국물이 끓었다. L은 아이들에게 누가 수박씨를 멀리 뱉나 내기하자고 제안했다. 수박이 골았다고 싫다고 하는 아이들을 이기면 만원을 주겠다고 설득했다. L은 유원지에 놀러오게 되면 수박씨 멀리 뱉기 놀이를 꼭 하고 싶었다. 아이들은 인심을 쓰듯 고개를 끄덕였다. 셋은 돗자리 끝 쪽에 일렬로 서서 차례로 수박씨를 힘껏 뱉었다. 5판 3승제였는데 큰애가 내리 세 판을 이겼다. 생각보다 재미있지 않았지만 그래도 식구들과 무슨 놀이를 해본 기억이 없는 L로서는 충분히 기분 좋았다. L은 지갑에서 만 원을 꺼내주었다. 어차피 입장료도 안 내고 들어왔으니 그 정도는 써도 될 거 같았다. 작은애가 만 원을 든 큰애를 따라 나섰다. 놀이시설도 반값이니 두 가지는 탈 수 있을 거였다. L은 어느새 모여든 파리들을 내쫓고 신문으로 부채질을 했다. 남편이 코를 골았다. L은 부채질을 하다가 신문에 실린 ‘부산 해운대 피서객 100만 인파 몰려’라는 기사 헤드라인을 읽었다. 물놀이를 하는 피서객 사진이 실렸는데 사람들이 파리 떼처럼 보였다. 한때는 이 유원지의 피서객 인파도 뉴스기사가 되었다.

그런데 100만 명이 왔다는 걸 어떻게 알지? 일일이 세지도 못할 텐데.

L이 궁금해 할 줄 알았다는 듯이 그 옆에 박스기사로 ‘해운대 100만 명 어떻게 셀까’가 실려 있었다. L은 부채질을 하다말고 기사를 읽었다.

많은 사람의 수를 헤아리는 수학 원리가 있는데, 그걸 ‘페르미 추정법’이라고 한다고 했다. 먼저 해운대 해수욕장의 특정 부분, 1㎡ 공간에 있는 사람의 수를 세고, 만일 17명이 있다면 여기에 해운대 해수욕장의 총면적 5만 8400㎡를 곱한다. 그렇게 하면 약 99만 2800명이라는 숫자가 나온다는 것이다. 숫자를 어림수로 산출할 때 사용하는 방법이라고 했다. L은 다시 파리를 쫓고 부채질을 했다. 페르미 추정법이라는 어려운 말만 빼면 특별한 방법도 아니었다.

L은 파리를 쫓다가 파리의 몸통 빛이 청보라인 것을 새삼스럽게 알았다. 그러고 보니 파리가 움직일 때마다 빛의 각도에 따라 색이 달라 보이기까지 했다. 파리라고 우습게보았더니 그 빛이 묘하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L은 부채질을 하면서 마치 새로운 것이라도 발견한 양 신기한 눈으로 붉은 수박에 앉은 파리를 바라보았다.

남편이 숨을 내쉴 때마다 입 냄새가 날 것 같았다. 잘 때도 이마에 주름이 잡혀 있었다. 큰애 이마의 주름이 남편을 닮았다. 파리가 남편의 입술에도 달라붙었다. 그럴 때마다 남편이 입맛을 다셨다.

L은 하는 둥 마는 둥 부채질을 하면서 유원지를 바라보았다. 70년이 넘은 유원지였다. 십여 년 전부터 적자를 이어오다가 결국 유원지 전체를 폐장하기에 이르렀다. 시에서는 기업과 손을 잡고 더 많은 돈을 투자해 대단위 관광단지를 조성해 해외 관광객까지 끌어들일 수 있는 시설을 갖추겠다고 발표했다. 오늘이 유원지 폐장하는 날이자 무료입장 마지막 날이었다. 무료입장인데도 입장객이 별로 없었다. 한 때는 이 도시 아무 집에나 들어가 앨범을 찾아 펼쳐보면 이 유원지에서 찍은 사진 한 장은 나올 정도로 유명한 곳이었다. 이 도시의 개항기 역사에도 등장하는 유원지였다.

L은 이 유원지를 처음 찾았던 날을 떠올렸다. 20년도 훨씬 더 된 일이었다. L은 전자공장에서 선풍기 기판에 나사못을 박는 일을 했다. 그해 IC 회로를 장착한 신 모델은 불량이 잦았다. IC 선풍기를 수리하랴 일반 선풍기를 만들랴 야근을 해도 물건이 모자랐다. 폭염이 계속되자 너도나도 선풍기를 찾는 바람에 한 여름까지 선풍기를 조립해야 했다. 환풍기 시설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작업장은 늘 먼지로 목이 아팠다. 각자 선풍기 한 대씩 끼고 작업을 하고, 중간 중간 대형 선풍기가 돌아갔지만 작업장은 무더웠다. 씻지도 못하고 쓰러져 잠드는 날도 많았다. 하지만 촌에서 살다 이 도시로 온 L에게는 모든 것이 새로웠다. L은 하루 종일 허공에 매달린 에어드라이버로 나사를 박느라 팔을 들어 올릴 힘도 없었지만, 한 사람 한 사람의 손을 거쳐 갈 때마다 점점 선풍기 모습을 갖춰나가는 일련의 과정이 자못 신기했다. 스티로폼 박스에 선풍기를 넣은 뒤, 종이 박스에 담고 밴딩 작업까지 끝낸 선풍기가 출고를 기다리며 쌓여 있을 때는 팔을 주무르면서도 뿌듯했다.

유원지에는 한여름 절정이 지나가려던 때에 조별 단합대회 겸 야유회로 갔다. 유원지 안에는 이 도시에 있는 몇몇 기업체에서 유원지 둘레에 설치된 가건물을 임대해 직원들이 휴가철에 쓸 수 있도록 해놓았다. 가건물이라고 해봤자 내부 시설도 없이 앞면은 뚫려 있고, 바닥에 나무 마루가 깔려 있는 정도였다. L은 가건물 상단에 자신이 다니는 전자 이름이 붙은 플래카드를 자랑스럽게 바라보았다. 먼지가 날리고 햇볕이 내리쬐는 모래바닥에 돗자리를 깔지 않아도 되었다. 자리를 잡자마자 삼겹살을 굽고 술판을 벌였다. 멀리 놀이기구 타는 데서 쿵쾅대며 음악이 울려 퍼졌다. 술이 들어가자 아는 노래가 나오면 한둘이 먼저 흥얼거렸고 너도 나도 박수를 치며 따라 불렀다. 누군가는 소주병에 숟가락을 넣어 흔들며 박자를 맞췄고, 누군가는 엉덩이를 흔들었고, 재주를 넘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마룻바닥이 삐걱거렸다. 공장 안에서 묵묵히 나사를 박던 사람들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더운 공기 속에 사람을 들뜨게 하는 마약이라도 뿌려진 듯 모두 과장되게 웃고 떠들었다. 기혼자도 있었지만 스물 중반의 젊은 사람들이 많은 부서였다. 누군가를 의식한 행동이었다. 수컷 공작이 한껏 날개를 펴는 것과 같았다.

L은 자유 시간에 유원지를 한 바퀴 돌았다. 유원지 입구에 있는 여러 개의 요술거울 앞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한 거울은 L이 거꾸로 보였다. 한 거울은 하반신 부분이 제멋대로 휘어졌고, 다른 거울은 기린처럼 길게 보였다. L 뒤에 서 있는 나무도 마찬가지였다. 그때 거울 속으로 누군가 다가섰다. T였다. L보다 3개월 먼저 입사했고, L 옆에서 일했다. L에게 에어드라이버로 나사 박는 법을 가르쳐줬고, 일이 익숙지 않아 밀릴 때 L의 일을 대신 해주기도 했다. L은 T와 함께 요술거울을 보고 웃었고, 선착장에서 오리배의 페달을 열심히 돌리며 호수를 한 바퀴 돌기도 했다.

회전관람차도 탔다. 회전관람차가 천천히 올라가기 시작해서 가장 높이 올랐을 때 L은 신기한 듯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유원지와 멀리 고층 건물들, 숲과 건너편 바다가 보였다. L이 풍경에 눈을 떼지 못하고 있을 때, T가 재빠르게 L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L이 무슨 일인지 미처 알아채기도 전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무슨 말인가 하려고 할 때 T가 다시 한 번 입술을 갖다 댔다. 옅은 술 냄새가 났다. 회전관람차에서 내릴 때까지 그 뒤로 아무 풍경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L에게는 이 모든 것이 처음이었다. 내내 화끈거리는 얼굴이 가라앉지 않은 것은 햇빛 때문만은 아니었다.

다시 조원들이 모여 있는 가건물로 왔을 때, 조원들은 팀을 나눠 족구를 하려고 준비 중이었다. 여공은 L을 포함해 네 명이었다. 여자들도 두 명씩 나눠 팀에 끼워주었다. 족구는 L이 생각했던 것보다 거칠었다. 공이 땅에 닿을 때마다 모래먼지가 일었다. 딱딱하게 굳은 땅에 모래들이 깔려 있어 미끄럽기도 했다. L은 뒤쪽 모서리 근처에서 움직였다. T는 자신에게 온 공을 받아낼 때마다 나이스를 외쳤다. 한 번도 올 것 같지 않던 공이 L에게로 왔다. L은 어떻게든 공을 받으려고 오른발을 들어올렸다. 몸치였던 L의 몸이 붕 떠올랐고, 공과 상관없이 그대로 바닥에 떨어졌다. 꼬리뼈가 찌릿하면서도 뭉근하게 아팠다. 1세트 게임이 끝났을 때, L은 팀에서 빠졌다. 화장실에 가서 바지를 내렸을 때, 팬티에는 붉은 피가 묻어 있었다. 검붉은 생리혈과는 달랐다. L은 담홍의 피를 오래도록 내려다보았다.

L은 내내 T가 의식되었다. T는 그런 일이 언제 있었냐는 듯이 L을 대하는 바람에 마음의 상처를 입었다. 꼬리뼈는 일주일 정도 아팠다. T는 두 달을 더 다니다 공장을 그만 두었다. T가 무슨 마음으로 L에게 입을 맞추고, 무엇 때문에 냉담해졌는지 궁금했지만 차마 묻지 못했다. 대신 스스로 이성적 매력이 없는 여자라는 인식을 깊게 하게 되었다.

여섯 시가 지나자 물썰매장이 폐장을 했다. 물썰매를 타던 사람들이 놀이기구 쪽으로 몰려들었다. 음악소리가 더 요란해졌다. L은 비스듬히 덮었던 냄비뚜껑을 열어보았다. 닭은 아직 익지 않아 비린내가 났다. 뱃속에 넣었던 쌀도 익지 않았다. 가스불이 꺼져 있었다. 몇 번 켜보려 했지만 켜지지 않았다. 가스통을 꺼내 흔들어보았다. 가스가 없었다. 닭을 삶다말고 그대로 둘 수는 없었다. L은 남편을 흔들어 깨웠지만 좀처럼 일어나지 못했다. 남편은 늘 피곤해했다. 어디든 자리만 있으면 누우려 했고, 누우면 잠이 들었다. 한 번 잠들면 누가 업어 가도 몰랐다. 지갑을 챙겨들고 매점으로 갔다. 문이 닫혀 있었다. L은 매점 아르바이트가 어제까지만 일한다고 했던 얘기를 새삼 떠올렸다. L도 어제까지만 일하고 오늘은 유원지에 놀러 올 거라고 자랑까지 해놓고 깜빡 잊었다.

돌아오는 길에 놀이기구를 둘러보았다. 붕붕카에도, 청룡열차에도, 회전목마에도 아이들은 없었다. 있다 해도 찾기 어려웠다. L은 천천히 돌아가고 있는 회전관람차를 바라보았다. 안에 타고 있는 사람들이 보이지 않았다. L은 유원지에 15년 가까이 나왔는데 놀이기구를 타본 적도, 물에 발을 제대로 담가본 적도 없었다. L 곁에는 늘 지켜야 할 아이스크림 통이 있었다. L에게 유원지는 선풍기 기판에 나사를 박을 때 돌아가던 컨베어벨트와 다를 바 없었다.

L은 유원지 내에서 오랫동안 아이스크림콘을 팔았다. 이 도시에 살고 있던 친척이 공장에 다니지 말고 자신의 일을 도와달라고 했다. 처음에는 유원지 내에서 닭을 튀겨 파는 친척 일을 도왔다. 다행이 L은 직접 닭을 튀기지 않았다. 그가 맡은 일은 닭을 테이블에 내놓거나 포장을 해주고 계산을 하고 테이블을 행주로 닦는 일이었다. 한 여름에는 하루 종일 앉아보지 못한 날도 많았다. 자리가 빌 틈이 없을 정도로 바빴다. 몇 년이 지나서는 아이스크림콘을 팔았다. 챙이 넓은 모자를 쓰고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을 찾아 바퀴 달린 아이스크림 통을 끌고 다녔다. 딸기맛 바닐라맛 포도맛 아이스크림을 고깔 모양의 콘과자에다 담아주었다. L이 파는 아이스크림은 인공향이 잔뜩 들어간 싸구려 아이스크림이었다. 꽁꽁 얼었을 때 먹으면 표가 덜나지만 좀 녹았을 때 아이스크림을 먹으면 뒤끝의 쓴 맛이 혀에 감겼다. 인공감미료 탓이었다. L이 유원지에서 파는 아이스크림은 마트나 백화점, 아이스크림 전문점에서 파는 아이스크림과 질적으로 달랐다. L이 파는 아이스크림은 고기집이나 뷔페 한쪽에 마련된 후식용 아이스크림과 같았다. 맛이나 질로 먹기 보다는 입가심쯤으로 먹는 아이스크림이었다.

십 년쯤 전에 시에서는 유원지를 살리기 위해 물썰매장을 만들고 라오스에서 코끼리 열 마리를 데려온 적이 있었다. 코끼리들은 하루 네 번 공연을 했다. 관람객과 달리기도 했고, 관람객 몇 명이 바닥에 누우면 그 위를 지나가기도 했다. 아이들이 바나나를 주면 코로 받았다. 코로 그네를 태워주기도 했다. 떱은 코끼리 조련사였다. 쇼는 화려했고 유원지를 찾는 사람들도 많았다. 저녁이면 발갛게 그을린 젊은 애들이 슬리퍼를 끌거나 맨발로 쌍을 이뤄 돌아다녔다. 그때가 L의 아이스크림이 제일 많이 팔리던 때이기도 했다. 그러다 코끼리 네 마리가 우리에서 도망쳤다. 오전에 단체관람 온 여중생들이 지른 소리에 놀라 우리를 탈출한 것이다. 탈출한 코끼리 가운데 두 마리는 일찍 발견돼 사육사가 붙잡았으나 나머지 두 마리는 인근 산으로 도망치는 바람에 유원지 일대가 발칵 뒤집혔다. 경찰과 119구급대 등 수십 명이 출동해 유원지에서 꽤 떨어진 산을 뒤져 절 뒤편에서 잡았다. 결국 그 코끼리들은 모두 영양과 환경을 문제 삼아 서울대공원으로 옮겨갔다. 코끼리들이 우리를 빠져나갈 때 L은 놀이기구 쪽으로 자리를 잡으러 아이스크림 통을 밀며 가고 있었다. 아주 가까이는 아니지만 코끼리가 L을 지나쳐갈 때, L은 코끼리의 무게에 압도되어 주저앉을 뻔 했다. 흥분한 코끼리가 걸음을 뗄 때마다 땅이 쿵쿵 울렸다. L은 코끼리를 좋아하지 않았다. 굵은 주름으로 뻣뻣한 몸 가죽과 회색빛은 내내 정들지 않았다.

코끼리를 따라왔던 라오스 사육사 떱은 L이 파는 아이스크림을 좋아해 하루에도 여러 번 마주쳤다. 검게 그을린 얼굴에 흰 치아를 내보이며 웃을 때는 보조개까지 들어가 귀여운 얼굴이었다. 떱은 아이스크림을 핥아먹으며 아이스크림 맛있어요, 했다. 먼 이국땅에 와서 먹는 아이스크림이었다. 이 나라, 이 유원지를 떠올릴 때 아이스크림을 떠올릴지도 몰랐다. 좀 더 달콤하고 부드럽고 맛있는 아이스크림으로 기억되고 싶었다. 그럴 때는 싸구려 아이스크림을 파는 게 창피하기도 했다. 떱은 L에게 언제 한 번 코끼리를 태워주겠다고 했지만 L은 고개를 흔들었다. 떱도 코끼리를 따라 떠났다.

되도록 아이들에게도 아이스크림을 먹이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팔다 남은 아이스크림을 두고 슈퍼에서 다른 아이스크림을 사올 수는 없었다. 한여름에는 아이스크림 값도 만만치 않게 들어갔다. 싸구려 아이스크림 맛에 길이든 아이들은 비싼 아이스크림을 맛이 없다고 싫어했다.

꽁꽁 언 아이스크림을 푸다보면 엄지와 검지가 얼얼했다. 꽁꽁 얼어서 푸기 어렵던 아이스크림이 한낮을 지나면서 푸기 수월해지고 저녁때쯤이면 별 힘을 주지 않아도 풀 수 있었다. 그때쯤 되면 아이스크림은 바닥을 보였고 해가 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L에게 시간은 아이스크림을 푸는 엄지와 검지 사이에서 흘렀다.

L은 몇 군데 쓰레기장을 돌았다. 재활용 통을 뒤졌다. 가스통 몇 개를 꺼내 흔들어 보았다. 비어 있었다. 겨우 조금 남아 있는 가스통 몇 개를 챙겼다. 한 군데서 절반쯤 남아 있는 연료를 찾았다. 횡재한 기분이었다. 이 정도면 백숙을 마저 끓일 수 있을 것 같았다. L이 자리로 돌아왔을 때까지 남편은 자리에 없었다. L은 화장실에라도 간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가스통을 갈아 끼우고 불을 켰다. 딸칵 딸칵 딸칵 딸칵 딸칵. 불이 붙지 않았다. L은 냄비 뚜껑을 열어보았다. 닭기름이 둥둥 떠 있었다. 냄비는 아직도 따뜻했다. 숟가락으로 물 위의 기름을 걷어냈다. 걷어내고 또 걷어냈다. 백숙이 잘 익는다면 기름을 걷어냈으니 맛이 담백할 거였다. 큰애 가방을 뒤져보고, 바지를 뒤져봐도 라이터는 나오지 않았다. 남편이 있었으면 라이터를 구해오라고 했을 텐데 어디 갔는지 오지 않았다. 화장실에 다녀 올 시간은 지났는데 어디서 또 술을 마시고 있는지도 몰랐다. L은 이번에는 가스통이 아니라 라이터를 주우러 다녔다. 너무 안쪽으로 들어오는 게 아니었다는 후회가 들었다. 라이터를 빌릴 만한 사람도 없었다. L은 결국 다시 가스통을 구했던 쓰레기장으로 갔다. 이번에는 플라스틱 재활용을 뒤졌다. 플라스틱 병에서 나온 끈적끈적한 오렌지 음료가 손에 묻었다. 라이터는 없었다. 금방 찾을 것 같았던 그 조그만 라이터가 보이지 않자 L은 플라스틱들이 담긴 재활용 부대를 발로 찼다. 아이들이 올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길이 엇갈릴까봐 그들을 찾아 나서지 않았다. 그래도 여기는 놀이기구 타기도 가깝고, 물에 발을 담그기도 가까운 명당자리였다. 돌아오는 길에 화장실에서 손을 씻었다.

아무도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L은 점화스위치를 길게 눌렀다가 켜기를 반복했다. 전에도 그렇게 켜 본 적이 있었다. 열댓 번, 메마른 딸깍거림 끝에 드디어 화르륵 소리를 내며 화구에 불이 붙었다. 식어가던 닭국물이 다시 뜨거워지며 끓기 시작했다.

L은 배가 고팠다. 먹을 것이라고는 수박밖에 없었다. 닭백숙 먹을 생각에 따로 군것질거리를 준비하지 않았다. L은 프라이팬 한 쪽의 돼지기름에 빠진 파리를 보았다. 파리는 기름에 빠진 발을 어떻게든 빼보려고 발버둥 쳤지만 돼지기름에서 발을 빼기란 쉬워 보이지 않았다. L은 수박 먹을 생각도 잊고 파리를 바라보았다. 청록빛의 몸통이 스러지는 햇빛을 받아 언뜻언뜻 빛났다. 몸부림을 칠수록 발은 더 깊숙하게 기름에 빠졌고, 결국 날개에도 기름이 묻었다. 발이 빠질 때까지만 해도 어떻게든 기름 속에서 발을 빼보려 했던 파리였다. 날개까지 기름에 젖자 파리의 움직임이 잦아들었다. L은 그 광경을 그냥 지켜보기만 했다. 나들이 나온다고 들떴던 마음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사실 어젯밤에 L이 들떠서 상상했던 것은 다 이룬 셈이었다. 가족들과 함께 고기를 구어 구워 먹고 닭백숙을 먹고 수박을 쪼개 먹고 물속에 들어갔다 나오고 싶었다. 고작 그거였지만 L에게는 고작이 아니었다. 매년 여름마다 나들이 나온 사람들을 보며 벼르고 또 별렀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다. 언젠가 큰애가 친구와 전화통화 중에 좋아하는 과일을 대는데 망고, 키위, 블루베리라고 말하는 걸 들었다. L은 의아했다. 그런 과일들은 먹어본 적이 없었다. 기껏해야 사과나 귤, 수박 정도였다. 아이가 언제 그런 과일들을 먹어봤다고 좋아하게까지 되었을까 궁금했다. 그냥, 이름만으로도 뭔가 있어 보이잖아. L에게는 이 유원지로의 나들이가 큰애의 망고이고 키위이고 블루베리였다. 무엇을 하지 않더라도 나들이를 나온다는 그거면 되었다. L은 자리 한 쪽에 누웠다. 멀리 높이 올라간 회전관람차가 보였다. T와 나누었던 회전관람차의 입맞춤은 실상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회전관람차만 보면 주먹만 한 돌멩이가 가슴에 얹힌 듯 했다. L은 아이스크림을 팔게 되면서 하루에도 여러 번 회전관람차 앞에 서있었다. 다른 놀이기구들이 출렁거려 아이스크림을 들고 탈 수 없다면 회전관람차는 흔들림도 없고, 작은 공간에서 아이스크림 먹는 맛도 있어서 오히려 좀 팔렸다.

많은 사람들이 높은 곳에서 이 도시를 보기 위해 회전관람차를 탔다. 터질듯 여문 포도알 같은 젊은 연인들도 많았다. 그들 중 누구는 L이 생의 찬란했던 순간, 그때가 빛나는 한때인지도 모르던 어수룩한 그녀가 첫 키스를 나누던 곳에 앉아 키스를 나눌지도 몰랐다. 그날 L의 처녀막이 겨우 족구를 하다 파열됐듯 그녀의 첫사랑은 거기, 저 높은 회전관람차의 흔들리는 좁은 공간에 갇혀버렸다. L은 가끔 T가 생각났다. 그날 그녀에게 왜 그랬는지, 그 뒤는 또 왜 그녀에게 냉담해졌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더 이상 그게 궁금하지는 않았다. 유원지의 흥청거리는 수많은 사람들을 보면서, 자신도 모르게 들뜬 열기 하나만으로도 이루어지는 일이 많다는 걸 알았다. 생의 모든 것이 분명하지 않았다. L은 삶의 모든 것이 수학 연산처럼 분명했다면 살 수 없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L은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달싹여 그날의 그 부드럽고 달콤했던 첫 키스를 기억했다. 유화가 오래되면 잘못 스케치한 바탕그림이 비쳐 보이는 팬티멘토처럼 그녀의 서툰 첫 키스의 느낌은 날이 지날수록 선명해졌다.

유원지 폐장 안내방송에 잠이 깼다. 깜빡 잠이 든 모양이었다. 저녁 7시였다. 가스불은 꺼져 있었다. 냄비 뚜껑을 열어보았다. 닭 발목의 살이 밀려나지 않은 것을 보니 푹 익은 것 같지는 않았다. 모기가 팔뚝이며 종아리를 물었는지 간지러웠다. 아직 어둡지는 않았다. 이 유원지에는 밤이라고 해서 따로 폐장 방송을 한 적이 없었다. 놀러온 사람들은 텐트를 치거나 가건물에서 잘 수도 있었다. 밤이 되면 직원들이 텐트 당 오천 원쯤 받으러 다녔다. 놀이기구는 열 시면 끝이 났지만 새벽까지 술을 마시고 놀 수도 있었다. 개장을 알리거나 폐장을 따로 알리지 않았다. 어쩌면 지금 들리는 이 방송이 처음이자 마지막 폐장 방송인지도 몰랐다. L은 모기에 물린 자리에 침을 바르고 긁으면서 어두워지는 수영장을 바라보았다. 해가 지면 L도 아이스크림통을 밀고 퇴근했다. 내내 유원지에서 살았으면서 유원지에서 밤까지 있어본 적은 없었다.

물이 어둠 속에서 검게 빛났다. 놀이기구를 타던 사람들이 하나 둘 빠져나가는 게 보였다. 움직이던 놀이기구도 멈춰 섰다. 그나마 유원지를 살아 있게 하던 음악도 그쳤다. 주변이 조용해지자 음식 썩는 냄새가 더 지독해졌다. 파리 날갯짓 소리가 들렸다. L은 가져왔던 짐을 정리했다. 절반쯤 남은 수박과 냄비에 든 닭을 어떻게 해야 하나 망설여졌다. 남편의 말대로 적당한 크기의 잘 익은 수박을 골랐더라면 맛있게 먹었을지도 몰랐다. L은 후회하면서도 다음에도 또 무조건 큰 것에 손이 갈 거라는 걸 알았다. 가난이 만든 습관이 고쳐지지 않았다. L은 수박과 냄비는 그대로 둔 채 남편과 아이들을 기다렸다.

낮 동안 흥청흥청 흘러가던 공기가 가라앉았다. 먼 바닷가에서부터 비린내와 해무가 밀려드는지 몸이 축축했다. 다시 폐장 안내방송이 나왔다. 폐장이 된 유원지는 이제 유원지가 아니었다.

어둠 속 어딘가에서 푸르렁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L은 그것이 어떤 동물이 내는 소리인지 알 수 있었다. 거대한 몸통에서 울려나오는 그 소리는 코끼리 울음소리였다. 그러나 코끼리 울음소리일 리가 없었다. 겨우 한 마리 남아 돈을 받고 사람을 태워 유원지를 한 바퀴 돌던 코끼리도 폐장 일정에 따라 서울대공원으로 옮겨졌다.

L은 조금 전 그 소리가 다시 날까봐 귀를 기울였다. 다시 쿠르르 소리가 들렸다. 놀이기구 쪽에서였다. 놀이기구 쪽에는 동물들이 없었다. 그나마 남아 있는 원숭이나 공작, 몇몇 새들은 입구 왼쪽으로 가야 했다. 다시 한 번 그 소리가 들렸을 때, L은 그 소리가 코끼리 울음소리가 아니라 놀이기구가 숨을 내려놓는 소리라고 생각했다. 수십 년 된 놀이기구는 매년 여름 개장 전에 손질을 하긴 하지만 눈가림에 불과했다. 원색의 페인트칠로 눈속임을 할 뿐, 녹이 슬고 방수천이 갈라졌다. 보트나 오리배에서는 녹 덩어리가 떨어지기도 했다. 그렇게 짧게는 몇 년을, 길게는 수십 년을 쉬지 않고 돌았던 기계들도 이젠 숨을 놓을 때라는 걸 아는 모양이었다. 제 몸을 내려놓은 놀이기구들이 어둠 속에서 음산하게 빛났다. 가로등 근처의 늘어진 버드나무 가지가 바람을 감당하며 조금씩 흔들렸다.

L은 수박 한 쪽을 잘라 먹었다. 낮보다 더 시큼한 맛이 났다. 달콤한 안쪽이 상해 있어 대충 긁어냈더니 맛도 밍밍했다. L은 낮에 했던 것처럼 수박씨를 뱉었다. 수박씨가 어디쯤 떨어지는지 알 수 없었다. 낮에 아이들하고 좀 더 놀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아이들은 자기들끼리 놀다 올지도 몰랐다. 집이 멀지 않으니 알아서 올 수도 있었다. 짐만 많지 않다면 L도 집에 돌아가고 싶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남편 말대로 삼겹살이나 몇 근 사다 구워먹을 걸 하는 후회가 들었다.

L은 몇 년 전 이 자리에 앉아 있던 한 가족을 떠올렸다. 한쪽에서는 백숙이 끓고 있었고 가족이 모두 수박씨 뱉기 놀이를 하고 있었다. 아이들은 수박씨를 더 멀리 뱉을 때마다 두 팔을 치켜 올리며 앗싸라비요 하고 소리를 질렀다. 남편은 나이스, 하고 외쳤다. L은 문득 눈길을 돌려 회전관람차를 바라보다 눈물을 조금 흘렸다. 하루 종일 어떻게 아이스크림을 팔았는지 몰랐다. 그 가족이 떠나고 난 뒤에야 아이스크림이 쉽게 퍼진다는 것을 알았다.

남편과 아이들은 어두워졌는데도 오지 않았다. 더 이상 탈 놀이기구도 없을 텐데 어디서 무엇을 하는 지 알 수가 없었다. 놀이기구는 멈춰 섰고, 오리배는 선착장에 묶였다. 쪽배는 뒤집힌 채 모래사장에 머리를 박고 있었다. 쪽배를 관리하던 청년들도 다시는 만나지 못할 것이다. 어둠은 더 짙어졌다. L은 배도 고프고 졸음도 몰려왔다. 킥킥킥 원숭이 울음소리가 들리자 선잠이 든 새가 울었다. 그 소리들은 어둠 속에서 기괴했다. L이 꿈꾼 나들이가 아니었다. 아니 L이 꿈꾼 나들이가 어떤 것인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유원지가 폐장되면 이 안에 있던 놀이기구며 동물들은 모두 어디로 가는 것일까. 압도적인 스케일과 스릴, 기교가 넘쳐나는 놀이기구라는 명성이 사라진지 오래인 노쇠한 기구들이었다. 처음엔 그 기구들도 최신이었을 것이고, 사람들은 그 기구를 타기 위해 줄을 서고, 타는 동안 흥분해서 소리를 질렀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아무도 그때를 기억하지 않는다. 앨범 속에 갇힌, 까마득히 잊힌 요술 거울과 같은 때가 있었을 뿐이다.

L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낮에 아이들이 놀던 수영장 물빛도 희끄무레했다. L은 깊게 들숨과 날숨을 내 뱉었다. 가로등 불빛에 허니문 카의 꼭대기 그림자가 길게 물 위에 누웠다. L은 어두워져가는 유원지에 문득 낚싯대를 던져보고 싶어졌다. 무엇이 건져 올라올 것인지 궁금했다. 아니 낚싯줄을 빠져나간 것들이 더 궁금했다. L도 모르는 사이 L을 빠져나간 많은 것들처럼. 물속이 궁금해졌다. 첫 느낌이 가시지 않은 채 마지막 느낌을 각인하는 일이었다. 회전관람차의 칸칸마다 칠해져 있던 색색이 물 위에 만장처럼 너울거렸다. 모두 몸을 내려놓고 쉴 때 회전관람차만이 여전히 서 있는 느낌이었다. 스물세 살, 저 꼭대기에서 이 도시를 내려다보고, 바다를 보고 감탄할 때 아주 짧은 순간 입술에 닿던 그 감촉. L은 멈춰버린 회전관람차에 갇힌 것 마냥 꼼짝할 수가 없었다. 회전관람차가 허니문 카로도 불린다는 사실은 한참 뒤에 알았다. 얼마 더 지나면 회전관람차는 본래의 색이 빨강이거나 노랑이거나 파랑이었음을 겨우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도 더 오랜 뒤면 바랠 대로 바래버려 우중충한 한 가지 색이 될 것이다.

L은 무릎을 세우고 그 위에 얼굴을 내려놓았다. 아이스크림을 팔기 위해 들어온 유원지가 아니라 놀기 위해 들어온 유원지였다. 이제 다시는 이 유원지에 있는 어떤 것도 탈 수도 즐길 수도 없을 것이다. 폐장 공고가 났을 때 L은 조바심이 났다. 한 번은, 단 한 번은 놀러 와야 할 것 같았다. 그래야 다 녹아 흐늘거리는 아이스크림 같은 삶을 살지 않을 것 같았다. L은 눈물이 조금 났다. 악취는 점점 더 심해졌다. 파리들이 윙윙댔고, 멀리 바다에서 몰려온 해무가 L을 적셨다. 낮에 먹은 상한 가지무침 때문인지, 수박 때문인지 배가 아프기 시작했다. 아니, 배가 고픈 것 같기도 했다.

남편과 아이들은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문득, L은 내내 혼자였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하기 직전의 가지무침이나 먹으며, 무조건 싸고 큰 것만 고르며 그녀의 생이 저물어갈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닭 비린내를 맡으며 닭이 익기만을 기다리며 살게 될 것만 같았다. 중요한 건 정작 싱크대에 두고 나오듯, 그렇게 살게 되리라 생각되었다. 그 느낌은 슬프지만 자명했다. 허기가 참을 수 없이 몰려왔다. L은 냄비 뚜껑을 열었다. 닭다리를 뜯으려 했지만 잘 뜯어지지 않았다. 그녀는 숟가락으로 뱃속의 찹쌀과 마늘을 긁어낸 다음 닭을 꺼냈다. 그녀는 며칠 굶은 사람처럼, 아니 생을 거슬러보기라도 할 것처럼 닭을 통째로 들고 한입 크게 물어뜯었다. 닭이 뜯겼다. 푹 익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못 먹을 정도도 아니었다. 다리뼈에 붙어있는 살에서 얼핏 피가 비쳤지만 그녀는 상관하지 않았다. 그녀는 게걸스럽게 크게 입을 벌리고 한 번 더 뜯어먹었다. 청동빛 파리가 귓가에서 윙윙댔다. 그녀는 뜯기지 않는 닭가슴 쪽만 빼고 다리와 날개와 어깻죽지와 목뼈 근처의 살까지 알뜰하게 뜯어먹었다. 그녀의 입가가 어둠 속에서 번들거렸다. 배가 부르자 남편과 아이들이 더 이상 궁금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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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은 문득 결심한 듯 일어섰다. 자세히 보니 아직도 회전관람차만은 아주 천천히 움직이고 있는 것 같았다. 회전관람차를 타야 할 것 같았다. 아니 회전관람차가 아니라 허니문 카를 타고, 아이스크림을 파는 동안 한 번도 궁금하지 않았던 이 도시가 어떻게 변했는지 봐야 할 것 같았다. 회전관람차를 운전하는 직원을 알고 있었다. 그가 이 유원지를 떠나지 않았다면 L의 부탁을 들어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남편과 아이들도 허니문 카를 타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가로등 불이 꺼지지 않아 다행이었다. L은 멀리 보이는 허니문 카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킥킥킥 원숭이 울음소리가 등 뒤에서 따라왔다. 멀리 코끼리 울음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양진채∙200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나스카 라인」으로 등단. 소설집 푸른 유리 심장 발간. 제2회 스마트소설 박인성 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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