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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인천을 이끄는 예술인/박송우/대담 이외현/사람 나고, 예술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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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백탄
댓글 0건 조회 6,955회 작성일 14-08-08 1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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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인천을 이끄는 예술인/박송우/대담 이외현/사람 나고, 예술 난다

 

 

무호無乎 박송우 화백은 그림에 대한 뜨거운 열정을 가지고 화가로, 교육자로 70년의 삶을 살아왔다. 그는 인천 청관(차이나타운)에서 미술공부를 시작으로 지금까지 인천 미술인으로 살고 있는 인천지킴이의 한 사람이다.

1941년 강화군 삼산면에서 출생하여 삼산초등학교, 송도중학교, 송도고등학교,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단국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하고 중․고등학교 미술교사로 정년퇴임했으며 고희를 넘긴 지금도 끊임없이 창작활동을 하고 있다.

1950년대 후반, 까까머리 시절 그림이 좋아 무작정 이젤을 메고 청관골목(차이나타운) 구석구석을 그려대던 시절이 있었다. 그곳에 가면 같은 생각을 가진 또래 친구들이 너나 할 것 없이 하얀 도화지에 자신의 꿈을 그리고 있었다. 이제는 원숙한 화가로 인천화단의 주춧돌이 되어 있지만 그 시절의 추억은 잊을 수가 없다고 한다. 점점 각박해져가는 현실에서 그 시절의 낭만이 간절하게 그립기도 할 것이다. 젊은 시절 같이 그림을 그리던 친구들로는 유재민, 윤의웅, 윤주철, 이무웅, 이정박, 우종만, 김응조 화백 등이 있다. 그들은 고희를 넘나드는 원로화가들이다. ‘우리들은 가난하고 어려운 시절이었지만 화가가 되기 위해 열정을 불사르던 그 시절을 가슴에 안고 살아간다.’ 또한 ‘그림을 그린 뒤 귀갓길에서 바라본 월미도의 석양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며 그 시절을 회상했다.

이창구 화백은 ‘무호의 그림은 자연의 섭리와 깊이를 한 붓에 담아 물이 흐르듯 그려 낸다.’ 며 ‘아련한 향수와 함께 간절히 꿈꾸는 선경이며 현대적 감각의 비구상화다.’라고 표현하였다. 인천의 바다와 섬, 고향을 소재로 자연의 아름다움을 심상 이미지로 재구성하는 박송우 화백의 그림세계가 더욱 궁금해진다.

2012년 7월 19일부터 29일까지 인천학생교육문화회관에서 ‘70년 삶의 흔적’이라는 제목의 개인전을 가졌다. 교육문화회관 관계자는 ‘이번 전시를 통해 동양적 사색과 신비가 느껴지는 수채화 작품들과 현대적 감각의 비구상화를 감상할 수 있을 것.’이라며 ‘과거 작가가 살았던 시대적 흔적을 살펴보면서 기성세대에게는 과거의 기억 및 향수를,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는 새로운 볼거리를 줄 것으로 기대된다.’고 하였다. 황우여 새누리당 대표, 나근형 인천광역시교육감, 유천호 강화군수, 김실 전 인천시교육위원회 의장, 오남길 한국미술협회 자문위원, 강하진 서양화가, 김재열 한국예총 인천광역시연합회장, 박인우 서양화가, 이창구 한국화가 등 지인들이 축하 메시지를 보내고 함께 자리를 빛내주었다.

근래에 전시됐던 작품들을 보면, 섬과 바다, 고향에 대한 느낌을 추상적으로 표현한 작가의 심상을 엿볼 수 있다. 이 같이 추상적인 그림은 오히려 구상화보다는 그림을 바라보는 사람의 마음에 따라 훨씬 더 자유로운 상상력을 불러일으키지 않을까 생각한다.

단풍이 도시의 골목을 순회하는 11월의 초순, 그의 송림동 2층 화실을 찾아갔다. 작업 중이던 100호 크기의 비구상 유화 한 점이 눈에 들어왔다.

철사줄에 걸려 건조 과정에 있는 10여점의 그림도 보였다. 자세히 보니 벽면에 포개어 기대어 있는 작품들도 상당히 많이 있다. 몇 마디 덕담을 나누고는 바로 대담으로 들어갔다.

 

이외현:선생님, 현 시대를 살아가는 화가로서 현대미술의 흐름을 어떻게 요약하실 수 있나요.

박송우:현대미술의 정의를 한마디로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국제적 경향을 보면 개인적 의사 표현, 또는 수단으로서의 예술로 전락된 느낌을 받아요. 형태와 색채로 그저 장식적 의미로 말입니다. 본래의 미술은 정통적 의미로 깊이 사색하고 유추하며, 고고한 품위를 내포한 미의 표현인데 현대에 와서는 창작이라는 미명 아래 미를 그저 파괴하고 있는 행위인 것 같아 어지럽습니다. 추한 것과 아름다운 것의 한계가 모호해지면서 시대적 혼란과 함께 진리가 파괴되고 있는 듯도 하구요. 그러나 이후에 다시 정리되리라 생각합니다. 즉 미적 표현이 그 진리임에 분명하여 창의적 현대사고 안에서 미적 본질이 생성되리라 믿습니다.

이외현:무호無乎라는 호를 사용하고 계신데,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 누가 지었는지 궁금합니다.

박송우:無乎(없을 무, 어조사 호) 즉 “없음이로다.” 결국 “세속의 때가 없는 순수함 그 자체로다.” 라는 뜻입니다. 서예가 김재익 선생님이 휘호로 지어준 것입니다

이외현:참 좋은 의미를 가진 호이군요. 혹시, 화가가 안 되셨다면 어떤 삶을 꿈꾸어 보셨는지요.

박송우:우리의 삶은 다양한 체험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익히는 삶 그대로 이어야합니다. 나의 삶은 그저 행복과 아름다움을 추구하는데 노력을 다해 왔다고밖에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후회는 하지 않아요. 물론 다른 삶을 꿈꾸어 보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마는, 나도 대학 시절에는 다양한 체험을 위해서 많은 세계를 두드려 봤습니다. 운동을 좋아해서 펜싱, 축구, 사격 등을 했어요. 사격은 그 당시 경기도 대표선수로 선수촌에서 훈련을 한 적도 있습니다. 그 일로 해서 청와대 경호원으로 일할 기회도 있었지요. 옛날 일이지만.

이외현:하마터면 이 자리에서 못 뵐 뻔 했네요(웃음). 화가로 입문하게 되신 계기나 대학시절 에피소드가 듣고 싶습니다. 그리고 60년대 후반에 인천에서 유화전을 여신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현재까지의 작품 활동에 대해서 말씀 부탁드립니다.

박송우:고등학교시절 수채화와 데생으로 미술을 시작하였기 때문에 홍익대학에 좋은 성적으로 입학하지 않았나싶어요. 나의 미술활동의 시작은 좀 늦은 고 2때입니다. 황추 미술선생님이 계셨는데 작품 활동을 열심히 하시는 것을 보고 나도 선생님처럼 그림을 그려보고 싶은 의욕이 발동하여 중학교 1~3학년, 고교 1~2학년 학생들을(그 당시에는 중, 고등학교가 같이 있었음) 불러 모아 미술부를 만들 것을 요청하면서 시작이 되었습니다. 그때 같이 배웠던 미술부 학생들은 대부분 전국 우수대학을 졸업했으나 계속해서 작품활동을 하는 이는 많지 않아요. 그 중 백준태는 우리나라 극장 간판의 일인자로 알려졌으나 지금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없지요. 그 중 연해국 선생은 훌륭한 작가로 남아있습니다. 6~70년대 인천의 미술은 송도 중.고등학교가 이끌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홍대에 다닐 때만 해도 전기사정이 좋지 않아 걸핏하면 전기가 끊기고 당인리 발전소의 희미한 불빛 아래에서 데생을 하던 기억이 납니다. 대학 2학년 때부터 유화를 그리기 시작했어요. 그 당시에는 누드화가 유행이어서 실기시간은 으레 누드화를 그렸지요. 졸업 때까지 유화를 그린 셈인데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한동안 유화만 그리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 당시 이봉상 교수님이 담임으로 계셨는데 나는 김환기 교수님을 좋아했습니다.

가끔 밤섬으로 사생대회를 나갔는데 김환기 교수님은 늘 검은 고약 같은 커피를 가지고 오셨지요. 그때부터 차츰 커피맛에 길들여졌는데 강화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을 때 다방에서 전시회를 가지게 된 계기가 거기에 있었지 않나 싶습니다. 물론 다방 아가씨가 예뻤던 것도 사실입니다. 특히 김원 교수님의 해부학 강의 덕분에 근육과 뼈로 이루어진 인체의 신비를 느낄 수 있었고, 실물 누드를 할 수 있었던 것이 더 인상적입니다.

지금도 연락하고 지내는 맹인제 교수님은 한국 미술사를 가르치셨는데 대학 선배이며 스승입니다. 특히 프랑스 유학을 다녀오신 박서보 교수님은 4학년 때 <무동인회>에 참석을 요구했으나 참석하지 않았어요. 내 나름대로의 비구상을 꿈꾸기 시작했고, 교직생활을 하면서도 틈틈이 전시를 해왔습니다. 비구상작품은 100호, 80호를 중심으로 인천, 강화, 서울 등에서 많은 작품들이 사람들의 뇌리 속에 살아 숨 쉬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학생들에게는 주로 구상 유화를 가르쳤고 90년대 들어서 수채화에 매력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수채화의 특성상 작업이 오랜 시간을 요구하게 되는데 정밀 사생부터 다시 시작하여 이제는 그 맛을 즐기는 선까지 왔습니다.

이외현:대학시절 말씀을 들으며, 당인리 발전소의 희미한 불빛 아래에서 열심히 데생을 하는 청년의 모습이 상상됩니다. 2007년 갤러리 진에서 가졌던 심상수채화전에서 실사풍경이 아니라 잔상적 풍경 즉, 심상적 풍경이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실사가 아닌 잔상적 풍경을 그리는 이유라도 있는지요.

박송우:심상풍경은 인천인으로서 바다와 섬, 그리고 고향의 아름다움鄕心을 되새김질하는 것입니다. 즉 기억 속 풍경內在的風景을 지금 여기here and now에 이끌어 놓는 작업이지요. 지금 나는 그곳이 그립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실은 구상 비구상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점점 그 곳에 가고 있다. 그런 곳은 실재 없다. 아니 있다. 있는 것이 없고, 없는 것이 있다. 어떻게 할 것인가. 그래서 그리는 것이다. 이것이 나의 실체입니다. 그냥 보아주기 바랄 뿐입니다.

이외현:선생님 말씀을 들으니 심상적 풍경이 무엇인지 조금은 이해가 됩니다. 2009년에는 갤러리 몽떼에서 물(생명)(빛) 바람(공기)를 주제로 표현된 작품을 전시하신 바 있으시죠. 자연이 화가에게 주는 메시지는 무엇이라 생각하시는지요.

박송우:그리는 사람은 형상과 색체로 마음을 나타내지만 보는 이는 스스로 마음을 찾아가야 합니다. 스스로 정화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것이 그림이 가지는 힘이고 가치입니다. 우리는 물, 빛 공기로 살아갑니다. 모든 사물도 마찬가지이구요. 그러니 예술, 종교, 생명이 또한 하나입니다. 나의 예술도 그 곳에서 태어나고 그 곳에서 죽는 것이지요. 어찌 이 작은 표현으로 이룰 수 있겠습니까. 그저 작은 손짓에 불과할 뿐이지요.

이외현:예술이 물, 빛 공기에서 태어나고 죽는다는 말씀이 와 닿습니다. ‘70년 삶의 흔적’ 회고전에 전시된 작품에서 1958년 ‘청관’, 1969년 ‘종교화’, 1978년 ‘강화 성공회 풍경’, 1992년 ‘교황청 박물관’, 1993년 ‘십자가의 길’ 등 종교적 풍경을 볼 수 있었는데 혹시, 어느 분의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박송우:나는 어렸을 때부터 교회에 다녔습니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송가교회(감리교)를 다녔고, 고교시절에는 내리교회(감리교)를 다녔는데. 그 당시 합창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남녀 학생들이 전부 짝을 이루고 나만 홀로였어요. 그 이후부터 교회를 멀리했었지요. 그런데 82년 지금의 아내를 만나면서 천주교회를 다니기 시작했고 가톨릭 미술가회를 창설하여 초대 회장을 지냈으며 종교그림에 인연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외현:그럼, 사모님의 영향을 받으신 거군요. 1996년도에 그린 ‘가족’ 50호 작품은 선생님 가족의 모습이 따뜻한 컬러와 조형으로 표현되어 가족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셨는데요. 가족은 화백님에게 어떤 존재이고 어떤 의미인가요.

박송우:나는 남들보다 한참 늦게 결혼을 했습니다. 마흔두 살에 아내(박노정)를 만나 2녀 1남(선진, 선주, 종휘)를 둔 가장이 되었습니다. 아내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 가정을 올바르게 이끌었습니다. 예술가로서 화가로서 살아가기가 어디 녹녹하겠습니까. 가정을 풍요롭게 꾸려나가지 못한 점이 아쉽지요. 저에게 있어서 가족은 살아가는 의미이지요. 누구에게나 마찬가지겠지만 더불어 아내와 아이들에게 미안하고 늘 고맙게 생각합니다.

이외현:선생님께서 기억의 비구상적 구상이란 말씀을 하신 적이 있으신데요, 설명을 좀 부탁드립니다.

박송우:비구상이든 구상이든 내가 표현하고자 하는 장르를 나는 구분하지 않습니다. 적응적 표현이 자유로워야 삶의 기폭이 있듯이 구상의 필요, 비구상의 필요에 따라 표현될 뿐이지 형태 또는 방법론적으로 구분 짓지는 않습니다.

다만 내가 표현하려는 내용이 어떤 형과 색으로 나타내야하느냐에 따라 구분될 뿐이지요. 구상의 도구로 보더라도 내용은 추상적일 수 있고, 추상적 심상이 구상으로 표현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즉 구상적 내용을 비구상으로 나타날 수 있다는 것과 그 반대로 비구상적 내용을 구상으로 나타낼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마음의 느낌이 어떻게 전달될 것인가에 주안점을 두는 것입니다.

이외현:선생님은 한 장르를 고집하지 않고 작품에 따라 비구상과 구상을 넘나드는 자유로운 표현 방식을 사용하시는군요. 끝으로 화가 지망생이나 기성 작가들에게 남기고 싶으신 말이 있다면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박송우:화가가 진리를 깨달고 작품제작에 임해야 좋은 작품이 표현된다고 봅니다. ‘먼저 사람이 되고 나서 예술을 하라.’ 아니면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면서 예술 제작에 힘써라.’라고 말해주고 싶습니다.

이외현:저희 시인들이나 예술하는 모든 사람들에게도 해당되는 말인 것 같습니다. 혹시, 더 덧붙이실 말씀이 있으시면 부탁드립니다.

박송우:글쎄요. 할 말은 많지만 말 재주가 없어서, 참, 시 하니까 생각이 납니다. 동국대, 홍대 졸업기념 시화전(62년. 9월)을 연 적이 있었어요. 내가 그린 시화작품이 서정주, 신기선, 송혁 시인의 작품이었습니다, 그 당시 서정주 시인은 동국대 교수로 있었지요.

이외현:시와 인연이 있으셨네요. 혹시 그 일을 계기로 써 놓으신 詩라도 있으신지요.

박송우:젊었을 때 시 한 수 끄적거려 보지 않은 사람 있나요. 나도 군대 무렵 노트 한 권 정도는 끄적거려 봤지요. 시가 될지 안 될지는 모르지만.

책장을 한참 뒤지더니 문집을 한 권 내놓으신다. 분홍색 아트지를 오려서 각 장 사이사이에 투명지를 넣어 제법 멋을 부린 책이다. 1963년부터 1964년까지의 글과 시가 50여 편 들어있다고 한다. 그 당시 젊은이들의 고뇌와 생각이 묻어나는 순수하고 낭만적인 표현들이 많았다. 한 편만 소개한다.

 

강물처럼 흐르다가

술기운에 흩어지는 가슴

얼마간 가까이

참 싸움 가르친다

또 한 쌍

머리카락에 걸리는

심오의 오열

큼직한

철통 두 다리는 거리의 기함 같아

나열되는 군엽群偞

여기 동그란 눈

눈들이 나뭇가지에 열리고

흔들리는 고독과 환멸

남들이 속이는

광폭한 흑점이

싸늘한 계절의 술꾼, 소매깃을 끈다.

연기가 흔연하다

해발 400m 계곡 아침

방아깨비

너는 붉은 이마를 모래에 부딪는다/상像(1963. 9. 4)

 

이외현:말씀을 듣다보니 3시간이 훌쩍 지나갔습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6~70년대 대학 풍경에 흠뻑 젖고, 특히 선생님의 심오한 작품세계를 조금이나마 들여다 볼 수 있어서 의미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건강하시고 앞으로도 왕성한 작품활동을 기대합니다.

 

 

자술년보

1941년 인천광역시 강화군 삼산면 하리 475번지 출생

1953년 강화군 삼산초등학교 졸업

1956년 인천 송도중, 1959년 송도고등학교 졸업

1963년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졸업(서양화 전공)

1984년 단국대학교 대학원 미술학 석사

한국미술협회 회원. 한국미술협회 경기도․인천시 부지부장 및 이사. 한국예술총연합회 경기도 및 인천시 이사. 인천중등학교 미술교사연합회회장 및 전국 미술교사협의회 이사. 학생실기대회 및 공모전심사위원장 및 위원. 인천수채화협회 및 서울수채화협회 이사. 인천미술대전 운영위원 및 구상작가초대전 운영위원장. 인천미협 전국미술대전 심사위원장. 계양구예술인협회회장, 계양구미술협회 회장. 가톨릭인천교구미술가회 고문, 강화미술협회 고문. 한국미협 자문위원

논문 조선조 분청사기장군 연구」.

개인전 15회. 각종 그룹전 및 국제전 200여회. 한국미술협회, 인천미협전, 계양구미협전, 강화미협전. 전국중등미술교사전, 인천중등교사전. 서울 수채화협회전, 인천 수채화협회전,인천 수채화 연구회전. 한국수채화 100인전. 문우회전, 홍익미대동문전, 공주문예회관 개관 초대전. 대구두산아트센터 원로작가초대 그룹전. 부평역사 박물관 개관기념백인초대전, 혜원갤러리 개관초대전. 대한민국 종교예술제, 한국가톨릭미술가회전 등 종교미술전. 한 · 중 수채화협회전, 교류전(인천~상해, 인천~대만, 인천~남경, 인천~산동, 서울~북경)및 하와이 교류전. 심상풍경수채화전(갤러리 진). 연정갤러리 “섬과 바다이야기”. 언론사 방방곡곡 갤러리 초대전. 갤러리 몽떼 초대전. 가온갤러리 초대전 <무호無乎 박송우 70년 삶의 흔적>.

예총경기지부장 표창. 경기도교육감 표창. 인천직할시교육감 표창. 교육부장관 표창. 대통령근정포장.

인천예술문화지 작품홍보. 한일미술교사협의회 대표. 한국경영인신문 갤러리에 초대. 가톨릭대 대학신문 전면 작품소개. 홍익대학교 총동창회 이사. 계산신협 이사. 계산동 성당 평협 회장.

인화여자중고등학교, 대헌중학교, 대건고등학교, 인천중앙여자중학교, 부평여자중학교, 강화 중고등학교, 계산중학교, 계산고등학교, 운산공업고등학교에서 교감으로 정년퇴임.

 

이외현 2012년 리토피아로 등단. 아라문학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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